35화: 이낭차 한 잔
청서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여서는 입구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고 이낭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한참 바라보다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대내내가 주신 의복이랑 장신구 가지고 들어오렴. 얼른 치장해 드려.”
명교가 맨 앞에서 어멈들을 거느리고 들어오는데, 어멈들의 손에는 반짝거리는 분홍빛 치마와 금빛 찬란한 장신구가 들려 있었다.
“됐어. 난 이렇게 화려한 거 안 좋아해. 입던 옷 가지고 온 거 있으니까 입으면 돼. 나중에 내가 마음에 드는 거로 차차 만들 거야.”
화려한 분홍빛에 눈이 거슬리고 금빛 찬란한 장신구에 경각심이 생겼다. 환장 오라버니는 새언니가 대범하다고 하지만, 새언니가 대범하단 말을 믿지 않았다. 여인이 대범할 수가 있어? 여인은 대범할 수 없어!
이 저택에 들어온 이상, 앞으로는 너 죽고 나 사는 형국이라 만사 조심해야 해!
“어머나.”
청서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기쁨이 넘치는 기색으로 말했다.
“고 이낭, 자네는 그래도 이 형님이랑 친분이 있었던 셈이라, 한두 마디 꼭 해줘야겠네. 이제 우리 집안에서 자네는 존귀한 외사촌 낭자가 아니야. 일단 거들먹거리는 그 기세 좀 거두지? 고 이낭은 그래도 글공부를 한 사람인데, 설마 모르나? 첩이란 까놓고 말하면 세자야, 대내내 곁의 고양이, 강아지랄까? 우리 대내내 성정은 처마에 매달린 검은 구관조도 금줄로 치장해야 하는 분인데, 하물며 고 이낭같이 절색인 첩은 어떻겠어. 금줄 여러 개 걸어주지 않아서야 쓰겠냐고.”
고 이낭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눈을 표독하게 뜨고 청서를 노려봤다. 청서는 비아냥거리는 얼굴로 전혀 거리낌 없이 그 눈빛을 마주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 그리고 조금 이따가 생길 떠들썩한 큰일이 있는데 네가 무서울까 봐? 내가 지금도 널 무서워할까 봐?
무섭지 않을뿐더러, 이번에 호되게 족쳐줄 생각이었다. 단숨에 이 염치도 없는 인간을 저택에서 쫓아내서 사창가로 팔아 버리면 더 좋고. 너랑 나 사이는 그렇게 되어야 끝나!
“고 이낭, 대야랑 합방했다고 해도 대례를 아직 치르지 않았잖아. 그 예를 치르지 않으면……. 아이고!”
청서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누르며 매우 즐거운 듯 까르르 웃었다.
“설마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고 낭자처럼 청아한 사람은 생각이 과연 남다르겠지. 설마, 고 낭자, 우리 세자랑 운우지정을 나누면서 즐거움만 추구할 건가? 밤에 왔다가 낮에 돌아가고, 즐기기만 하고 이낭은 되기 싫은가 봐? 흠, 그런 거라면, 알았어. 이만 가자. 대내내 거처로 돌아가자. 그리고 부인께도 얼른 사람을 보내서 고 낭자를 댁으로 돌려보내야겠어.”
청서가 손수건을 휘두르며 나가려고 하자, 고 낭자는 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환장 오라버니가 집에 없는데, 정말로 집으로 돌려보냈다가는…….
“돌아와!”
청서가 느긋하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전혀 감추지 않는 경멸의 눈빛으로 고 이낭을 흘겨보다가 코웃음 치고서야 느릿느릿 돌아서서 지시했다.
“체면 세워줄 때 알아서 받아. 얼른 옷 갈아입어. 늦었어. 아무리 밤에 세자야를 기분 좋게 모신다고 해도, 날이 이렇게 밝았는데, 환한 대낮에 치르는 대례도 좀 지켜야 하지 않겠어? 그러고도 글공부한 사람이야? 예법도 모르고, 염치도 없고.”
고 이낭은 화가 나서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매섭게 청서를 노려봤다.
지금 이 자리에서 따질 것 없어. 환장 오라버니만 돌아오면,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청서는 화려하고 금빛 찬란하게 치장한 고 이낭을 데리고 우선 청휘원으로 향했다.
