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좋은 일
고 낭자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새언니도 나를 싫어하지. 집으로 들어오는 건 더 바라지 않을 것이고. 하지만 신부라서 오라버니 눈 밖에 날 일은 하지 못해.
오라버니가 돌아오지 않으면 날이 밝자마자 곧바로 청휘원으로 가야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새언니에게 이낭 차를 올려야 해. 마시지 않으면, 날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니까, 그럼…… 그럼 머리 박고 죽어 버릴 거야!
내가 앞에서 머리 박고 죽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감히 오라버니가 화낼 일을 할 수 있을까!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고 낭자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때 정원 밖에서 혼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등롱 불빛이 비쳤다.
고 낭자는 벌떡 일어섰다. 온몸이 얼어서 뻣뻣했지만, 변함없이 민첩하고 빠르게 움직여서 벼락처럼 수화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강환장은 갑자기 나타난 고 낭자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고 낭자의 두려움, 걱정, 절망이 모두 눈물이 되었다. 그녀는 강환장을 꼭 끌어안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목 놓아 울었다.
“울지 마라. 됐다. 다 되었어.”
강환장은 고 낭자를 안고 다정하게 위로하면서 안은 듯 잡아끄는 듯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등불 아래, 산발하고 매무새가 흐트러진 데다가 신도 한 짝밖에 신지 않은 고 낭자를 바라보는 강환장은 마음 아픈 가운데 말로 설명하지 못할 묘한 거북함을 느꼈다.
사내 품에 안겨서 끌려갔었다지.
“어떻게 여기에 온 것이냐?”
강환장은 거북한 그 느낌이 불편해서 저도 모르게 떠보듯 물었다.
강환장의 품에 안긴 채 어르고 달래는 다정한 말을 한참 들으며 마음이 침착해진 고 낭자는 그 물음에 순간 재빨리 속셈을 굴렸다.
오라비가 재물을 탐하는 걸 입에 올리면 자기 망신이면서 집안 망신이니 다른 식으로 말해야 했다.
“나는…….”
고 낭자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강환장을 올려다봤다.
“오늘 오전에, 새언니가 청서와 추미를 우리 집으로 보냈어요.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오라버니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더라고요. 고가 여식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첩으로 못 간다고. 오라버니도 알잖아요. 우리 오라버니가 비록…… 그래도 대쪽 같은 사람이에요.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래서 어머니를 찾아가서 부탁했죠. 어머니는 환장 오라버니를 예뻐하잖아요. 그리고 오라버니를 향한 내 마음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고 낭자는 수줍기 짝이 없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다가, 사람을 시켜 절 보내주셨어요. 오라버니, 나 오라버니를 위해서 다 버렸어요. 오라버니, 앞으로 내가 기댈 곳은 오라버니뿐이에요.”
강환장은 비스듬히 어깨에 기댄 고 낭자를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바라봤다.
“네 오라비가 납채로 대뜸 만 냥을 달라고 한 걸 몰라?”
고 낭자의 얼굴이 변하고 또 변하는 와중에 벌써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오라버니도 알잖아요. 우리 오라버니는 청아하고 고고한 사람인데 성미만 대쪽 같은 사람이에요. 고가가 궁핍하긴 해도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언제 돈을 안중에 두던가요? 환장 오라버니도 알잖아요. 아버지는 이모부와 마찬가지로 아도물을 안중에 두지 않아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런 욕심 없고 고고한 성격이 아니라면, 고가가 이 지경이 됐겠어요?”
눈 몇 번 깜빡이는 사이, 고 낭자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 이미 수녕백부로 들어왔고, 이미 환장 오라버니 품에 있다. 오늘 밤만 지나면……. 설사 무슨 짓을 하고 싶어도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무슨 방법이 있으랴.
쌀이 이미 밥이 되었는걸. 흥!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뭘 어쩌겠어? 억지로라도 받아들여야지! 은자니 뭐니 하는 것도 다 끝이야!
