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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27화 (27/463)

27화: 공공의 적

“진 태태가 너무 우시니까, 고 대야가 화를 내면서 태태께 호통치시더라고요. 혼수 마련해갈 돈이 한 푼도 없어서 혼처도 없다고요. 세자야의 첩이 되는 건 대낭자가 덕을 쌓은 거라고요. 그러더니 고 대야가 만 냥을 가지고 와서 돈을 내놓고 고 낭자를 데려가라고 하더라고요.”

강환장의 얼굴이 솥 바닥처럼 시커메졌다. 청서의 성실하고 우직한 성품은 평생 봐왔다. 허튼소리 할 사람이 아니었다.

고 대야라……. 그렇지, 예전에 저질렀던 짓을 지금 곰곰이 되짚어 보면 의심할 만한 인품이지.

청서가 입을 다물자, 강환장이 살며시 토닥였다.

“계속 이야기해라. 무서워할 것 없다. 고 대야는 고 대야고, 고씨는 고씨다. 용의 아홉 자식도 다 다르다고,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도 저마다 다르다고 하지 않느냐.”

“네.”

청서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고씨를 끌어내 얼굴을 할퀴어주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그 김에 세자야도 몇 번 할퀴어주고.

“그러다가, 추미가 대낭자는 서생 가문 출신이니까 우리 가문으로 들어와서 첩이 된다고 해도 세자야와 대내내가 절대로 서럽게 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강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추미 그것도 분별 있는 듯하군.

“고 대야가, 대낭자를 데리고 가려면 만 냥은 첫 납폐일 뿐이라고 했어요. 일단 은자부터 보내고 앞으로 얼마가 더 필요한지는 은자를 받은 다음에 잘 생각해 보고 다시 이야기하신다고요.”

강환장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내가 고씨를 좋게 봤다고, 앉은 자리에서 흥정하려는 게지!

“저택으로 돌아와서 바로 대내내에게 고하러 갔어요. 대내내 말씀이, 이 일은 세자야께 고하고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은자는 별일 아닌데, 은자를 줬는데도 뒷말이 있을까 봐 걱정이라고요.”

청서는 통쾌한 마음으로 강환장의 푸르죽죽한 얼굴을 바라봤다.

“음.”

강환장은 조바심이 치밀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사소하디사소한 일은 아무 관사나 보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를 보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생에 쓸 만한 사람이 수하에 누가 있나.

돌아온 이후로 가장 익숙하지 않은 것, 심지어 견딜 수 없는 것이 바로 곁에 마음 놓고 편하게 부릴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손발, 심지어 이빨도 하나 없는 맹수가 된 기분이랄까. 파리가 눈앞에서 왱왱거리는데 그놈을 내리칠 손발, 손톱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작은 일은 영해(寧海)에게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을…….

영해는 지금 어디에 있지? 강환장은 짜증스러운 듯 이마를 두드렸다.

영해가 내 곁에서…… 20년은 있었지? 아니야, 더 되었을 것이야.

영해가 언제부터 곁에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영해는 아마 강가의 종복이 아닐 것이다. 강가엔 영씨 종복이 없었다.

그럼 영해는 어디에서 온 거지?

강환장은 망연하기만 했다.

그리고 문 이야(二爺)도. 내게 오기 전에 문 이야는 어디에 있었지? 내게 의탁하기 전에, 문 이야가 경성에 있긴 했나? 경성에 없었다면, 고향은 또 어디지?

지금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몰랐을지도 모른다. 이건 사소한 일이었다. 그때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부상(副相)인 그가 이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자가 매우 필요했다. 의탁해 오는 그날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다급했다.

벌써 사람을 보내 며칠이나 그를 찾아다녔다. 문 이야가 예전에 유호수(劉好手)라는 점포에 자주 가서 차탕을 마셨고 그 점포의 차탕이 천하일품이라는 말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호수 점포엔 장궤부터 점원까지 싹 물어봐도 문 이야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강환장은 넋을 잃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 문 이야를 어떻게 만났는지, 그 상황은 똑똑히 기억났다.

