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8화 (28/463)

28화: 추미의 건의

이동이 흡족한 얼굴로 추미를 바라봤다.

“응. 참 잘했다. 우리 가문 전당포의 영 조봉(朝奉: 전당포 주인) 고향이 호주야. 마침 영 조봉 고향 집과 네 외사촌 오라비 주서음이 지금 머무는 곳이 골목 하나 거리더구나. 영 조봉의 부친도 전에 우리 전당포의 대조봉이었어. 지금 고향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지. 네 외사촌을 영 노인장에게 부탁할 생각이야.”

그 말에 추미의 두 눈이 반짝였다.

“네가 돌봐주고 있다는 걸, 정말로 오라비에게 알리지 않을 거니? 정말로 영 노인장이 인정을 베푸는 것으로 해도 돼?”

이동은 추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추미의 일은 그녀도 얼마 전에야 만 어멈에게 들었다.

추미가 네 살 되던 해에, 생모는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비는 금세 후처를 들였고, 계모는 그녀를 너무 미워하며 매일 때리고 욕했다. 담벼락 아래 세워 놓고 굶기고 벌주고, 아비는 정말로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는지 어찌 됐든 상관하지 않았다. 추미는 계모가 들어온 지 반년도 되지 않아서 뼈만 남을 정도로 앙상해졌다. 그녀는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어느 날 새벽에 집을 나와서 단숨에 몇십 리 떨어진 둘째 이모 집으로 도망갔다.

막 지아비를 잃고 홀로 된 둘째 이모는 혼자 주서음을 키우면서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연명하면서도 그녀를 받아주었고, 친딸처럼 아끼며 키웠다.

추미는 이모 밑에서 열다섯 살까지 지냈는데, 이모가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곧 병들어 쓰러졌다. 추미가 바느질해서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살아야 했는데, 추미는 성격이 차분하지 않아서 근 십 년 동안 바느질을 배우고도 겨우 겉핥기 수준이었다. 도저히 이모와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이라 돈을 받고 내놓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모의 약값도 있어서 돈은 두 배가 드는데 버는 돈은 없으니, 반년도 되지 않아서 집에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치워야 했다. 주서음은 두 사람 몰래 학당을 그만두고 몰래 허드렛일을 했다. 힘쓰는 일을 안 해 본 사람이라, 세 번째 나간 날 허리를 삐어서 들것에 실려 왔다.

설상가상의 상황에, 추미는 다급함에 눈이 다 벌게져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모두 문을 두드리며 부탁했다. 심지어 아비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했지만, 계모는 발 씻은 물 한 대야를 뿌릴 뿐이었다.

앞길이 막막해진 추미는 거리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판다는 팻말을 짊어졌다. 마침 만 어멈이 그걸 보고 장 태태에게 고했고, 장 태태는 만 어멈을 시켜 그녀를 사들였다. 그리고 은자를 주어 돌려보면서 이모와 외사촌의 병이 나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외사촌 주사음의 허리는 금세 나았는데, 이모의 병은 갈수록 깊어졌다. 그렇게 서너 달 질질 끌다가 끝내 숨이 끊어졌다.

장 태태는 사람을 보내 그녀와 외사촌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도와줬다. 외사촌은 관을 들고 고향인 호주로 출발했고, 추미는 이가로 들어왔다가 이동의 배가 시녀가 되어 수녕백부로 왔다.

“오라버니가 알게 되면……. 뭐 하러요. 제가 몸을 판 걸 오라버니가 알았을 때, 머리 박고 죽겠다고 벽으로 달려들었어요. 자기가 무능한 탓이라고.”

추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렸다.

“지금 저는……. 꽤 잘 지내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뭐 하러 다시 마음 아프게 해요. 오라버니만 괜찮으면, 잘 지내면, 저는……. 제가 안 좋을 게 뭐가 있어요.”

“그래, 그럼. 난 마음 놓을게.”

이동은 마음이 잿더미가 되어 아무런 욕심이 없어 보이는 추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도 이런 절망을 겪었었다. 여러 번 겪었었다.

추미는 외사촌을 사랑하리라. 아마 외사촌도 그녀를 사랑하리라. 하지만 그녀와 외사촌에게는 이번 생에 희망이 없었다.