추미와 춘연은 청휘원과 그리 멀지 않은 정자에 서서 두 사람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추미와 춘연을 본 청서는 환하게 웃으며 저 멀리서 웃으며 손짓했다.
“오래 기다렸어? 대내내 거처에 막 아침 식사를 들였대. 좋은 기회야, 얼른 가자.”
청서, 추미와 춘연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 웃고 떠들며 걸었고, 고 이낭은 싸늘한 얼굴로 혼자 뒤떨어져서 청휘원으로 향했다.
수화문으로 들어가자, 마중 나온 수련이 네 사람을 문밖에서 막아서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춰서 말했다.
“어제 너무 늦게까지 소란스러워서, 해가 밝은 뒤에야 겨우 주무셨어요. 아침엔 약을 드시고 조금 전에 제비집 죽을 반 그릇 드시고 졸리다고 다시 누우셨고요.”
“졸려야 좋은 거지! 대내내 병은 잘 자고 일어나면 금세 낫는 병이거든!”
이제 수석 이낭 자리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청서는 요즘 꽤 기품과 배포가 있었다.
“아미타불! 그럼 우린 일단 돌아갈게. 수련 동생, 대내내가 시키실 일이 있다고 하시면 언제든지 사람을 보내. 나, 추미, 춘연 누구든 괜찮아.”
추미가 청서의 뜻을 따른다는 듯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춘연이 힐끔 추미를 바라보고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 이낭은 울화가 치밀어서 손수건을 꾹 쥐어짰다.
이게 무슨 뜻이야? 병을 핑계로 차를 마시지 않겠다는 거야? 어떻게든 예를 받지 않으려고 수작 부리는 거잖아? 비열하고 파렴치해!
“잠시만요.”
문죽이 한 손에 대홍색으로 칠한 쟁반을 들고 휘장을 젖히며 나왔다.
“고 이낭, 이낭 차를 올리셔야죠. 형식일 뿐이니까, 청서 이낭이 대내내 대신 받아달라고 하시네요.”
청서는 순간 얼굴에 빛을 내며 쏜살같이 다가오더니 고 이낭 앞에 단정히 서서 차를 올리길 기다렸다.
고 이낭은 손발이 싸늘해졌다. 마땅히 화를 내며 돌아가야 하지만…….
앞날은 길어,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는다지!
고 이낭의 차를 받은 청서는 후련하고 날아갈 듯한 얼굴이었다.
이따 또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오늘은 속 시원한 일뿐이네, 통쾌해!
추미와 춘연은 각자 자기 거처로 돌아갔고, 청서는 음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고 이낭을 데리고는 고개를 치켜들고 앞장서서 진 부인 정원으로 향했다.
뜰 안으로 들어가자, 영벽(影壁: 가림벽) 뒤에서 화초를 정리하던 어멈 하나가 고 이낭을 흘겨보다가 갑자기 침을 뱉었다. 갓 잘라낸 월계 나뭇잎을 치마로 휙 던지자, 고 이낭은 놀라고 분노해서 어멈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어멈은 전혀 겁먹지 않고 또 한 움큼 던지며 혀를 찼다.
같은 노비끼리, 무서워할까 봐?
앞서가던 청서는 고 이낭을 흘깃 보며 두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잡고 살며시 흔들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지난밤 일은 오늘 해가 밝기 전에 온 저택에 모르는 사람 없이 싹 퍼졌다.
고 이낭과 그녀 아비, 오라비가 안팎에서 손을 잡고 강가 대내내에게서 10만 냥을 뜯어갔다는 얘기며, 그 10만 냥은 모두의 노후 자금, 밥값, 옷값, 집안을 먹여 살리고 병을 치료할 돈이라는 것까지.
그 10만 냥엔 대낭자와 이낭자의 지참금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까지.
오늘 아침엔 일부러 명교를 두 낭자의 처소에 다녀오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낭자와 이낭자가 알아야 하니까. 아주 똑똑히 알아야 하니까. 고씨 계집이 대낭자와 이낭자의 지참금도 뜯어갔는데, 두 사람이 예전처럼 이 천것과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낼까? 그럴 리가 없지!
고 이낭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레져서는 힘껏 치마를 털었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월계는 가지와 잎에 모두 가시가 있어서 한참 동안 탈탈 털다가 할 수 없이 허리를 숙여 일일이 떼어내야 했다. 다시 허리를 세운 고 이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어멈을 빤히 바라봤다.
