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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29화 (29/463)

29화: 건곤일척 一

옥묵이 나간 후 감감무소식이자, 고 낭자는 뜨거운 솥 안의 개미처럼 초조해졌다. 무수한 가능성을 상상하고, 생각이 깊고 많아질수록 일이 안 좋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큰 오라비를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생으로 삼키고 싶어졌다. 어머니는 또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은지.

강씨 가문의 은자는 모두 이씨 손에 있어서 지금은 환장 오라버니가 돈을 쓰려면 이씨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다.

만 냥은 둘째치고, 천 냥, 백 냥이라고 해도 이씨가 고가를 위해 쓸 리가 있겠어? 나를 집에 들일 리가 있겠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고 낭자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이모 눈 밖에 났다. ‘염치없고 수치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 강가에 들어올 수 없다.’ 이모가 한 그 말에 몇 번이고 악몽에서 깨어났다. 이모는 그녀를 들이려고 하지 않고, 이씨도 분명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기댈 곳은 환장 오라비뿐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여우 같은 미인을 셋이나 첩으로 들여서…….

고 낭자는 속이 탔다. 사내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이 어디 있나. 새것이 생기면 헌것은 버리는 족속인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이제 곧 하늘이 어두워지는데, 옥묵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 낭자는 방문 앞에 서서 손톱이 다 박히도록 문틀을 꼭 붙잡고 있었다.

더 기다릴 수 없어.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 계속 기다리다간 다 끝나!

고 낭자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문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서슴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죄수처럼 바람같이 곧장 상방으로 달려갔다.

진 태태는 작은아들을 품에 안은 채 얼떨떨한 얼굴로 큰딸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무얼 하려고?

고 낭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진 태태를 올려다봤다.

“어머니! 불효녀를 용서하세요. 정말로 어쩔 수 없어요. 차라리 환장 오라버니의 첩이 될지언정 오라버니가 말한 늙고 추한 사람과 혼인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 저도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저는 가요!”

일어선 고 낭자는 들어올 때보다 더 빠르고 다급하게 사라졌다. 진 태태 품에 안긴 고 이야는 품에서 머리를 치켜들고 잔뜩 들뜬 얼굴로 어미를 바라봤다.

“어머니, 어머니! 큰누이가 도망갔어요! 첩이 되려고요! 첩이 뭐예요?”

“방택, 방택! 돌아와라! 방택!”

드디어 정신을 차린 진 태태는 작은아들을 안은 채 목을 빼고 부르고 또 불렀다.

고 낭자는 단숨에 돌아가서 문을 닫고 허둥지둥 짐을 쌌다. 가지고 갈 수 있는 건 다 가져가야 했다. 가지고 갈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고 낭자는 침상 아래 단단히 감춰 둔 적금 팔찌를 꺼냈다. 장 태태를 처음 만났을 때 준 상견 선물이었다. 적금 귀걸이도 있었다. 이건 진 부인과 함께 영안백부에 조 육낭자를 만나러 갔을 때, 영안백 부인이 준 상견 선물이었다. 그리고 옥이 박힌 금비녀, 이건 이씨가 들어 온 다음 날 친척들을 만날 때 준 상견 선물이고.

그녀의 개인 재산이라곤 이게 다였다. 어릴 때도 조금씩 상견 선물을 받았는데, 그땐 너무 어리고 속셈이 없을 때라 큰 오라비에게 죄다 빼앗겼다.

고 낭자는 귀중한 세 물건을 잘 지니고 의복 상자를 열어서 얇은 옷으로 두어 벌 꺼냈다. 곧 헤질 듯이 나달나달해진 옷을 보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짐을 쌌다. 차라리 가지고 가서 내버려 둘지언정, 여동생들이 망치는 꼴은 보기 싫었다.

반 각 만에 짐을 다 챙긴 고 낭자는 보따리를 덜렁 들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심호흡하고 눈을 감고서 밖으로 나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측문으로 곧장 달려갔다.