그가 막 하북 재난 구제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처음으로 상관으로서 아랫사람을 홀로 통솔하여 맡은 임무였다. 호부에서 그를 괴롭히고, 지방 관원이 곳곳에 함정을 파놓았었다. 지방 정무를 맡은 경험이 없어서 크게 골탕먹었었다. 손도…….

강환장은 무심결에 항상 돌려대는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다시 돌아와서도 이미 배어 버린 습관을 고칠 수가 없었다.

그날, 그는 답답해하며 능운루에서 술을 마셨다. 문 이야가 다리를 절며 다가오더니 몇 마디 만에 그의 처지를 콕 집어냈다. 강환장은 그날로 그를 저택으로 데리고 돌아왔고, 그날부로 곁에 두었다. 수많은 풍랑을 문 이야와 함께 이겨냈다.

그 당시, 문 이야는 그가 태자 쪽에 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 때문에 몇 번이나 크게 다퉜다. 심지어 문 이야는 그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때 머리가 어떻게 되었었다. 자기와 고 이낭의 귀하디귀한 장자가 태자와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것만 생각하고, 황상이 조 귀비를 총애해서 조 귀비가 낳은 육황자를 무지하게 총애하는 것만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진 황후와 그의 두 오라비의 악독함을 잊었었다.

강환장은 피비린내 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온 경성에 떠다니던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피비린내.

수녕왕부도 피바다가 되기 전에,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자야?”

청서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강환장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괜찮다.”

강환장은 힘껏 얼굴을 문질렀다.

이번엔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 하늘이 내린 기회, 우월한 지리 조건, 사람까지 모든 걸 선점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해.

이번엔 강가의 부귀가 반드시 대대로 이어져야 해. 내 아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반드시 청출어람으로 영광과 부귀를 이어가야만 해.

“내일 다시 오마.”

강환장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자, 청서가 다급하게 쫓아나갔다.

“제가 가서 시중들게요.”

“됐다. 후원에 가서 좀 거닐련다. 넌 술도 마셨으니 먼저 쉬어라.”

강환장이 손을 휘두르며 밖으로 나갔다.

청서의 거처에서 나온 추미는 일단 돌아가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강환장이 청서의 거처에 갔다는 말을 듣고 둥글부채를 들고 좀 걷겠다고 나와서 잠시 돌다가 청휘원으로 향했다.

막 약을 먹은 이동은 추미가 들어오자, 등받이를 대달라고 수련에게 지시했다.

추미는 방 안을 둘러봤다. 수련이 이미 모든 시녀를 물리고 녹매와 둘이 시중들고 있는 걸 보고 안심하고 침상 앞 각답에 앉았다.

“대내내의 말이 다 맞았어요. 청서는 고 낭자 이야기가 나오니까 물어뜯고 싶어서 난리더라고요. 대내내한텐 별 감정 없어 보였어요. 오히려 좋은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진심이었어요.”

“응.”

이동이 살며시 대답했다. 예전에도 청서와 고 낭자가 암암리에 얼마나 옥신각신했는지 모른다. 청서가 사내아이를 가졌었는데, 고 낭자에게 당해서 아이를 잃었다. 고 낭자가 그 뒤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일에 청서도 한몫했다.

그 당시 그녀는 두 사람이 겉으로는 온화하게 양보하며 형님, 아우 하면서 다정하기 짝이 없이 지내면서 뒤에서는 너 죽고 나 살자고 싸운 걸 냉정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가끔은 중간에 불붙이기도 했지만, 강환장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두 사람이 저지른 일을 감출 수 있는 건 모두 감춰 주었다.

강환장은 자기가 집안을 매우 잘 다스리고, 집안에 처첩이 많아도 자매처럼 우애 좋다고 자찬했었다. 그런 그에게 여인들이 너 죽고 나 살자고 싸우는 꼴을 보일 수가 없었다. 마음 아파할 테니까. 그가 마음 아파하는 걸 볼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전에는 첩들의 쟁투란 안주인인 자기가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로 여겼었다. 강환장에게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한 여인으로 남는 건 그 당시 그녀가 가장 바라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첩들 사이에 일어난 모든 안 좋은 일을 다 묻었다.

