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일을 키우다 一
“우리 노야도 그렇게까지 함부로 은자를 뿌리지 못하셔! 벌 받을까 두렵지도 않은가.”
이렇게까지 은자를 낭비하는 법도 있다는 이야기에 봉운은 순간 마음이 답답하고 서글퍼졌다.
“그러니까. 다들 이가가 부자라고 하는데, 정말 돈이 많은가 봐. 언니, 왕 어멈한테 가는 거야?”
화제가 또 돈으로 돌아오자, 청서가 냉큼 말을 돌렸다.
“아니.”
봉운은 주저하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청서를 곁으로 끌어당겨 귓속말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 그냥 듣기만 해. 조금 전에, 세자야랑 부인이…… 난리가 났었어. 며칠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고 낭자를 집으로 들여달라지 뭐니. 세자야랑 고 낭자 그 일, 너도 알잖아. 부인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어. 좋은 아이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염치없는 짓을 하냐고 하시면서. 그리고 이렇게 염치없고 수치를 모르는 사람은 세자야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집에 들이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
청서의 눈빛이 빛났다.
역시 부인은 너무 영명하셔!
“하지만 세자야는 고 낭자를 들이기로 작정하셨나 봐. 며칠 내로 들이라고 부인을 윽박지르시더라고. 게다가…….”
봉운은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대내내의 병이 깊다고, 대내내 대신 안살림을 맡기려고 고 이낭을 들이는 거래. 청서, 넌 매일 세자야 곁에 있잖니. 요즘 세자야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어디가?”
청서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도 그런 느낌이 들긴 했다. 하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 훨씬 더 잘해주시는걸!
봉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꼭 집어 말할 순 없어. 하지만 전에는 부인 말씀을 이렇게 거역한 적 없는걸. 대놓고 대든 적은 더더욱 없고. 네가 못 봐서 그래. 세자야의 안색, 그 눈빛……. 어휴. 전에는 설령 동의하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해도 완곡하게 말씀하셨거든. 나긋나긋 설득하셨어. 이렇게 사납게 군 건 처음이야.”
“혼인하고 아내를 맞으셨으니, 당연히 예전과는 다르겠지.”
청서는 봉운의 말에 맞장구치고 싶지 않았다. 세자야가 달라진 건 맞지만, 달라진 그가 너무 좋았다.
“그건 그래. 아내가 생기면 어머니는 뒷전이지. 부인 말씀이 맞아. 상인 가문 출신은 이렇다니까. 무시할 만하잖아!”
봉운은 진 부인 대신 분노했고, 청서는 분위기에 맞추며 샐샐 웃었다.
“그럼 지금 어디 가는 건데?”
“부인이 화병이 나셨어. 나더러 대내내한테 이야기 전하고 오래. 본인이 일으킨 일이니까, 세자야 대신 가서 고 낭자를 들이라고.”
봉운은 대내내 이야기가 나오자 더 분노했다. 대내내가 집에 들어온 이래 두어 달 동안 일이 끊기지 않았다. 정말이지, 상문살(喪門煞)이이라도 들은 건지!
“부인도 참……. 세자야를 너무 아끼신다니까. 세자야가 혼인하긴 했지만, 나이가 있는데 이런 일을 겪어 봤어야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셨으면 부인이 막으셔야지. 나중에 가문에 먹칠할 일이 생기면 그땐 어쩌시려고. 그땐 늦잖아. 에휴. 언니도 부인을 좀 설득해 봐.”
청서는 유감스럽기 짝이 없었다. 진 부인이 마음을 모질게 먹지 못하는 것과 봉운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네가 몰라서 그래.”
봉운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듯이 말을 멈췄다.
“세자야가 정말로 옛날이랑 달라. 많이 달라. 뭐랄까……. 어휴, 정말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날 세자야가 힐끔 바라보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더라. 뭐라고 말할 엄두가 나는 줄 아니? 나는 물론이고, 오 어멈도 끽소리 못 했어.”
“어머, 말하는 것 좀 봐. 세자야 성격이 얼마나 좋으신데. 언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이상한 것 같잖아.”
청서는 친밀한 말투, 더 친밀한 미소를 지으며 봉운을 슬쩍 밀었다.
“너한테야 다정하시겠지.”
