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일을 키우다 三
추미가 손수건을 비틀며 말을 이었다.
“별것도 아니에요. 그래 알았어요, 어차피 언니는 남이 아니니까. 나 언니를 처음 봤을 때, 언니가 내 친언니 같았어. 사실 진짜 별것도 아니에요. 그냥…….”
추미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고 겸연쩍은 듯 몸을 배배 꼬면서 키득키득 웃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 얘기 들으면 언니는 분명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라고 생각할 거야. 언니, 웃으면 안 돼요.”
“얼른 말해. 내가 왜 웃어. 나도 세상 물정 모르긴 마찬가지야. 얼른 말해.”
청서는 추미의 목구멍에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나 세자야를 모셨잖아……. 그리고 춘연도……. 다 몇 번 모셨어요. 이건 언니도 아는 거고. 그런데 대내내가 한 번도 탕약을 보내지 않으셨어.”
“뭐라고?”
청서는 너무 놀라서 소리내서 물은 다음에 정신을 차렸다.
“잊으신 거겠지.”
추미는 청서를 힐끔 바라봤다. 무시하며 반박하고 싶은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얼른 말을 바꿨다.
“그땐…… 그땐 나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래서 한 번 떠보려고 핑계를 찾아 수련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내가 떠보자마자, 세상에, 곧바로 대내내의 뜻이라고 대놓고 말하더라고요. 세자야는 2대 독자고,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이 저택에 딱 하나 부족한 게 자식이라고. 문왕(文王: 성군으로 이름난 주나라 문왕)은 자식이 백, 손자가 천이었다는데, 그거랑 비교할 순 없어도 어쨌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아들은 못 해도 열은 있어야 한다고.”
“대내내가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청서는 아예 믿기지 않았다.
“모르죠, 하지만 수련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추미는 손수건을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대내내가 어릴 때부터 형제자매 많은 집을 부러워했대요. 여덟 살이 되어서도 태태를 붙들고 오라버니, 언니, 아우를 만들어 달라고 떼썼다네요.”
“어디서 만들어. 그 집에 사내도 없는데.”
어느새 믿기 시작한 청서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요. 수련이 또 그러는데, 이건 뭐 수련이 말하지 않아도 다 잘 아는 이치이긴 한데, 대내내는 정방 정실이니까, 자식을 누가 낳아도 따지고 보면 대내내의 자식이잖아요. 어머니 소리를 듣는 건 대내내뿐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리 잘나도 노비잖아요.
언니, 솔직히 말할게요. 난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지 못했어. 언니도 알다시피 내가 가난한 집 출신이라, 대갓집의 법도 같은 건 몰라. 나중에 춘연이 그러더라고요. ‘야 이, 바보야. 넌 크게 될 인물이 아닐 줄 알았다!’”
추미는 춘연을 흉내 내며 자연스럽게 청서 얼굴을 향해 손수건을 휘둘렀다.
“‘넌 네가 자식을 낳는다고 그게 네 아이인 줄 알았니? 꿈 깨! 너는 네가 어미라고 생각하겠지만, 남은 널 어멈이라고 생각할 뿐이야. 유모는 젖 주는 어멈이고, 너는 아이를 낳는 어멈이고!’ 언니, 얘 말하는 것 좀 봐요. 화가 나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추미는 또 자연스럽게 청서 얼굴에 손수건을 휘둘렀다.
“춘연이 생각을 잘했네.”
청서는 너무 집중해서 듣느라, 벌써 두 번이나 손수건에 맞은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까요! 고 계집애, 똑똑하다니까! 그 애가 그렇게 이야기하길래 돌아가서 밤새 곰곰이 생각하고는 그 말이 맞다는 걸 나도 깨달았어요. 대내내 같은 분은, 평소에 손 아프다고 글씨도 잘 안 쓰잖아요. 어쩌면 정말로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이 낳을 때 저승문에 발을 걸쳐 놓는다고 하잖아요. 구사일생! 우리 어머니도 나를 낳고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추미는 또 한 번 청서의 얼굴을 향해 손수건을 휘둘렀다.
