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고집스러운 옛 기억 三
“세자야, 그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인은……. 세자야, 이 늙은이 어릴 때부터 부인을 모시면서, 부인 시중들고 세자야 시중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인 간이 여러 개라고 해도 감히 대내내의 혼수를 뒤지는 짓은 하지 못합니다. 설령 부인이라도……. 서생 가문 출신인 부인이 어찌 그런 일을……. 세자야, 누구에게 무슨 말씀을 들으신 겁니까? 소인이 대내내의 혼수를 뒤졌다고요? 세자야…….”
“내가 눈이 없는 줄 아는가!”
되돌아온 강환장은 곁에 있는 사람, 이 집안, 모든 게 거슬리고 이가 갈렸다.
이 집안, 어째서 곳곳이 예전과 다른 게야. 예전은 얼마나 좋았나. 예전의 강씨 가문은 내가 신경 쓸 일 같은 건 하나도 없었거늘.
어디가 달라진 거지? 이씨의 상처가 심해진 것, 그 점인 것 같은데. 그래, 그 점이 예전과 달라졌다. 예전엔, 똑똑히 기억하는데, 다치긴 했으나 이틀……, 그래 길어야 이틀 만에 나았어. 이번엔 벌써 보름 넘게 누워있다. 조 의원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심하게 다친 것이 맞다. 정말로 꾀병이 아니란 말인가.
강환장은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서 서늘한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다가 강완과 강녕에게 시선이 닿았다. 강환장의 매서운 시선에, 강완은 그나마 버텼지만, 강녕은 순간 무너졌다.
“난 아니에요! 어머니……. 아니, 아니, 어머니가 아니라, 오 어멈이에요! 네, 오 어멈이 맞아요! 오 어멈이 그랬어요! 새언니 곳간에 비단이 나뒹굴고 있다고, 차라리 가져다 나랑 언니에게 옷을 지어주는 게 낫다고요. 내가 가지고 싶다고 한 게 아니에요. 오 어멈이 말했어요.”
오 어멈은 눈앞이 어질해져서 이낭자의 멍청한 얼굴을 잘근잘근 밟아주지 못하는 게 한스러워졌다.
분명 자기가 부인을 붙들고 대내내의 능라로 옷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고, 대내내의 장신구를 나눠달라고 했으면서! 쓸 곳도 없다느니 했으면서!
“옥가아, 어떻게 오 어멈을 탓할 수가 있느냐? 30만 은자를 한마디도 없이……. 우리가 이가 같은 상인 집안과 혼인을 맺은 것이…….”
진 부인은 수치스러운 듯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 혼수가 아니라면, 우리가 상인 가문과 사돈이 되었겠니? 바로 그런 이유로, 그 혼수는 다른 사람의 혼수와 다르다. 그건 그 애의 혼수가 아니야, 그건 우리 집안 물건이다.”
강환장이 냉담한 얼굴로 한참 만에 싸늘하게 대답했다.
“은자 일은, 나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가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혼인 문제도 앞으로 다시 거론하지 마시고요. 자꾸 입에 올려 무얼 합니까?”
강환장은 또 짜증이 몰려왔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 이렇게 말이 안 통하고 무지한 사람이었다는 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강환장이 오 어멈을 노려봤다.
“어머니의 얼굴을 봐서 이번엔 용서하겠다. 다시 한번 어머니를 종용해서 이런 짓을 한다면, 네 일가를 막일꾼으로 팔아 버릴 것이야.”
오 어멈은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내일 자네가 고가로 가고, 며칠 내로 고씨를 집으로 들이게.”
강환장은 모든 일을 신속히 해결하기로 했다. 어서 고씨를 집으로 들여야만 했다. 이 집안은 고씨 같은 사람이 제대로 다스려야만 자기가 걱정 없이 밖에서 큰일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야말로 더 중요한 일이고.
“예.”
오 어멈은 마음을 놓으며 진 부인이 뭐라고 하기 전에 냉큼 대답했다. 세자가 이렇게 큰일을 맡기는 걸 보면 아까 일은 넘어간 것이다.