“대내내, 영 어르신에게 말을 전해주실 수 있나요? 만약, 제 말은……. 만약 가능하다면, 오라버니를 설득해 달라고요. 급하게 혼인하지 말고 과거에 급제하면……. 적어도 수재는 된 다음에 혼사를 정하라고요. 사내는 서른, 마흔이 되어도 늦지 않잖아요. 일단 가업부터 세우고 집을 꾸려야죠. 적어도 수재는 되어야 좋은 혼처를 찾을 거예요. 대내내는 모르시겠지만, 글공부해서 수재, 거인(擧人)은 그야말로 은자를 쌓아서 만드는 거예요. 지금은 대내내의 큰 은혜를 입은 덕분에 제가 글공부시킬 수 있다지만, 혼인해서 처에 아이까지 줄줄이 생기면 어떻게 뒷바라지해요. 오라버니가 직접 먹여 살리려면 분명 글공부에 지장 생길 것이고, 제가 뒷바라지하자니, 아무리 계산해 봐도 방법은 하나더라고요. 오라버니 대신 아내와 자식을 거둬 먹이거나, 아니면 오라버니 글공부 뒷바라지하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오라버니는 글공부에 집중하지 못해요…….”

수련과 녹매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셈하는 추미를 눈을 부릅뜨고 바라봤다. 추미는 단 몇 마디로 아까까지만 해도 처량하고 서글펐던 분위기를 울지도 웃지도 못할 분위기로 만들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셈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았어.”

이동은 못 말린다는 웃으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대내내, 이 큰 은혜를…….”

추미가 일어서더니 무릎을 꿇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이러지 마. 날 도와준 건 너야. 너랑 네 외사촌, 얼마나 좋은 배필이었니.”

추미가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대내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전 제 주제를 알아요! 태태께서 몸값을 주시고, 또 돌아가서 이모와 오라버니 수발들 수 있게 해주셨죠. 넉 달이나요. 이모는 편안하게 눈 감으셨고, 오라버니도 멀쩡해졌어요. 모두 태태의 은혜랍니다. 그리고 몸값도 그래요. 저 같은 애를 4백 냥이나 쳐주셨어요. 제 주제를 잘 아는데, 전 조금 괜찮게 생겼다는 장점밖에 없어요. 다른 건, 바느질도 못 해, 음식 솜씨도 없어, 금기서화(琴棋書畵)는 전혀 몰라요. 시중드는 것도 그래요.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천둥 치듯이 쿵쿵대며 걸어서 온 방 안에 제 발걸음 소리가 쩌렁쩌렁해요. 껍데기밖에 없어서, 다른 집에 팔려 갔으면 2백 냥 받으면 많이 받았을 거예요.”

추미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다급하고 빠르게 말을 내뱉자, 수련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탄했다.

“추미, 숨 좀 쉬어. 내가 다 숨이 막힌다!”

추미는 감탄하는 수련의 모습에 머쓱해졌다.

“나…… 술기운이 좀 올라서……. 배가 시녀가 되겠다고, 제가 만 어멈을 찾아가 말씀드렸어요. 만 어멈에게 물어보시면 알아요. 유일한 장점이 생긴 거라서 대내내의 배가 시녀가 되어 은혜 갚는 길밖에 없어요. 대내내는 태태와 마찬가지로 말도 못 할 정도로 잘해주시잖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지금도 속이 터질 것 같아요. 대내내와 태태가 강가에 못 한 게 뭐가 있어요? 강가 사람들, 어떻게 이렇게 대내내를 대해요?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요.”

추미는 이동의 이마를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처음엔 이런 일이 일어나더니, 이어서 청서를 첩으로 들이고. 또 저랑 춘연도요. 이젠 고 낭자까지 들인다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이에요? 전엔 멀쩡한 인간으로 봤더니…….”

수련이 힘껏 헛기침하자, 추미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제 이모가 자주 말씀하셨어요. 제대로 되먹지 못한 사내는 사내도 아니라고요.”

이번엔 녹매도 헛기침했다.

