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10만 냥 二
오 어멈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강환장을 바라봤다.
10만 냥! 세자야, 미치셨습니까?
“어서 가게!”
강환장은 돈 이야기만 나오면 귀신 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만 봐도 화가 치밀었다. 이 집안 전체가 어찌 하나같이 가난뱅이 귀신이 붙은 것처럼 구는게야.
내가 궁상스러운 꼴을 제일 싫어하는 걸 모르는가?
“아? 예!”
오 어멈은 후다닥 돌아서서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앞으로 달렸다. 문턱을 넘다가 어디에 걸렸는지 쿵 하고 넘어지더니, 아무런 느낌이 없는 듯이 재빨리 기어 일어나서 재빨리 달려갔다.
고 노야는 입을 반쯤 벌리고 강환장을 빤히 봤다. 넋이 나가서 지각이 없었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나? 10만 냥을 가지고 오라고 했어? 10만 냥을 가지고 오라고 하라고? 우리에게?
고사현의 얼굴 오관(五官)에서 코만 아직 중간에 떡하니 붙어 있고 나머지 눈썹, 눈, 그리고 입은 모두 날아갈 듯이 치켜 올라갔다.
10만 은자! 정말로 10만 은자를 준다고?
대체 이가에서 얼마나 재물을 받은 거냐?
고사현의 인생 스무 해 동안 이렇게 머리가 빨리, 민첩하게 돌아간 건 처음이었다.
대체 이가에서 얼마나 재물을 받은 거지? 이가엔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지?
10만! 10만 냥 은자! 10만 냥 은자다!
그걸 달라고 했다고 곧바로 내놓아? 오이 세 개, 대추 두 알, 하찮은 물건 뿌리듯이? 강가가 대체 얼마나 부자가 된 거지? 이가의 재물은 대체 얼마나 많은 거냐?
제길! 더 부를걸! 제길, 제길! 더 부를걸! 너무 적게 불렀다!
역시 너무 궁핍하니 식견 없이 굴었구나! 그러니 겨우 10만 냥을 달라고 했지! 백만 냥……. 아니, 아니지, 아니야. 2백만 냥……. 어쩌면 5백만 냥을 달라고 해도 내놓았을지도 모르는데.
잠시 미친 듯이 기뻐했던 고사현은 그 후로 얼이 빠졌다.
덜 불렀어! 제기랄!! 너무 적게 불렀어!
이동은 잠들지 않았다. 전원(前院)에서 소식을 들고 오는 어멈이 하나 나가면 다른 하나 들어오고, 끊임없이 찾아왔다.
만 어멈이 보낸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 전원에서 일하는 강부 종복이 더 많았다. 모처럼 돈 많은 대내내에게 알랑거릴 기회고,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떠들썩한 일이었다. 하물며, 한 번 다녀오면 동전을 한 움큼이나 받았다.
이동은 허리 받침에 기댄 채 이야기를 들었다. 고 대야가 대뜸 10만 냥을 달라고 했다는 걸 듣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서둘러 몸을 일으켜 수련을 바라봤다.
“만 어멈이 보내온 그거, 시험해 봤니? 어때?”
“세 번 해 봤어요. 열 장씩이요. 다 찍었고, 마지막 장은 기껏해야 두 시진 일각 버텼어요. 짧은 건 고작 한 시진 일각이고요.”
수련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동은 웃음 지었다.
“충분해. 얼른 가. 너랑 청국 둘이서 얼른 백 장 준비해서 10만 냥을 만들어. 얼른 가! 금방 은자 가지러 사람이 올 거야.”
“예?”
수련은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경악한 얼굴로 이동을 바라보며 믿어지지 않는 듯 말했다.
“예? 말도 안 돼요. 설마 세자야가 정말로…….”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어서. 조심해야 해. 너랑 청국 둘이서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 봐. 여러 번 봐야 해.”
수련은 청국을 불러서 서둘러 곁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오 어멈이 급한 일로 뵙길 청한다고 수화문 밖 시녀로부터 기별을 전했다.
문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 왔네요? 정말로 은자를 달라고 왔어? 정말 염치없네!”
“나가 봐.”
이동이 눈짓하자, 문죽이 오 어멈을 데리고 들어왔다. 오 어멈은 웬일로 매우 공손한 태도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는 침상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우물쭈물했다.
