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함정 一
청서는 이야기할수록 속이 터졌다. 세자야가 고 낭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녀가 제일 잘 안다. 잘 알아서 고 낭자가 미운 것이다. 염치없는 것, 세자야가 좋아할 만한 곳이 어디 하나라도 있어야지!
추미가 청서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언니, 나 무서워졌어요. 나 같은 바보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 아이고, 정말 무섭다. 언니, 앞으로 날 잘 지켜줘야 해. 난 언니만 믿을게요. 내 목숨은 이제 언니한테 달렸어.”
“얘 좀 봐.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거 있니?”
청서는 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추미가 의지하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세자야가 고 낭자에게 정이 깊어서, 자신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추미, 어쩌면 춘연까지 끌어들일 수 있으면, 이 두 사람을 방패로 쓰면 두려울 게 없었다.
“우리가 한마음이기만 하면, 괴롭힘당하진 않을 거야.”
청서가 뼈있는 말로 손을 내밀자, 추미가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아챘다.
“몰라, 나는 이제 언니만 믿을래요. 언니, 저런 사람을 정말로 집에 들이면, 화근을 집에 들인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아니면 우리가…… 못 데리고 오게 막을까?”
추미가 눈을 깜빡이자, 청서가 톡 때렸다.
“세자야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들이는 건 들여야지. 다만…… 이따 우리 상황 보고 움직여야 해.”
“알았어요. 언니 말대로 할게요. 난 언니가 하라는 대로 할게!”
추미는 얼굴 가득 충성스러운 표정이었다.
추미는 청서를 따라 고씨 가문의 중문 안으로 들어가서 마차에서 내렸다. 문지기 어멈이 우선 두 사람을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보고, 물어야 할 것, 묻지 말아야 할 것, 별별 걸 다 물은 다음에 두 사람을 데리고 월동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어멈은 걸어가면서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두 사람을 살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청서와 추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발끝에서 머리까지 보고 또 봤다.
휴. 우리 집안에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어린 여인이 온 게 언제더라. 아마 십여 년, 몇십 년 만에 처음이겠지.
진 태태의 정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마주 오던 고 대공자 고사현(顧思賢)이 두 사람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두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 댁 낭자들인가?”
고사현은 재빨리 두 사람을 훑어보고는 두 눈을 추미에게 딱 붙였다. 누구에게 묻는 말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룁니다, 고 대야. 수녕백부 세자가 새로 들인 두 이낭이에요. 이분이 조 이낭, 이분이 전 이낭입니다.”
어멈이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 저택에서 통 큰 사람은 단 두 사람, 바로 고 대야와 고 노야였다. 두 사람만 가끔이나마 돈을 주곤 했다.
“강가 외사촌?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벌써 이렇게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여인을 첩으로 들인 거야?”
고사현의 시선이 사람, 의복, 장신구를 훑었다. 볼수록 질투가 났다.
강환장! 이씨 가문 은자가 생기더니 이렇게 거들먹거려도 돼? 미첩을 한 번에 둘이나 들여?
“여기 이낭 두 분은 대내내의 지시로 오셨어요. 이 댁 대야가 우리 대낭자를 첩으로 들이는 일을 태태와 상의하려고요.”
어멈은 어쩐지 고소해하는 듯 들뜬 목소리였다.
우리 낭자가 남의 첩으로 가는구나!
“응? 흠!”
고사현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이 방택이 거의 강부에서 지내다시피 할 때부터 분명 뭐가 있다고 생각했었고, 예상한 일이었다.
고사현은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강가가 큰 돈을 벌더니 방택을 첩으로 들이려 한다? 흥! 이런 큰일이 벌어졌는데 나갈 순 없지. 지켜봐야겠어.
강가는 궁핍해도 궁핍한 나름대로 위세가 있었지만, 고가의 궁핍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
청서 역시 고가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상방 앞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을 데리고 온 어멈이 기별도 없이 바로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는 걸 보고 벌써 식겁했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실내에 이도 저도 아닌 네모난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 겹겹이 쌓인 더러운 그릇과 접시에서 말로 못 할 악취가 났다. 남쪽 창 아래 화항엔 무엇인지 모를 물건이 곳곳에 잔뜩 쌓여 있었다.