웃으며 청서를 놀리던 봉운은 곧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한 말, 혼자만 알고 있어. 오 어멈도 고 낭자가 속셈이 많다고 하더라. 세자야가 또 고 낭자한테 얼마나 잘해주니. 앞으로 너 꼭 조심해야 해. 괜히 팔려 가서도 남의 돈 세준다고, 홀딱 이용당하지 말고!”
“고마워 언니. 명심할게.”
청서는 반은 농인 듯 진담인 듯 웃으며 무릎을 구부려 감사 인사했다.
“마침 할 이야기 있었는데 잘됐네. 대내내가 큰 주방에 이야기해서 내일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주셨어. 나랑 추미, 춘연더러 식사 한 끼 대접하라고. 언니도 꼭 와야 해.”
“걱정하지 마, 꼭 갈게. 주연을 열어서 떠들썩하게 보내다니, 얼마나 체면 서는 일이니! 축하해!”
봉운은 다시 축하하고 청서와 인사한 다음 청휘원으로 향했다.
청휘원.
봉운을 배웅한 수련과 문죽 등 시녀들이 일제히 이동을 바라봤다.
“문죽, 네가 조 이낭에게 다녀오렴. 내일 아침 일찍 전 이낭을 데리고 나 대신 고가에 좀 다녀오라고 해. 고가랑 상의해서 고씨를 들일 날 잡아. 빠를수록 좋아. 세자야가 급해 하니까, 고가에서 무슨 요구를 하든지 일단 승낙하라고 조 이낭에게 당부해. 고가 일이라면 세자야가 모두 승낙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문죽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서야 청서의 성이 조씨, 추미가 전씨라는 걸 떠올렸다. 조 이낭과 전 이낭은 청서와 추미였다. 그리고 손춘연 손 이낭도 있고.
부인이 말을 꺼냈고, 낭자도 승낙했으니, 이낭이라고 부르는 게 맞긴 했다. 그런데 이렇게 정색하고 성까지 붙여서 이낭하고 부르니 한순간 누구를 말하는지 반응하지 못했다.
“청국이랑 녹매는 가서 두 이낭에게 옷이랑 장신구 골라주고. 힐수방에 가서 최신 고급 양식으로 세 벌 골라. 수련은 만 어멈에게 사람을 보내서 납첩(納妾) 예물을 가장 좋은 등급으로 두 벌씩 준비하라고 하고. 조 이낭과 전 이낭은 나 대신 나가는 거니까, 대요 처에게 마차랑 따라갈 사람 모두 내가 외출할 때랑 똑같이 준비하라고 하고.”
다들 얼떨떨하게 듣다가 녹매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고가는 아주 궁핍한 집안이라던데, 이렇게 하면……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이동은 놀라서는 녹매를 바라봤다.
대시녀 넷 중에, 녹매가 제일 데면데면했다.
녹매는 말수가 적어서 어떨 때는 종일 한마디 하는 걸 듣기 힘들기도 했다. 생김새도 제일 평범하고,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아서 갖가지 간식을 잘 만든다는 것 말고 다른 장점이 뭐가 있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지난 생엔, 문죽이 죽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강환장이 청국을 다른 이에게 보냈다. 청국이 떠나는 날, 녹매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확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원망이 가득한 듯한 눈빛으로.
며칠 뒤, 녹매는 저택에서 내보내달라고 청했다. 집에서 좋은 혼처를 찾았다고. 그녀는 녹매를 위해 혼수를 두둑이 준비해주었다. 녹매는 떠나는 날, 바닥에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자신은 계단에 서서 떠나는 녹매의 뒷모습을 바라봤었다. 그 순간, 너무나 외로웠다. 다들 떠났다. 그녀를 버리고. 그녀도 그들을 버렸고.
그 후로 몇 년 동안 그날 장면이 종종 꿈에 나왔다. 녹매의 냉정한 뒷모습이 꿈에 나올 때마다 놀라서 식은땀이 흠뻑 났다.
“무슨 예상하지 못한 일? 한 몫 뜯으려고 하는 거?”
문죽은 그렇게 말해놓고 민망한 듯 혀를 내두르며 말도 한 되는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련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모를 일이야. 고 낭자가 한 짓 좀 봐. 그 집 가풍도 그렇게 훌륭하진 않을 거야. 대내내. 만일…….”
“무슨 일이 생기든 나쁘지 않아.”