“대내내, 너무 늦었지요. 몸이 편찮으셔서 이런 때 쉬시는 걸 방해하면 안 되는데, 실은……. 실로…….”
오 어멈은 혀가 꼬였다. 고씨 계집 때문에 세자야가 기꺼이 고가 부자 수작에 놀아나면서 돈 달라고 대내내에게 손을 벌리다니. 그녀조차 뜨끔해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이동은 대답하지 않고 묻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오 어멈을 바라봤다.
“조금 전에, 고 낭자가 집으로 왔습니다. 대내내도 분명 이미 아시겠지요…….”
대뜸 10만 냥을 달라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난 몰랐네.”
이동은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한마디 했다.
오 어멈은 몰랐다는 이동의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요. 그게, 대내내는 편찮으셔서 정양하셔야 하니까요. 그게 말입니다. 조금 전에, 고 낭자가 산발하고 매무새도 흐트러지고 신발은 한 짝만 신고서, 집에서 도망나왔다고 세자야를 찾아왔지 뭡니까. 지금 세자야 거처에 있습니다.”
그 부분부터는 오 어멈도 말이 술술 나왔다.
“고 낭자가 후문으로 막 들어오자마자, 고가 노야와 대야가 문 앞에 찾아와 소란을 부렸습니다. 우리 세자가 그 댁 대낭자를 납치했다고요. 뒤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따라왔는지 모릅니다. 다들 직접 봤다면서요. 키 큰 사내가 고 낭자를 두봉 안에 감싸고 오는 내내 부둥부둥하면서…….”
“세자야가 그랬대나?”
이동이 담담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물었다.
“그럴 리가요! 세자야가 어디 그런 염치없는 짓을 하실 분인가요? 고 낭자가…….”
오 어멈은 갑자기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뭐 하러 대내내에게 이런 말을 할까. 고씨 계집이 사내랑 얼싸안고 있었는데, 그게 세자가 아니면? 고씨 계집을 첩으로 들이겠다고 10만 냥을 내놓으라고 하는 게 세자인데…….
고씨 계집이 부녀자의 덕과 정조를 잃었다고 대내내가 한마디하면…….
오 어멈은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정말이지 내가 미쳤지. 10만 냥 때문이야. 고씨 집구석 화근들 때문이야!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허튼 소리하는 건 흔한 일이지요. 어찌 됐든 고 낭자가 저택에 있습니다. 대내내도 아시겠지만, 고 낭자도 가련한 사람입니다. 고가 노야, 대야가 작정하고 세자가 고 낭자를 납치했다면서 난리를 부리고 있어요. 10만 냥을 내놓아야 이번 일을 마무리하겠다고요.”
입술을 질끈 깨물고 10만 냥을 내뱉은 오 어멈은 순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10만 냥을 드디어 눈앞에 있는 이 대내내에게 떠넘긴 기분이었다.
“정말로 세자야가 납치한 게 아니야?”
“물론이지요.”
오 어멈이 매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라면 관아에 가면 되지, 뭐 하러 협박당한대.”
이동이 느긋하고 담담하게 말했고, 오 어멈은 말문이 막혀 침을 꼴깍 삼켰다. 머쓱한 얼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억지로 해명했다.
“아룁니다, 대내내. 세자께서 고 낭자를 데리고 온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고 낭자는 저택에 있습니다. 게다가 세자야와 상의하셨잖습니까. 대내내가 세자야 대신 고 낭자를 들여주시기로요.”
“아!”
이동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아’ 소리에 오 어멈은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된 이상 눈을 질끈 감고 계속 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친척입니다. 세자야의 의중은, 세자야가 말씀하시길, 소인더러 대내내에게 말씀드려서 전에 준비하라던 은표 중에 10만 냥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동은 기대앉아서는 아무런 말 없이 눈을 살며시 감았다. 오 어멈은 쉴 새 없이 힐끔거렸다. 힐끔, 또 힐끔. 속으로 고 낭자를 수천 번 욕하면서.
오 어멈이 슬슬 포기하고 돌아가서 세자야에게 보고하려고 할 때쯤, 이동이 눈을 뜨고 문죽을 불렀다.