그는 아마도, 자기 후택은 수많은 미인끼리 시종일관 매우 다정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내내가 말씀하셨을 때만 해도 믿기지 않았어요. 청서가 고 낭자에게 무슨 원한이 그렇게 깊을까 싶었죠.”

추미는 그 말을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동은 희미하게 냉소했다. 총애를 다투다가 깊은 원한을 맺는 건 너무나 많이 봐왔다.

“제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청서가 먼저 말을 꺼내더라고요. 고 낭자를 들이면 안 된다고. 그러다가 세자야가 고 낭자에게 벌써 마음이 동했다고도 말하더라고요. 고 낭자가 얼마나 염치없는 인간인지도요. 어쩌면 이미 그런 일이 있어서 저택에 들이지 않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하면서요.”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 낭자가 이 집안에 들어오는 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서는 주량이 좋아서 계속 저랑 춘연에게 술을 먹이더라고요. 아마 술김에 솔직히 말하길 바랐던 거겠죠. 몇 잔 마시고, 저는 취한 척했어요. 춘연은 정말로 조금 취했고요. 속셈 없는 애라, 청서가 묻기도 전에 마음을 다 털어놓더라고요. 낭자도 아시잖아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어 하는 거.”

추미는 경멸하듯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청서가 고 낭자는 어찌 됐든 서생 집안 적장녀고 부인의 생질녀라서 이 집에 들어오면 신분이며 지위가 대내내보다 조금 떨어질 뿐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세자야가 대내내를 좋게 보지도 않고…….”

추미는 별안간 입을 다물고 겸연쩍은 듯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니.”

추미가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돌리지 않고 그냥 있는 대로 다 말씀드릴게요. 고 낭자가 들어오자마자 아이를 가져서 서장자를 낳으면, 이 저택에서 세 번째, 네 번째로 존귀한 존재가 되는 거라 하더라고요. 대내내도 뒤로 밀려날지도 모른다고요. 고 낭자는 염치가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수단이 악랄하대요. 다른 사람 숨통을 틀어막을 거라고요. 나중엔 자기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몽땅 살기 힘들어질 거래요.”

이동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는 자신이 누르고 있어서 고씨가 다른 사람의 숨통을 쥘 기회가 없었다. 그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할지 모를 일이었다.

“저는 그냥 청서가 무슨 말을 하든 맞장구쳤어요. 춘연은 정말로 놀랐고요. 저택으로 돌아와서는 저한테 딱 달라붙더라고요. 어쨌든 제가 그랬죠, 저는 앞으로 청서 언니를 따를 거라고요. 만사 청서 언니의 지시대로 움직일 거라고요. 그랬더니 춘연도 그렇게 말했어요. 청서는 뿌듯한 듯이 고 낭자가 들어오는 건 막을 수 없지만, 순조롭게 들일 순 없다고 했어요. 고 대야가 대뜸 만 냥을 요구했잖아요. 그 일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고요.

부인이랑 세자야는 검은 눈동자로 하얀 은자만 보는 사람을 제일 혐오한대요. 이 일로, 고가 집구석은 두 눈에 하얀 은자밖에 모르는 염치없는 것들이라는 걸 똑똑히 알게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고 낭자,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정체를 깔끔하게 까발린 다음에 들여야 한다고 했어요.”

추미가 입을 비죽이며 말을 이었다.

“그건 맞는 말이에요. 고가 집구석을 보니, 참. 그렇게까지 법도 없고 뻔뻔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저는 그냥 멍청한 척, 나는 바보니까, 언니가 하자는 대로 다 한다고 했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춘연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청서가 우리더러 일단 준비만 하고 가만히 있으래요. 우선 세자야 의중을 떠보겠다고요. 세자야가 청서 거처로 갔다는 말을 듣고 여기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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