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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24화 (24/463)

24화: 고집스러운 옛 기억 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만 어멈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자물쇠를 부쉈어? 우리 고내내(姑奶奶: 시집간 딸에 대하여 친정에서 부르는 호칭) 재산을 조사하고 몰수하려고? 집안에 도적이 든 건가, 아니면 병사가 들이닥친 건가? 열쇠 가지고 오는 것도 못 기다리고 자물쇠를 다 부수다니. 뭐 하자는 거지? 우리 고내내가 죽길 바라고 고사 지내는 건가!”

만 어멈 뒤에 분노한 배방 어멈들이 바짝 뒤따르고 있고, 그 어멈 뒤엔 구경하는 종복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따라왔다. 다들 베슬베슬 눈치 보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몰려왔다.

진 부인이 무위이치(無爲而治), 자연의 순리에 맡겨 아무 조처를 하지 않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스린 지 오래인 수녕백부는 산만하기 짝이 없고, 법도랄 게 전혀 없었다. 이렇게 떠들썩한 일이 생기니,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일은 몽땅 내던지고 구경하러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만 어멈이 나타나자, 오 어멈은 뜨끔해졌다. 만 어멈이 얼마나 똑똑하고 지독한지 이미 겪었었다.

“만 어멈, 그게 무슨 말인가!”

오 어멈은 눈을 질끈 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가려는데, 아까까지 겁먹고 있던 배방 어멈들이 한 줄로 서서 나가지 못하게 곳간 앞을 막아섰다.

“역시 뒤지러 온 것이로군!”

곳간 앞에 선 만 어멈은 엉망진창인 곳간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목소리 높였다.

“우리 고내내의 혼수를 이렇게 뒤집어 놓다니. 이러고도 강가에 체면이란 게 있는가? 이것 좀 보게, 다들 보라고. 우리 고내내가 혼수로 가지고 온 옷감을 다 밟고 있지 않아. 우리 고내내의 장신구. 세상에, 다 어디로 간 거야?”

만 어멈은 곳간 앞을 막고 서서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오 어멈은 화도 나고 조급하기도 하고, 귀신처럼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무슨 헛소리야! 본인들이 어지럽혀 놓고! 분명…… 자네가, 아까 자네도 곳간이 엉망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야 그냥 하는 말이지요! 우리 고내내의 곳간이 얼마나 깔끔한데요!”

오 어멈이 손가락질한 배방 어멈은 단 한마디로 오 어멈의 말문을 막았다.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은 오 어멈은 버럭 화를 냈다.

“다들 저의가 뭐야? 모함하려고? 잘 들어, 만씨! 꿈도 꾸지 마라! 나, 오씨가 어떤 사람인지, 부인이 똑똑히 아셔! 잘 들어, 자물쇠를 부순 것도, 검사한 것도 모두 부인의 명으로 한 일이야! 날 음해하려고? 어림도 없지!”

오 어멈은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만 어멈을 향해 혀를 찼다.

“부인이라고 해도 우리 고내내의 혼수를 뒤집는 건 아니지…….”

만 어멈의 기세가 눈에 보이게 떨어지는 듯하자, 오 어멈은 다시 기가 살아서 혀를 찼다.

“오히려 내가 따져야 하거늘 가만히 있었더니! 대답해 보게, 여기 있던 상자들, 다 어디로 가지고 갔나?”

“이건 우리 고내내의 혼수네! 우리 고내내의 돈이 어디로 갔는지, 자네가 알 필요 없지!”

만 어멈은 기세가 죽었지만, 여전히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진 오 어멈은 다시 혀를 찼다.

“쯧!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해! 자네 고내내의 혼수? 자네 고내내에게 이 혼수가 없었으면, 우리 세자야가 자네 낭자 같은 사람을 처로 들였겠나? 우리 수녕백부가 이가 같은 상인 집안과 사돈을 맺었겠냐고! 왜? 이제 이 집으로 들어왔으니 애초에 왜 이 혼인을 맺은 건지 잊었나? 그래서 은자를 빼돌릴 생각인 건가?”

“오 어멈,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대내내는 이 집안의 주인이네. 어디 감히 그런 헛소리를!”