“수련은? 가서 뭐 하는지 보고 불러오렴. 전에 바꿔 놓은 은표 중에 10만 냥 세서 가지고 오라고 해. 그리고 만 어멈을 불러서 오 어멈과 함께 다녀오라고 해. 다 보는 앞에서 은표를 확실히 센 다음에 넘기라고 해.”
“예.”
문죽은 고분고분 대답하고는 수련과 청국이 일을 마쳤는지 보러 곁방으로 갔다.
오 어멈의 두 눈이 다시 똥그래졌다.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정말로 은자를 준다고? 정말로 준다고? 10만 냥을? 10만 냥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수련이 상자를 안고 와서 침상 앞에 섰다. 만 어멈이 오자, 만 어멈과 오 어멈이 보는 앞에서 상자 안에 든 은표를 세었다. 천 냥짜리 은표가 모두 백 장. 먹향이 나는 새 은표를 다 센 수련은 오 어멈을 바라봤다. 오 어멈은 문제없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똑똑히 봤어!
수련은 은표를 상자에 넣고 오 어멈에게 넘겨주었다. 만 어멈은 오 어멈 뒤를 따라서 같이 뜰 밖으로 나갔다.
오 어멈은 은표 상자를 안은 순간부터 꿈을 꾸는 듯이 지척지척 걸었다. 제가 안은 상자 안엔 10만 냥이 들었다. 10만 냥!
대내내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내놓았다. 이씨 가문은,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걸까?
만 어멈은 청휘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넋이 나간 오 어멈을 힐끔 바라봤다. 그러고는 건장하고 힘센 어멈 몇을 더 불러왔다. 오 어멈은 만 어멈의 지시를 못 들은 듯 얼이 빠진 표정이었고, 오 어멈이 이유를 묻길 기다리던 만 어멈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설명했다.
“고가네는 지극히 궁핍하지 않나. 사람이 너무 쪼들리면 뭐든 할 수 있는 법이네. 조심해야 해. 건장한 아낙 몇 더 불러서 같이 가는 게 좋아. 그래야 행여 무슨 일이 생겨도 제압하지.”
“그렇지. 그러니까!”
오 어멈은 어쨌든 이 저택에서 총괄 관사 노릇을 오래 한 사람이라,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품에 안은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좀더 끌어당겼다. 같이 가는 사람이 많으면 좋지. 이 조그만 상자 안에 10만 냥이나 있는걸!
곧 실하고 건장해 보이는 어멈 대여섯 명이 와서, 앞에 셋, 뒤에 셋이 서고 만 어멈과 오 어멈은 중간에 서서 전원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만 어멈은 그리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되었네. 할 말이 있었어.
우리 고내내가 혼인한 이래, 점포, 장원을 제외하고 혼수로 모두 40만 냥을 가지고 왔네. 옷감, 장신구, 가구 10만 냥, 지참금으로 30만 냥. 지금 10만 냥 정도 되는 물건은 우리 고내내 거처에서 쓰거나 곳간에 쌓여 있지. 어멈도 어제 보았지?”
오 어멈은 만 어멈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서 얼떨떨할 뿐이었다.
“10만 냥 값어치의 현물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같은 집안에서 옷감, 장신구를 변통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래서 움직일 수 있는 돈은 지참금 30만 냥뿐이었네.”
만 어멈은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꾹꾹 눌렀다.
“솔직히 현은으로 30만 냥을 준비하느라 이가 은고를 거의 다 털었네. 이가가 돈이 좀 있긴 하지만, 장사하는 집안은 돈이 충분한 적이 없어. 점포에 운용 자금이 있어야 하고, 화물을 가지고 오려면 돈을 깔아야 하고. 그런 게 아니라면 또 점포를 새로 여는 데 들어갈 돈도 부족하지. 게다가 우리 태태가 스스로 돈을 주조하는 ※등통(鄧通)도 아니고, 은자가 많아야 얼마나 많겠나. 30만 냥, 태태가 이가 은고를 탈탈 털어서 겨우 모은 것이네.”
(※등통: 한나라 문제의 총애를 받던 신하. 문제에게 주전鑄錢을 허가받아 등씨전을 세상에 유포한다.)
오 어멈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만 어멈을 바라봤다.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갑자기 또 돈이 아까워진 건가? 아까워졌대도 내게 할 말이 아니지. 이야기하려거든 세자야한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