은자 이야기가 없던 일이 되면, 오라버니가 은자를 달라고 한 적도 없어지게 된다. 증거도 없이 한 말이고, 대질할 수도 없으니, 그녀의 경험으로 이런 일은 딱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아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강환장은 고개를 숙이고 고 낭자를 내려다봤다. 잠깐 사이에, 그의 머리도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일개 내택 여인이다. 언제나 아비와 오라비를 존경했겠지. 아비와 오라비의 추한 모습을 어찌 알랴. 이건 그녀의 탓이 아니다.
“네 집안일은…… 내가 다 준비했다.”
그녀 아비와 오라비가 벌인 추잡한 일은 입에 올리기도 싫고 역겨웠다.
됐다. 알리지 말자. 그런 진흙탕 같은 가문에서 물들지 않은 연꽃처럼 자라서 변함없이 고결하고 청아하다니. 그것만 봐도 귀한 천성이다. 그러니 첫째처럼 인간 세상의 용봉, 탁월한 아이를 낳아주었지.
“앞으로는 내가 있다.”
강환장은 고 낭자를 품에 안고 애틋한 얼굴로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목욕 시중들 사람을 불러주마. 오늘 밤에 여기서 쉬어라. 내일 아침 어머니에게 가자. 그리고 이씨에게도. 그리고 거처는 어디가 좋은지, 네가 직접 골라라. 앞으로 모든 건 내게 맡겨라.”
고 낭자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서 어쩔 줄 몰랐다.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강환장을 올려다봤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떨어졌다.
드디어, 가난에서 벗어났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고 낭자는 매우 기쁜 얼굴로 혈흔으로 얼룩덜룩한 원말(元帕: 초야에 혈흔을 닦는 수건)을 들고 바라보는 강환장의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이제 나는 오라버니의 사람이야.
고 낭자가 수줍은 듯 강환장의 손에 이끌려 수화문을 나서자마자, 어멈이 잰걸음으로 달려와 고했다.
“세자야, 대교가 중문 밖에서 말씀 전해달랍니다. 벌써 저택에서 나와서 금명지로 갔다고 전하라던 걸요.”
강환장은 순간 두 눈을 반짝이며 다급히 어멈에게 분부했다.
“어서 대교에게 말을 준비하라 해라. 바로 나가마!”
어멈에게 분부하고 바로 걸음을 내딛던 강환장은 급하게 걸음을 거뒀다. 그는 고 낭자를 끌어당겨서 기쁨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넌 정말 내 복덩이다.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나가야 한다. 난 바로 나가야 하니, 청서를 불러주마. 우선, 우선 함께 이씨에게 가라. 널 데리고 직접 어머니께 가거나, 아니면 침착한 어멈을 너와 함께 보내라고, 이씨에게 전하라고 청서에게 말해 두마. 안심해라. 어머니를 봬도 눈치 주지 않으실 것이다.”
“알았어요.”
고 낭자는 가까스로 미소를 쥐어짜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청서가 자신을 시기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강환장을 곁에서 5, 6년 모신 청서는 겉모습은 우직한데 속은 간악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는 천것이었다. 그러나 강환장은 그런 그녀를 매우 신뢰해서 그동안 그녀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이 저택에 들어왔는데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 한마디도 안 돼.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질투가 심하고 생각이 많다고 여길 거야.
서두를 것 없어.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언젠간 오라버니 앞에서 청서 그년의 겉가죽을 갈가리 찢어놓을 테야. 얼마나 악독하고 간교한 년인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 청서는 일단 내버려 두고 멀리 봐야지. 그리고 새언니는…….
그것도 서두를 것 없어. 오라버니의 총애만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어.
청서에게 보낸 시녀가 금세 달려와서 보고했다.
“세자야, 청서 이낭은 날이 밝기도 전에 큰 주방으로 갔대요. 명교 언니 말이, 어제 한밤중에 대내내가 전갈을 보내서 청서 이낭더러 오늘 고 이낭 축하연을 맡아서 하라고 했대요. 또 고 이낭의 축하연은 큰일이니까 반드시 떠들썩하고 경사스럽게 해야 한다고, 청서 이낭이 그랬대요. 청서 이낭은 어젯밤에 분부를 듣고 새벽부터 요리 단자를 준비했고, 오늘 날이 밝기도 전에 왕 어멈이랑 상의하러 큰 주방에 갔대요.”