측문으로 가는 모퉁이에서 고개를 들었더니 큰 오라버니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고 낭자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아서 다급히 나무 뒤로 숨어서 숨을 죽였다. 큰 오라버니가 앞으로 두 걸음, 뒤로 한 걸음, 비틀거리며 사라지고서야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너무 오래 쭈그리고 있는 바람에 다리가 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주무르며 주변을 살폈다. 하늘이 곧 어두워질 테니, 차라리 조금 더 기다리다가 해가 완전히 저물면 조용히 나가는 게 나을 듯했다. 들키면 큰일이니까.

결정을 내린 고 낭자는 허름한 난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각에 쭈그리고 앉아서 애를 태우며 해가 지길 기다렸다.

한 시진 후, 수녕백부.

대요 댁은 나무그림자를 밝으며 담을 따라 나는 듯이 달렸다. 만 어멈을 찾아낸 그녀는 어멈의 팔을 잡아끌며 밖으로 당겼다.

“만 형님, 고가 대낭자가 측문에 있어요!”

“뭐라고?”

만 어멈은 놀라서 얼어붙었다. 대내내가 이 집에 들어온 이 두 달 동안 본 희한한 일이 과거 십 년 동안 봐 온 것보다 많았다.

“숨 좀 돌리고요.”

대요 댁은 힘껏 가슴을 내리치고 말을 이었다.

“측문에 손 형님, 전에 이야기했죠?”

“아들을 우리 점포에 보내고 싶다는 어멈?”

“네, 네, 네, 맞아요! 그것참 공교롭죠. 오늘 오씨랑 당직인데, 그것이 아시다시피 매번 와서 휙 둘러보고 금방 돌아가잖아요. 그래서 측문은 손 형님 혼자 지켜요. 문 닫고 자려고 하는데, 고 대낭자가 작은 보따리를 덜렁 들고서, 머리는 산발이 되어서 세자를 만나러 왔다지 뭐예요. 그 꼴을 보니 분명 좋은 마음을 품고 온 게 아닐 것 같아서, 문간방에서 기다리라고 달랜 다음 문을 잠그고 절 찾아왔더라고요. 이 일, 어떻게 해요?”

대요 댁은 두 눈을 빛내며 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이건…….”

만 어멈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손 어멈한테 고 낭자를 은밀하게 세자야 거처에 들여보내라고 해. 가는 길에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반드시 아무도 모르게 세자야 거처에 들여보내야 해!”

“예?”

대요 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렇게 되면 고 낭자의 뜻대로 해주는 거 아니고?

“이 사람 좀 보게. 집중 좀 하라고. 자네도 생각해봐. 세자야는 고 낭자 때문에 체면도 버렸어. 부인하고도 맞섰고. 고씨를 들이겠다는 생각이 불길처럼 왕성한데, 짐 싸서 들어온 건 둘째치고 설령 사통하는 현장을 들켰다고 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고씨라는 이 활활 타는 목탄을 대내내 손에 올려놓을 건가? 대내내가 뒷수습해야겠냐고!”

“그렇네요!”

대요 댁은 곧바로 깨달았다.

고 낭자를 거두는 사람이 이 야밤에 짐 싸 들고나온 고가 계집의 추문을 대신 덮어야해. 이런 일은 세자에게 넘기는 게 제일 좋지. 자기 여인이니까 알아서 감싸라지.

“바로 갈게요!”

대요 댁이 돌아서서 달리려고 하자, 만 어멈이 덥석 잡았다.

“말 전하고 난 다음에 자네 바깥사람을 내게 보내게. 서두르라고 해. 빠를수록 좋아!”

“걱정하지 마세요.”

대요 댁은 치맛자락을 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만 어멈은 문 앞에 서서 잠시 생각하다가 계단을 내려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짐 싸서 들어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누구 좋으라고!

고사현은 오늘 기분이 무지 좋았다. 곧 만 냥이 들어오는데, 어쩌면 그게 다가 아니지 않은가. 그 큰돈을 손에 넣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연향루(軟香樓)에 가서 아라의 섬섬옥수를 잡고 통쾌하게 마실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것도 잠시, 연달아 몇 번 퇴짜 맞고 나니 기분이 엉망이 되었다.