창가 쪽 물건이 놓이지 않은 구석에 진 태태가 산발을 한 채 예닐곱으로 보이는 사내애를 안고서 단갱(蛋羹: 계란찜)을 먹이고 있었다. 그나마 사내애는 깔끔했다. 진 태태 곁에 있는 유칠이 얼룩덜룩한 탁자 위엔 기울어진 찻사발 하나, 김이 모락모락 하는 찻사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추미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얼이 빠졌다. 이게 서생 가문 대갓집이야?
청서 역시 얼이 빠져서 예를 갖추는 것도 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진 태태는 품에 안은 사내애에게 단갱을 먹이는 데 정신 팔렸고, 두 사람을 데리고 온 어멈은 화항 가득한 물건을 몇 번 밀다가 움직이지 않자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높낮이가 다른 등받이 없는 의자 두 개를 끌고 나왔다.
“두 분 이낭 보기에 부끄럽네요. 여긴 이낭의 저택과 참 다르지요?”
“어머니, 환장의 처가 인사한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고사현이 어멈이 끌고 온 높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 태태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당황한 얼굴로 청서와 추미를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바쁜 거 안 보이느냐? 네 아우가 아직 배불리 먹지 못했다.”
“어머니, 중요한 일로 온 사람들입니다. 취희야!”
고사현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자, 청서와 추미는 깜짝 놀라 부르르 떨었다. 아주 건장해 보이는 시녀 하나가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
“태태는 해야 할 일이 있으시니, 단갱은 네가 먹여라.”
고사현의 분부에 취희라는 시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진 태태에게 다가가 품에 안은 사내애를 옆구리에 끼고 진 태태 손에 들린 단갱을 휙 잡아챘다.
청서와 추미는 다시 얼이 빠져버렸다.
“이제 한가해지셨으니 이야기하게.”
고사현은 다리를 턱 꼬더니 쥘부채를 촤르륵 펴고 흔들면서 청서와 추미에게 눈짓했다. 추미가 청서를 바라보자, 청서가 살짝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이런 집안과 진 태태 상대로는 그 정도만 해도 예의는 충분했다.
“태태, 우리 세자야의 첩으로 대낭자를 들이는 일로 우리 대내내가 저와 추미 동생을 보내셨어요. 대내내 말씀이, 대낭자와 우리 세자야께서 서로 마음이 통했으니, 대낭자가 강가로 오게 되면 세자야와 대내내가 대낭자를 힘들지 않게 잘 대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청서는 인사치레를 늘어놓을 생각도 없어서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밝혔다.
진 태태는 얼떨떨한 듯 눈을 한참 깜빡이다가 고사현을 돌아봤다.
“환장은 이미 혼인하지 않았니? 상인 가문 여식을 들였다고 하지 않았어?”
“어머니, 큰누이를 첩으로 들이겠다는 겁니다.”
고사현이 남 일 이야기하듯이 말하는 바람에 추미는 그 말 뒤에 ‘으하하’ 하는 통쾌한 조롱이 붙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첩? 네 누이, 우리 고가가 어떻게, 남의 첩으로 간단 말이냐? 네 아버지는? 가서 아버지를 모셔 오너라. 이 일은…….”
진 태태가 당황해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누이들은 혼수 마련해갈 돈 한 푼도 없는데 아버지는 앞으로 잘될 형편도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큰누이도 생긴 게 반반할 뿐이라서 환장의 첩이 될 수 있는 것만 해도 덕을 쌓은 겁니다.”
고사현은 무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청서와 추미를 바라봤다.
“다만, 우리 고가와 너희 세자야는 어찌 됐든 친척 아니냐. 큰누이를 첩으로 들이고 싶다고 해서 ‘그러십시오.’ 할 수는 없지. 마땅히 할 건 해야지. 강환장이 이씨 가문의 주인 없는 재물을 얻었으니 돈을 좀 써야 하지 않겠나?”
“고 대야, 명확히 말씀하세요.”
청서가 흔쾌히 대답했다.
끽소리도 없이 보내주면 재미없지. 난리를 부려야 좋지. 크게 부리고 꼴사나울수록 더 좋아. 그래야 세자야도 고가 이 집구석이 어떤 물건들인지 똑똑히 보시지.