강환장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의 대범함은 확실히 봐줄 만했고, 청서에게 고 이낭의 축하연을 맡긴 것도 잘한 일이었다. 평생 봐온 터라, 청서가 고씨에게 충성이 가득한 사람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면 이씨에겐 누구를 함께 보낸다? 특히 어머니 쪽엔 누굴 보내야 하나? 이씨는 내버려 둬도 감히 어쩌지 못하겠지만, 어머니는…….
휴, 어머니도 쇠고집이라. 혹시 고씨를 난처하게 하시면…….
적당한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추미? 안 되지. 이씨가 데리고 온 아이고, 어떤 아이인지 전혀 모르는데 고씨를 그런 아이에게 맡길 순 없지.
이 후원에서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은 고씨야. 고씨에 관한 일은 만사 조심하고 깊이 생각해야 해.
다른 사람은 안 돼.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역시 청서밖에 없군. 청서가 연회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 조금 늦게 가도 상관없겠지. 이씨는 병들어 누워있으니, 조금 늦게 가도 이해해 줄 것이고, 어머니는 원래 늦게 일어나시니까.
결정을 내린 강환장은 고 이낭에게 다정하게 분부했다.
“넌 일단 돌아가서 쉬어라. 밤에…… 힘들게 했으니 돌아가서 좀 더 자고, 일을 끝내면 같이 이씨에게 다녀오라고 청서에게 말해두마. 그리고 어머니에게 가서 절 올리면 된다. 마음 푹 놓아라. 만사 내가 있다.”
“응.”
밤에 힘들게 했다는 강환장의 말에 고 이낭의 얼굴이 순간 새빨개졌다.
강환장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발걸음도 경쾌하게 중문으로 달려갔다.
중문 앞에 대교가 벌써 말을 준비해 두었다. 말에 오르려던 강환장은 중요한 일을 떠올리고는 어멈을 손짓해 불렀다.
“대내내에게 가서 전해라. 나머지 은자도 다 바꿔 두었으면 내가 급히 써야 하니 오늘 바로 장방에 넘기라고 해라. 그리고 전 관사에게 가서 바로 대내내를 찾아가서 20만 냥 은표를 장방에 들이라고 하고.”
“예.”
어멈은 강환장이 말에 올라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나가는 걸 보고는 바닥에 침을 뱉고 또 뱉었다.
강환장의 내실로 돌아간 고 이낭은 팔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한숨 자고 일어났다.
눈을 뜬 그녀는 시녀를 불러 기분 좋게 목욕하고는 낡은 옷 중에서 고르고 또 골라서 갖춰 입고 거울에 비춰 보았다. 기쁜 가운데 몹시 아쉬웠다.
예쁜 옷 몇 벌 더 있고, 반짝거리는 적금 장신구도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시녀는 굳은 얼굴로 주방이 매우 바빠서 그녀의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바쁘면 말라지.
별로 따질 생각이 없었다. 앞날은 기니까.
고 이낭은 간식을 달라고 해서 조금 먹고 차를 두 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환장의 다섯 칸짜리 상방 안팎을 샅샅이 살펴본 다음에 흡족해져서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벌써 정오가 가까워진 걸 깨닫고는 조마조마해지고 불안해하면서 또 한 편으로 화가 치밀었다.
이럴 줄 알았어! 청서가 나를 질투할 줄 알았어! 오라버니만 없으면 어떻게든 골탕을 먹이려 든다니까.
그녀는 청서가 무얼 하는지 사람을 보내 보거나 오라버니에게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알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수화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청서의 목소리도 들렸다. 지극히 즐거워 보이는 웃음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렸다.
“고 이낭은? 일어났니? 해가 중천인데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 어제 많이 힘들었나 보네.”
고 이낭은 화항에 걸터앉아서 도도한 얼굴로 휘장을 젖히고 들어오는 청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