“하지만 난 날 어머니라고 부르든 말든, 많이 낳을래요. 아이 낳는 어멈? 그 어멈 하지 뭐. 언니, 생각해 봐요. 우리 같은 사람은 젊고 예쁠 때는, 세자야가 그래도 한 달에 몇 번은 들르고 하루 이틀 정도는 주무시고 갈 수도 있지. 그런데 나중에…… 아니, 늙을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겠네. 지금 벌써 봐! 우리가 모시러 가는 그분, 얼마나 싱그럽고 예뻐? 파릇파릇한 처자라고! 그런 사람이 들어와 봐요. 세자야가 우리 같은 사람들을 기억이나 하실까? 어쨌든, 내 생각엔, 세자야는 믿을 수 없어요. 앞으로 살아가려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해요. 우리 이모가 전에 자주 이런 말을 했어요. 아이가 자라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이 아주 빨리 간대요!”
추미는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청서를 바라보며 본론에 돌입했다.
“언니, 비웃어도 돼. 어차피 내가 식견이 좁다는 거, 언니도 알잖아. 몰라, 난 그냥 내 팔자가 좋은 거 같아요. 되게 되게 좋은 거 같아! 대내내 같은 주인을 만났잖아. 언니, 진지하게 생각해 봐,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누굴 보고 살아야겠어? 세자야?”
추미는 무시하는 듯이 비웃더니 이번엔 손수건으로 청서의 손등을 때렸다.
“거긴 기댈 곳이 아니에요. 우리 주제에 기댈 수도 없고. 우리는 말이야, 우리의 팔자에 기대야 해요. 대내내 같은 주인을 만난 팔자. 언니, 봐 봐. 우리를 잘 먹여주고, 잘 입혀주고, 이것 좀 봐, 우리가 입은 거, 이 팔찌, 이 금보(禁步: 걸음걸이를 조심하라는 의미로 여인의 치마나 신에 거는 장신구)! 그리고 은자도. 필요한 대로 주신다잖아. 돈도 마음대로 쓰게 해주고, 우리가 아이를 낳기를 기대하고 있다잖아요. 많이 낳을수록 좋다잖아. 평소에도 우리를 속박하거나 학대하지도 않으시고. 하아, 언니, 날 비웃지 마. 나 정말 전생에 덕을 너무 잘 쌓아서 이렇게 팔자가 좋은 거 같아!”
“대내내는 지금 병이 났으니까 그렇지. 나중엔 또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아…….”
청서는 이미 추미에게 설득당한 상태였다.
“정말로 각박하게 굴 거면, 오히려 지금이 더 좋죠. 병들어 누워계실 때 우리를 거처에 붙들어 두면 되잖아요. 수발 다 들고 대내내의 몸이 나았을 때, 우리는 폭삭 곯아 있을 테고.”
추미는 청서를 힐끔 바라봤고, 청서는 눈을 깜빡이다가 빙그레 웃었다.
“맞는 말이네! 네 말이 맞아.”
“대내내는 그런 분이시라니까.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못 찾아. 나 같은 사람은, 언니도 봤지만, 난 그냥 바보야. 생각이라는 걸 할 줄도 몰라. 춘연은 나보다 똑똑해요. 그런데 그 애도 성격이 착해요. 남이랑 뭘 다투는 법이 없어요. 우리 셋은, 언니가 우리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나랑 춘연은 지금이 너무나 좋아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요.
그런데 에휴, 그 고가 낭자, 성격이 어떤지 모르겠네. 언니 같으면 좋겠다. 고가는 대대로 서생 집안이고 매우 청아하고 고귀하대요. 그러니까 비슷하겠죠?”
추미는 손수건을 휘두르며 근심 가득하면서도 호기심 넘치는 표정이었다. 청서의 안색이 변했다.
고씨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고, 오 어멈조차 몇 번이나 말한 적 있는 여인이었다.
“있잖니.”
청서는 눈알을 굴리면서 추미에게 바짝 다가가 귓속말했다.
“고가는 말이야, 온 집안이 엉망이야. 청아하고 고귀한 서생는 무슨. 다 자화자찬하는 거일 뿐이야. 쳇!”
“정말요?”
추미가 눈썹을 더 치켜들려야 들 수 없이 높이 치켜올렸다.
세자야가 대내내와 정혼한 후로 청서는 고 낭자가 가장 눈에 거슬렸다.
“그렇다니까! 너도 들어보면 금세 깨달을 거야. 고 노야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잘하는 거라곤 단 하나, 계집질이야.”
청서의 입꼬리가 더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갔다.