“많지도 않아. 강환장에게 전하게. 현은 만 냥이면 큰누이는 그의 것이라고.”
고사현은 청서보다 더 시원시원했다.
청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알을 굴리다가 웃음 지었다.
“그게 도리지요. 첩을 들이면서 공짜로 들이는 집안은 없지요. 우리 대내내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대낭자는 서생 가문 출신이니 저희 같은 천첩들과 달라서 절대로 소홀하면 안 된다고요. 우리 대내내는 대범한 분이세요. 대낭자 같은 분은 당연하고, 저와 추미, 그리고 춘연 동생에게도 많은 돈을 주셨거든요. 저택 위아래가 다 같이 종일 떠들썩하게 즐길 수 있게 해주셨고요. 우리 같은 사람은 대낭자와 비교할 수가 없지요. 대낭자가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제대로 은자를 들여서 떠들썩하게 축하해야지요.”
추미도 곁에서 거들었다.
“청서 언니 말이 맞아요. 우리 세자야께서 이 댁 대낭자를 매우 은애합니다. 무지무지 은애하셔서, 얼른 대낭자를 집으로 들이라고 대내내에게 말씀하신걸요. 또 행여 대내내가 대낭자를 힘들게 할까 봐 신신당부도 하셨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낭자를 조금이라도 서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요. 대낭자가 무얼 바라든, 무슨 말을 하든, 돈이 얼마나 들든,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고 대야도 아시다시피, 우리 대내내는 다른 건 없어도 돈은 좀 있거든요. 청서 언니, 안 그래요?”
“누가 아니래. 태태, 고 대야, 마음 푹 놓으세요. 대낭자에게 해될 일만 아니라면,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세요, 대낭자는 우리 세자야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이니, 말씀만 하시면 우리 대내내, 그리고 우리 세자야가 다 들어주실 겁니다.”
청서의 말에 고사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씨 가문에 은자가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말은 진작 들었다. 그 집엔 사내가 하나도 없어서 그야말로 주인 없는 재물이라는 것도. 지금 기회가 생겼는데 강환장 손에 들어간 재물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면…… 하늘이 내려준 걸 거부한다고 천벌 받을 것이 아닌가!
“그래도 대내내가 법도를 아는군. ‘창름실, 지예절(倉廩實 知禮節: 창고에 먹을 것이 가득해야 백성들이 예절을 안다. - <관자管子>)’, 재산이 풍족해야 비로소 예절을 안다더니, 옛말 그른 것 없군.”
고사현은 대충 대답하면서 속으로 쉴 새 없이 따져 보았다.
강환장이 큰 재물을 얻었다는데, 혼자 재미 보게 할 순 없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돼!
“돌아가서 대내내…… 아, 아니, 세자야에게 말하게. 만 냥은 첫 납폐라고. 일단 그것부터 보내게. 첩으로 들인다고는 하나, 우리 고가는 대대로 글공부해온 서생 집안이고 경성에서는 그래도 손꼽히는 대갓집일세. 우리 고씨 적장녀가 들어가는 것인데, 설령 첩이라고 하나 삼매육빙(三媒六聘)의 예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해야 하네. 이런 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얼른 만 냥부터 보내라고 세자야에게 전하게. 나머지 챙겨야 할 예법, 받아야 할 은자는 나중에 내가 세자야와 상의하겠네. 나중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마음 놓으세요!”
청서는 흔쾌히 대답했다. 여섯 번도 적지. 서른 번, 오십 번, 십 년, 이십 년 동안 질질 끌다가 물거품이 되면 제일 좋고!
청서와 추미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나가서 마차에 올랐다. 추미는 아직도 두려운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니, 이 집, 어쩜, 어쩜…… 이래요? 언니, 난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서생 집안이라더니, 어쩌면 이렇게 더러워요? 엉망이에요? 난 정말 식겁했어요. 언니,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몰락했으니 고 낭자가 사흘돌이로 우리 저택으로 달려와서 눌어붙었지. 세자야가 혼인까지 했는데도 몸 던져 파고들며 안겼잖아. 인제 너도 봤으니 그 고씨가 어떤 물건인지 알겠지?”
청서는 고가가 초라한 꼴인 것이 매우 통쾌했다. 무슨 낯짝으로 서생 집안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 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