강환장은 진 부인의 거처에서 나와서 몇 걸음 걷다가 고사현을 떠올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사현은 변변찮은 인간이지만, 전생에 그가 은자를 달라고 했던 기억은 없었다. 중간에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청서가 다녀온 것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청서는 착실하고 우직한 사람이고, 고씨와 예전부터 진심을 터놓고 지냈다. 그 정으로 고씨가 그녀를 평생 돌봤고, 그녀도 고씨를 공경하며 친밀하게 대했다.
음, 이 일의 진상은 청서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거처로 들어간 강환장은 수화문으로 들어간 후에야 청서가 오늘부터는 이낭이 된 것이 떠올랐다. 이낭이 되었으니 자신의 거처에서 시녀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이낭 거처가 따로 있어야 했다.
“청서는 거처를 옮겼느냐?”
강환장이 걸음을 멈추고 시녀를 불러 물었다.
“아룁니다, 세자야, 오후에 벌써 이용원(怡蓉院)으로 옮겼습니다. 명교를 데리고 갔습니다.”
시녀가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위에 빈자리가 생겼으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세자야 눈에 들면 좋은 기회를 손에 넣을 수 있고.
“소인이 모시고 갈까요? 아니면 청서 이낭을 모시고 올까요?”
“됐다.”
강환장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이용원은 그의 거처인 곡란원(谷蘭院)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뜰 뒤쪽엔 커다란 매화림이 있는 매우 청아한 곳으로, 전생엔 고씨가 막 저택에 들어왔을 때 살던 거처였다. 나중에 아들을 낳고 거처가 좁아져서 큰 곳으로 옮겨주려 했는데 고씨가 그 매화림을 너무 아껴서 옮기기 아쉬워했다. 그래서 이용원 앞을 터서 이진(二進) 원락을 지어주었다.
청서가 왜 이용원을 골랐을까. 직접 고른 것일까? 아니면 이씨가 지정해 준 것일까.
이용원 안, 추미와 춘연을 배웅한 청서는 막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기척을 듣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안 그래도 술기운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환장을 보고 기뻐하며 웃는 모습이 평소보다 더 요염해 보였다. 강환장은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뽀얗고 통통하고 항상 웃던 성실하고 우직한 모습이 너무 익숙한 바람에,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젊고 가녀린 모습을 볼 때도 저도 모르게 뽀얗고 퉁퉁한 중년 여인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얼굴이 발그레하고 촉촉한 눈빛으로 달짝지근한 술 향기를 어렴풋이 풍기는 여인의 모습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뽀얗고 퉁퉁한 중년 여인은 사라지고 눈앞에 있는 청서는 젊고 요염한 것이 마음을 간질이는 매력을 물씬 풍겼다.
술기운 때문인지, 강환장의 이글거리는 시선 때문인지, 청서는 수줍고 당황스러워졌다. 그녀는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며 웃음 지었다.
“세자야, 어쩐 일로……. 시중들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점심때 술을 좀 마셔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환장이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 아니냐. 당연히 많이 마셔야지.”
원락 입구에서 그렇게 강환장의 품에 안긴 청서는 너무 수줍고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나만 오늘 경사스럽게 이낭이 된 것이 아닌데, 세자야가 내게 오시다니. 게다가 이렇게 체면을 세워주시다니!
“들어가 보자꾸나.”
강환장은 이왕 옮겨왔으니 이용원을 청서에게 주기로 생각을 바꿨다. 일진(一進) 원락은 안 그래도 규모가 너무 작으니, 고씨가 들어오면 청월원(淸月院)을 내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청월원은 청휘원과 마찬가지로 삼진 원락이었다. 고씨에게 집안일을 맡길 생각이니, 당연히 이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지위를 주어야 했다.
강환장은 청서를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서 한바탕 자분거리다가 손을 씻고 차를 받아서 한 모금 머금었다.
“오늘 고가에 갔었다고?”
“네.”
청서는 강환장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얼굴은 여전히 붉었고, 예민한 온몸이 경각심이 발동하여 솜털까지 바짝 섰다.