몰락한 뒷골목 창기까지 돈이 없다고 타박하면서 차 한 잔 내주고 혼자 내버려 두다니. 안목도 없는 물건 같으니. 큰돈을 얻게 되면 보라지. 무릎 꿇고 앉아 신발을 핥게 해줄 테다!

결국 고사현은 작은 점포를 찾아 답답한 마음을 풀며 술을 마셨다. 곁에 미인 없이 홀로 술을 마시니 마실수록 속이 답답해져서 아예 술주전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강가에서 만 냥을 가지고 오면 돈을 들고 다시 나가련다!

“대야!”

문지기 겸 사환 겸 관사인 조 대랑이 문을 열고 들어와 눈을 깜빡였다.

“대야, 조금 전에, 골목 입구 남북 화행 오씨가, 우리 대낭자가 이만한 보따리를 들고 사내를 따라갔다지 뭡니까. 그 사내가 누군지는 제대로 못 보았고, 대낭자가 그 사내를 따라 수녕백부로 가는 것만 봤답니다.”

고사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응? 뭐라는 거냐?”

또 잠시 얼떨떨했지만, 어찌 됐든 젊은 만큼 긴 시간 술에 찌들어 있던 머리라도 금세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라고? 뭐라고 했느냐. 방택이 사내와 달아나? 강가로 갔다고?”

고사현은 고함치며 벌떡 일어나서는 고 대낭자의 거처 쪽으로 달려갔다. 조 대랑은 들뜬 얼굴로 뒤를 따랐다. 구경할 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 대단한 미인인 대낭자도 볼 수 있다니!

고방택의 방엔 불이 꺼져있고, 물론 사람도 없었다. 이번엔 머리가 빠르고 정확하게 돌아간 고사현이 분노해서 고함쳤다.

“옥묵은? 천한 것! 이 천것들! 여봐라, 다 따라오너라! 아버지는? 노야를 모셔 와라! 강가가 방택을 납치했다! 돈! 내 돈!”

고사현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은자! 꽃처럼 하얀 은자! 산처럼 쌓인, 눈꽃 같은 은자!

강환장은 홀로 후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맑고 그윽한 꽃향기를 맡으면서 기억과 생각을 가다듬었다. 모든 일,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세세히 기억하고 정리했다.

호랑이도 평지에서는 개에게 물린다고, 지금 내가 바로 그 짝이니 서두르면 안 되지. 차근차근해야 해. 일단 조력자들을 하나씩 찾아오고, 예전에 일을 그르치기만 했던 어리석은 것들을 하나하나 걷어차 내고, 해야 할 일들을 경중 완급을 정해 정리해내야 해.

서두르면 안 돼. 이제 고작 스물하나,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매우 많지. 천, 지, 인, 모든 우세를 잡았으니까. 서두를 것 없다.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면 돼.

강환장이 막 마음을 가다듬고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자기 거처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수녕백부 대문 앞에 등불이 환하게 밝히고, 소란스러움이 하늘을 뒤덮었다. 줄지어 나타난 등불 여럿과 함께 호들갑 떠는 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에 계신다! 여기다, 여기!”

“찾았다, 찾았어!”

“세자야! 어디에 계셨습니까? 야단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시끄럽다!”

강환장은 크게 고함치고는 도둑이라도 잡은 듯이 호들갑 떨며 자신을 에워싼 시녀들을 노려봤다. 시녀, 어멈들이 체통 없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통에 막 가다듬고 평온해진 마음이 한순간 다시 부글부글 치밀었다.

“세자야, 고 노야와 대야가 장정들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세자야께서 그 댁 대낭자를 납치했다고요.”

한 어멈이 들뜬 눈빛으로 용기 내서 고했다.

“뭐라고?”

강화장은 제 귀를 의심했다.

고씨가 납치되었어?

머리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고씨가 납치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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