“고가도 예전엔 매우 부귀했지. 가서 저택을 보면 알아. 우리 저택이랑 별로 멀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부귀하지 않았다면 그런 곳에 저택을 샀겠어? 저택이 얼마나 큰데. 그런데 고 노야는 기녀에게 돈을 다 털어 넣었어. 화루야말로 고 노야의 집이지! 청아하고 속되지 않은 분이라고 기녀들이 알랑거리니까 정말로 그런 줄 안다니까? 류삼변(柳三變)은 전 황조의 꽃 승상이고 자기는 이번 황조의 꽃 승상이라고 한대. 퉤! 낯가죽도 두껍지!”
(※류삼변: 송나라 방랑시인. 그의 시는 평이하고 통속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감수성이 있었다. 송 인종의 총애를 받아 인종을 찬양하는 많은 시를 받친 시인)
동그랗게 뜬 추미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수시로 ‘어머’ 소리를 내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사창가를 돌아다닌대. 더럽고 구리지도 않은가.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을, 고 낭자는 뭐라는 줄 알아? 성정이 올바르고 청아하고 풍류스럽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다나. 잘 들어, 앞으로 고씨를 조심해야 해. 오줌도 보들보들한 백련이라고 할 사람이라니까!”
“풉!”
추미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 낭자한테 오라비가 하나 있어. 제 아비랑 같은 판으로 찍어서 나온 것 같은 인간이지. 정말이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딱 맞아. 지금은 아비랑 같이 허구한 날 쌍으로 사창가를 돌아다닌대. 온 경성에 이 부자처럼 노는 건 고가뿐이야!”
“정말 창피하긴 하네.”
추미가 배시시 웃으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었다.
“고 공자가 올해 스물셋이나 됐는데, 아직 혼인하지 않았어. 눈먼 집안이 어디 있겠어. 눈이 멀었대도 불구덩이에 딸을 밀어 넣진 않겠지.”
“그렇죠, 그렇겠네요. 고 낭자한테 여동생이 아주 많다던데요?”
추미가 즐거운 듯 손수건을 흔들며 묻자, 청서가 다시 혀를 찼다.
“응! 잔뜩 있지! 아주 잔뜩!
그 집 태태, 정말 줄줄이 잘도 낳아. 감탄할 지경이야. 우리 어머니 말을 빌려보자면, 궁딩이 한 번 흔들면 뿅, 또 한 번 흔들면 뿅 하고 낳는대. 고 낭자가 올해 열아홉이거든, 바로 밑에 여동생이 열여덟. 이것 봐, 1년에 하나. 암퇘지냐고!”
추미가 눈이 휘어라 웃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걸 보면 터놓고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었으니 됐다. 너무 잘 되었다.
“셋째는 올해 열여섯. 넷째는 열다섯, 다섯째는 열셋, 여섯째는 열하나. 일곱째는 아홉. 그리고 아우도 한 명 있어. 올해 일곱. 이것 봐, 정말 잘 낳지? 내가 듣기로는 나중에도…….”
청서는 비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차 안인데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추미 곁으로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들어 봐. 듣기로는, 나중에 둘을 더 낳았대. 다 딸. 낳자마자 오물통에 넣고 익사시켰대. 알지? 아기 살해! 여인의 덕을 상하는 일이라고!”
“힉!”
넋이 나간 추미는 너무 놀라서 갑자기 딸꾹질했다.
청서는 놀라서 멍청한 표정을 짓는 추미를 흡족한 듯 바라보면서 자기랑 똑같은 추미의 적금 금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있잖아. 이따 고가에 가면, 이런 거, 잘 챙겨야 해. 고가는 말이야, 거지, 도둑 소굴이야. 온 저택 위아래, 하나같이 염치없어. 이낭자, 삼낭자, 사낭자, 그리고 오낭자, 눈에 보이는 건 다 훔쳐 가는 도둑이야! 예전에 우리 저택에 왔다가 돌아갈 때마다 오 어멈이 몸을 뒤지면 반드시 뭐 하나는 나왔다니까?”
“힉!”
추미는 더 얼떨떨해졌다. 정말이지 식견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고 낭자만 우리 저택에 들락거리게 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은 고가 노야까지 싹, 아무도 못 들어와. 생각해 봐, 집안이 이런데, 고 낭자라고 얼마나 멀쩡하겠어. 하필 세자야가 홀딱 속아서. 청아하고 분별 있다고 칭찬까지 하신다니까? 정말로 청아한 사람이, 한밤중에 사내 품에 안기겠어? 청아하지 않은 나도 그런 짓은 못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