오후의 축하연이 끝나자마자 추미를 불렀고, 추미는 춘연을 불러서 그녀의 원락에서 또 술을 조금 마셨다. 몇 잔 마신 뒤, 세 사람은 모종의 공감대를 찾아 작은 동맹을 맺었다.
세 사람은 수녕백부 같은 집안에서 첩이 된 것만으로 가장 높이 올라간 셈이었다.
겨우 스물 초반인 세자야가 처가 없을 리가 있나. 지금 대내내는 출신이 낮고, 은자는 얼마든지 있는 데다가 너그럽고 대범했다. 첫째, 지금부터 그녀들이 아이를 낳는 걸 허락했다. 그것만 해도 경성의 비슷한 수준의 집안에서는 십중팔구는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게다가 세자야가 대내내에게 별 정이 없었다. 그 점은 청서가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이런 대내내를 어디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 오후, 그녀와 추미, 춘연이 하나가 된 첫 번째 공감대였다.
두 번째 공감대는 바로 고 대낭자였다.
고 대낭자는 집안이 궁핍해도 한때 서생 가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고 낭자의 어머니와 진 부인이 친자매라는 점이었다. 이런 첩은 집안에 들어오면, 세 사람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대우를 받게 된다.
고 대낭자를 향한 세자야의 진심을 추미와 춘연은 몰라도 그녀는 똑똑히 알았다.
이런 신분에, 세자야가 진작 정을 품고 있는데, 이런 귀첩이 들어오면 세자야가 얼마나 애지중지할까. 또 얼마나 득세하고 거들먹거릴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내내는 상관없었다. 신분이 있으니까. 그러나 세 사람은? 앞으로 어찌 살라고.
이 고 낭자는, 들이지 않으면 제일 좋고, 정 안 되면, 한 발짝 물러나서, 그녀가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뒷공작을 해둬야 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녀가 들어온 다음에 셋이 함께 기회를 잡아서 세자야 앞에서 그녀의 진짜 모습을 밝혀내야 했다. 뒷공작을 해두면, 앞으로 훨씬 쉬워질 것이고.
청서가 잠시 멈칫하다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내내가 후한 선물을 준비하셨어요. 대내내가 앞으로 고 낭자가 들어와도, 고가 태태가 우리 부인의 친자매인 걸 봐서라도 고가는 친척의 예로 대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강환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고가를 확실하게 친척 대우했었다. 그 점은 그 여인이 잘한 일이었다.
“저와 추미가 고가에 가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 태태가 울음을 터트리셨어요. 얼마나 우는지…… 저도 다 마음이 아팠어요.”
청서가 강환장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너도 참.”
강환장이 어여뻐하는 모습으로 청서의 볼을 어루만졌다.
“다행히 고 대야가 계셨는데, 매우 화를 내면서 대낭자를 들이는 건 좋지만, 정실이 아니라고 해도 정실의 예로 모셔야 한다고 했어요. 삼매육빙의 절차를 모두 거쳐야 하고, 정실을 들이는 예를 하나도 빠지면 안 된다고요.”
청서는 고개를 들고 조금 긴장한 듯 강환장을 바라봤다. 강환장은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그래야지. 고가가 아무리 몰락했다고 하나, 대쪽 같은 성정은 남아 있을 테니까.”
청서는 마음이 서늘해져서 무의식적으로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그래야 하죠. 그러다가.”
청서는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진 태태가 계속 우셨어요. 심하게 우시면서 고 이야(二爺)가 단갱을 다 먹지 못했네 어쩌고 하셨고, 그 사이 고 대야는 우리 옷차림을 살피셨어요.”
청서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고 방향을 틀었다.
“우리가 말끔하게 차려입고 값진 장신구를 갖췄다고, 세자야가 혼인하더니 거들먹거린다고도 했어요. 세자야가 주인 없는 이씨 가문 재물을 손에 넣었으니, 당연히 고가에도 나눠줘야 한다고. 대낭자를 집으로 들이고 싶으면 제대로 돈을 써야 한다고도 했어요.”
청서는 이야기하면서 조심스럽게 강환장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안색이 변하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 방향이 맞나 봐. 그럼 이쪽으로 계속 끌고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