“너희 둘, 차 좀 마시고 목 좀 가다듬어. 문 걸어 잠그고 우리끼리 이야기 나누는데 뭘 그렇게 신경 쓰니.”

이동이 추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밖에서는 이런 말 하면 안 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저도 알아요. 마음 놓으세요, 대내내.”

추미의 이모는 소탈하고 시원한 성격이고, 추미도 원래 발랄한 성격이라 그런 이모 밑에서 십여 년 동안 구속받지 않고 자랐다. 이동이 이렇게 말하니 추미는 순간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면서 두 눈이 반짝이고 생기가 돌았다.

“대내내, 세자야는 정말 몹쓸 물건이에요! 조심하셔야 해요. 사내가 못되면 여인보다 훨씬 못됐답니다!”

“추미!”

수련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추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나도 알아.”

이동이 서서히 숨을 내쉬며 별안간 몰려온 후회와 아픔을 천천히 내뱉었다.

추미도 이렇게 금세 깨닫는 것을, 나는 수십 년 걸려서 겨우 깨달았다니.

“가끔 새벽에 깨면 혼자 눈을 뜨고 생각해요. 내가 대내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요.”

추미는 수련에게 맞은 것도 개의치 않았다. 목숨까지 낭자에게 바칠 생각인데, 이 정도 말이 뭐 대수라고.

“방법이 생각났어?”

“아니요.”

이동이 웃으며 묻는 말에 추미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가난한 집이라면, 까짓것 시원스럽게 싸우고 갈라서면 되죠. 그리고 좋은 사람 찾아서 재가하는 거예요. 하지만 강가처럼 작위 있는 집안은 예법이니, 국법이니. 휴우.”

추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니!”

수련이 참다 참다 못 참고 이번엔 추미의 머리를 때렸다.

“막 혼인하셔서 어려움을 좀 겪은 건 인지상정이지. 기껏해야 시누이 문제, 이낭 문제잖아. 뭐가 대단하다고.”

추미가 수련을 흘깃 흘겨봤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세자야가 대내내를 대하는 태도야. 이런 사내가 뭐가 필요해?

이동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됐어. 이만 가서 쉬어. 수고했어.”

추미는 무릎을 구부리고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돌아섰다. 그러더니 묘하게 눈빛을 반짝이면서 이동을 향해 뜬금없이 말했다.

“대내내, 저는 대내내를……. 대내내는 분명 아실 거예요. 저 대내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사람 죽이는 거, 불 지르는 거, 다 해요! 기꺼이요! 대내내, 태태는 혼자서도 평생 아주 잘 지내셨어요!”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았어. 안심해.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야.”

추미는 제 한 말에 제가 놀란 듯이 얼굴이 붉어졌다가 다시 하얘져서 치맛자락을 들고 황급히 달아났다.

이동은 이해 못 한 듯이 얼굴을 찌푸린 수련을 힐끔 보고는 녹매에게 시선을 돌렸다. 녹매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동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전엔 녹매가 이렇게 영특한 걸 왜 몰랐을까.

예전엔 뭐에 홀려서 두 눈이 단단히 멀었었나 보다.

이동이 잠이 들자, 수련과 녹매는 밖으로 나갔고, 수련이 녹매를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추미가 나갈 때 한 말, 아무래도 이상해. 넌 알아들었니?”

녹매는 창문을 닫으라고 눈짓하더니 자기도 달려가 문을 열고 주변을 살핀 다음, 수련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귓가에 소곤거렸다.

“사람 죽이는 거, 불 지르는 거, 거기에 태태는 혼자서도 평생 잘 지낸다고 했잖아. 모르겠어? 낭자 대신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뜻이야.”

녹매는 강환장의 이름을 이야기하진 못했다.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수련도 알아듣고 겁에 질리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낭자가……. 낭자가…….”

수련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저 성품이 올곧아서 음험한 간계 같은 건 항상 한 박자 늦게 깨달을 뿐이었다. 녹매가 짚어주자마자 곧바로 모두 깨달았다.

“그래. 낭자가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했지. 하지만 그때가 오면?”

녹매는 수련 앞에 웅크리고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수련을 바라봤다. 수련은 일어서려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서 다시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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