기억해 두겠어. 앞으로 후회할 날이 올걸?
상방 안, 진 부인은 무기력하게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곁에 서 있는 오 어멈은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은 표정으로 고 이낭을 바라봤다.
그녀는 진 부인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안다. 고가에서 뜯어간 10만 냥은 대내내가 그들 종복에서 남겨준 노후 자금이고, 그걸 충당하려면 지금부터 연말까지 나눠줄 월전, 의복값, 연말 상금을 깎을 것이다.
고가는 그들의 돈을 가지고 간 것이다.
내 돈! 내 논 2백 묘와 내 장원!
이게 다 이 천것, 불여우 때문이야!
고 이낭은 오 어멈을 신경 쓰지 않아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신경은 전부 끙끙거리며 화항에 누워있는 진 부인에게 쏠려 있었다.
종복들을 안중에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복은 사람이 아니니까. 이 점은 강씨 가문이나 고씨 가문이나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종복은 말할 줄 아는 소, 말이라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신분을 스스로 낮추는 일이었다.
고 이낭이 진 부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팔걸이의자에 앉은 강 대낭자와 강 이낭자는 그런 고 이낭을 빤히 보고 있었다.
“이모!”
겁먹은 듯 이모, 하고 부른 고 이낭은 진 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오 어멈이 헛웃음 쳤다.
“낭……. 쯧쯧. 이것 보라니까. 이모라고 부르니까 저까지 호칭이 헷갈렸네요.”
고 이낭은 금세 알아듣고 곧바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 부인, 부인, 제가 자란 걸 봐오셨잖아요. 저를 제일 잘 아시잖아요. 저는 어쩔 수가 없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이모가 가장 잘 아시잖아요. 저는 환장 오라버니에게…… 제 진심은……. 이모!”
고 이낭이 바닥에 엎드려서 진 부인을 향해 애절하게 눈물을 흘렸다.
오 어멈이 끌끌 혀를 찼다.
“고 이낭, 속셈도 참. 감탄이 절로 나와 바짝 엎드리게 하는군요. 세자야가 홀딱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틈에 쪼르르 우리 저택으로 달려와 수작을 부리다니요. 아비와 오라비가 곧바로 따라와서 소란을 피우고 강가 은자를 뜯어갔는데, 그러고 나서 침상에 올라가 놓고, 이제는 말끝마다 이모니, 오라버니라니요.
왜요? 외사촌 낭자라는 존귀한 신분에 맞춰서 이낭 노릇을 하겠다는 겁니까? 실속, 체면, 은자 다 챙기려고요? 고 이낭, 어린 나이에 속셈을 이렇게까지 굴리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이 집안사람 모두를 이낭 손바닥에 올리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치대고, 굴려도 되는 건 아닙니다! 다 순순히 당하는 건 아니라고요!”
“오 어멈, 그게 무슨 말이지?”
고 이낭의 목소리에 독기가 배어 있었다.
아무리 내가 이낭이 되었다고 해도 노비 주제에 함부로 업신여길 수 있는 건 아니야!
오 어멈이 입을 비죽이며 그녀를 흘겨볼 뿐 상대하지 않았다. 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부인!”
오 어멈을 호통친 고 이낭은 곧바로 진 부인을 향해 울먹였다. 번번이 통하던 즉효약이었다.
“어멈이…… 어디에서 무슨 말을 듣고 저러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제 아버지는 부인도 아시겠지만, 비록…… 천성이 나태해도 평생 그…… 아도물을 안중에 둔 적 없어요. 아도물을 신경 썼다면 고가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모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제 아버지는 이모부와 같은 성품이라고요.”
“참 내!”
이낭자 강녕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더니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혀를 찼다.
“어디서 우리 아버지와 비교하는 거야, 염치도 없이!”
그러자 오 어멈이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이낭자! 아이고 참, 낭자도. 신분이 고귀한 백부 낭자신데, 이런 비천한 노비가 잘못한 게 있으면 분부하면 될 것을요. 때리든, 욕하든 다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직접 말싸움하시면 안 됩니다. 체통 떨어집니다.”
“어멈 말이 맞아.”
강 대낭자가 화가 나서 뜨거운 숨을 뿜어대는 동생을 잡아당겼다. 강 이낭자는 고 이낭을 노려보고 씩씩거리며 앉았다.
고 이낭은 경악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왜 이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