“무슨 말?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물어? 그럼 똑똑히 듣게. 자네 고내내는 바로 이 혼수, 이 돈으로 우리 수녕백부 대문을 넘은 걸세! 이 혼수가 대내내 거라고? 퉤! 이건 우리 저택에 들어오는 매로전(買路錢: 통행료)이네!”

두 사람의 말다툼은 판세가 갈라졌다. 이 순간 오 어멈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만 어멈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곳간 안팎, 여기저기에 비집고 서서 구경하던 종복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어서 새 자물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잠그게! 열쇠를 가지고 돌아가서 부인께 보고드리자고! 잘 듣게, 가서 대내내에게 이 은자, 들고 나간 그대로 되돌려 놓으라고 전해! 정말로 자기 은자라고 생각하는가? 이 혼수가 자기 거라고? 쯧!”

오 어멈이 목을 치켜들고 돌아가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만 어멈은 자물쇠를 채우라고 명령하고 열쇠를 들고 돌아섰다. 모든 게 대내내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답답한 마음만 더 답답해졌다. 괴롭고, 아팠다.

대내내, 대체 어떤 집안과 혼인하신 겁니까.

옥묵은 골목 모퉁이에 서서 수녕백부 대문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대문을 돌아서 종복들이 출입하는 측문 쪽으로 향했다.

측문 앞에서 일각쯤 서 있었을 때, 드디어 익숙한 어멈이 보이자 후다닥 다가갔다.

“장 아주머니!”

“어머, 옥묵이네. 여기서 뭐 해? 대낭자가 또 오셨나?”

청서와 추미의 축하주를 마신 장 어멈은 발그레한 얼굴로 위아래로 옥묵을 훑어보았다. 잔뜩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옥묵은 잘 보이려는 듯 웃었다.

“대낭자는 안 오셨어요. 세자야, 저택에 계세요? 우리 대낭자가 조용히 전할 말씀이 있어서요.”

장 어멈의 무시하는 듯한 얼굴에 얄궂은 기색이 더 해졌다.

“어머나! 대낭자가 며칠 있으면 우리 저택으로 들어온다더니? 왜? 며칠도 못 기다리겠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우리 세자야를 만나려고? 정말이지 마른 장작에 불이 잘 붙는다더니, 요 계집애, 중간에서 역할을 톡톡히 하는구나? 나중에 대낭자에게 귀염받겠구나.”

“아주머니! 세자야, 계시냐고요.”

옥묵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머,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부끄러워? 대낭자랑 세자야가 딱 달라붙어서 그러고 있을 때, 네가 옆에서 시중든 거 아니니? 그때도 다 있었으면서, 말 몇 마디에 부끄러워하기는. 가식적이다, 얘.”

술 몇 잔 마시고 기분 좋은 장 어멈은 위아래로 옥묵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실실 웃었다.

옥묵은 화도 나고 다급하기도 하고,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아주머니! 우리 대낭자는 세자야랑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어머, 어머. 너 정말로 충성스럽구나. 그런 사이가 아니야? 그런 사이가 아닌데 왜 살금살금 세자야를 만나러 온 거야?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어머, 어머. 말하는 것 좀 보게. 그럼 너희 대낭자, 아직도 황화규녀(黃花閨女: 성 경험이 없는 여인)이니? 그런 사이가 아니기는. 아닌데 우리 세자야를 몰래 만나서 할 말이 뭐가 있대? 우리 세자야는 혼인하고 대내내를 아내로 맞으신 분이야!”

장 어멈은 술기운에 트림을 시원스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요 계집애. 세자야를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내 말 잘 들어. 이 저택에……. 흥!”

장 어멈은 말을 다 하지 않고 손을 휘두르며 자리를 떴다. 한바탕 쉰 소리만 듣고 알아내려던 건 하나도 못 알아낸 옥묵은 화가 나서 구석에서 눈물을 훔쳤다.

이제 다른 사람을 붙들고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저택 대문 앞으로 돌아가서 지키고 서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도 세자를 만나지 못하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을 순조롭게 처리한 강환장은 평소보다 일찍 저택으로 돌아왔다. 대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자마자 옥묵이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옥묵은 소곤소곤, 오늘 있었던 일을 단숨에 모두 이야기했다. 청서와 추미가 고가에 간 일, 고사현이 납폐로 만 냥을 요구한 일을 들은 강환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대낭자에게 전해라.”

그러고는 독산을 불렀다.

“옥묵을 데려다주고 오너라. 다음에 무슨 일이 있으면 어멈을 보내 전하면 된다. 넌 대낭자 곁에서 시중이나 들어라. 혼자 밖에 돌아다니는 걸 누가 보면 대낭자의 체면이 떨어진다.”

강환장의 훈계에 옥묵은 얼굴이 하얘져서 무릎을 구부리며 ‘예’ 하고 대답했다. 고가에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대낭자에게도 심부름 보낼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해명은 전혀 하지 못했다.

계단으로 오른 강환장의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청서와 추미를 고가로 보내다니. 그 여인의 생각이지?

고씨가 첩으로 저택에 들어온다지만, 고가는 어찌 됐든 강가의 제대로 된 친척이고 서생 가문인 것을! 아무리 제가 안주인이란 신분이 있대도, 아무리 제가 몸이 아파서 가고 싶지 않더라도, 오 어멈을 보냈어야지!

문간으로 들어섰더니, 할 말이 있는데 못하는 듯이 우물쭈물하는 문지기들의 모습에 강환장은 순간 또 분노가 치밀었다.

수녕왕부의 문간방엔 언제나 깔끔하게 차려입고 따스한 미소를 밝게 짓는 문지기가 서 있었다. 편안한 활기와 즐거운 기운이 가득했고, 찾아오는 사람이 왕손이든 거지든 모두 똑같이 공손하게 대했다.

이렇게 기가 죽어 우물쭈물하다니. 이런 것들을 누가 문지기로 보겠나. 장삿거리를 찾는 좀도둑이지!

강환장의 분노한 표정을 본 문지기들은 앞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 채 강환장의 신발만 내려다봤다. 강환장이 중문 안으로 돌아 들어가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활기를 띠었다.

강환장이 중문 안으로 들어서자 시녀 하나가 치맛자락을 들고 달려왔다.

“세자야, 세자야!”

“왜 뛰는 것이냐? 소리는 왜 질러!”

강환장은 갑자기 폭발했다. 대문 앞 말에서 내릴 때부터 이미 스멀스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었다.

마구 뛰어오던 옥묵, 이씨의 악랄한 계략, 고사현이 요구한 만 냥, 기죽어 눈치 보던 문지기, 시끄럽게 고함치며 달려오는 시녀까지. 치밀어 오른 그 화가 지금 폭발했다.

시녀가 식겁해서 털썩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꺼져라!”

강환장은 고함치고는 시녀를 지나쳐 성큼성큼 청휘원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물어봐야겠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청휘원 정원 문을 지난 강환장은 뜰 안으로 곧장 뛰어 들어가 수화문을 지나 상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방 바깥채, 만 어멈 등 나이 든 어멈이 조 의원, 손 의원과 함께 진단을 상의하고 있는데 강환장이 노기 탱천해서 달려 들어왔고, 조 의원과 손 의원은 기겁해서 연신 뒷걸음질 쳤다.

“이건 또 무슨 짓이냐?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야! 우리 강가가 망해서 무너져야 속이 시원하다더냐?”

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새하얀 노의원 둘까지 있는 걸 본 강환장은 더 화를 냈다.

“세자야, 오늘 오후에 사람들이 대내내의 혼수 곳간을 뒤졌습니다.”

만 어멈이 붉어진 눈시울로 앞으로 나서서 설명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환장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잘랐다.

“곳간을 뒤져? 내가 저택에 없는데, 누가 감히 너희 대내내의 곳간을 뒤진단 말이냐……!”

강환장은 한창 말을 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너무 화가 나서 지금이 예전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지…….

“감히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해?”

강환장은 매우 빠르게 반응하면서 티 나지 않게 주춤하고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혼수? 우리 가문이 언제 너희 대내내의 고작 그 혼수를 안중에 뒀다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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