이동이 녹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청국, 넌 옷 고르러 가고. 청서가 탕을 잘 고더라. 녹매 네가 문죽이랑 같이 가서 어떻게 고는지 물어보고 오렴.”
“예.”
녹매는 이동의 눈을 바라봤다. 이동이 그녀를 향해 눈을 몇 번 깜빡여 주자, 녹매의 눈빛이 빛나더니 조금 들뜬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각자 일 보러 나가자, 이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수련에게 분부했다.
“몰래 추미를 불러와. 몇 가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수련은 직접 나갔다가 추미가 들어오자 시녀를 모두 물리고 문 앞을 지켰다.
해가 막 질 무렵, 만 어멈이 배방 시녀 여남은 명을 데리고 건장한 심부름꾼 여남은 명을 불렀다. 사내들은 제각각 외발수레를 끌고 측문으로 들어와서 이동의 혼수를 둔 곳간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잘 밀리지 않을 정도로 꽉꽉 실은 수레를 다시 밀고 측문으로 향했다.
오 어멈의 사촌 여동생이 측문을 지키고 있었다. 오 어멈 덕에 강부에서 방귀 좀 뀌는 오씨는 앞으로 나와 가로막으며 수레를 덮은 천을 걷으려 했다.
만 어멈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서 오씨의 손을 탁 쳐냈다.
“대내내의 물건일세. 멋대로 봐도 되는 물건이 아니야.”
“그쪽이 대내내의 물건이라고 하면 대내내의 물건이 되나?”
만 어멈에게 손등을 맞고 체면이 땅에 떨어진 오씨가 순간 눈을 치켜떴다.
“그야 물론이지.”
만 어멈이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모두를 향해 눈짓했다.
“멍하니 뭐 하는 게야? 서두르게! 은호(銀號: 규모가 큰 전장)에서 기다리고 있어.”
만 어멈이 오씨를 저쪽으로 밀쳤다.
수레 열 몇 대가 줄줄이 측문으로 나가자, 오씨가 잠시 얼떨떨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녀는 욕을 내뱉으며 다른 두 어멈을 손짓하며 분부했다.
“거기, 문 잘 지키고 있어. 부인에게 말씀드리고 와야겠어!”
오 어멈은 곧 사촌 여동생의 과장된 얘기를 전해들었다. 다 보는 앞에서 자신을 때린 건 부인의 얼굴을 때린 것이나 마찬가지네, 그 만씨 여편네가 부인을 안중에 두지 않는 행동이네, 난리가 났네, 어쩌고 하는 말은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대내내가 수레 열 몇 대 물건을 밖으로 옮겨갔다는 것에 온 신경이 팔릴 수밖에 없었다. 수레 열 몇 대라니!
“꽉꽉 실었다고?”
오 어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소처럼 건장한 사내들이 낑낑대면서 허리를 숙여 가며 겨우 옮기더라고요! 문턱을 넘을 땐 얼굴에 핏줄이 다 튀어나왔어요! 내가 똑똑히 봤어요! 수레 가득했다고요!”
무슨 일이든 오씨의 입을 거치면 훌쩍 심각해지곤 했다. 게다가 한마디 할 때마다 더 심해지기도 하고.
“언니, 그 만씨 여편네가, 우리 자매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이건…….”
“만 어멈이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대내내의 물건이라면서 보여주지를 않더라고요. 그래서 ‘네가 대내내의 물건이라고 하면 대내내의 물건이냐?’ 했죠.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그야 물론이지.’ 이러더라고요! 정말 속 터져서…….”
“다른 말은?”
어리석은 사촌 동생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오 어멈의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다른 건 없었어요. 말은 안 했는데, 태도가 문제지. 언니가 못 봐서 그래요. 봤으면, 그년이 얼마나 시건방을 떨었는지 알 거라니까! 우리 자매를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고요. 언니, 못 봐서 그래요. 나는 쳐다도 보지 않고, 아니 콧구멍도 이쪽으로 향하지 않고 수레만 재촉했어요. ‘서둘러라, 서둘러! 은호에서 기다린다!’ 이러면서요.”
오씨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턱을 높이 치켜들면서 만 어멈을 흉내냈다.
“은호에서 기다린다고? 똑똑히 들었지?”
오 어멈이 깜짝 놀라서 꽥 고함쳤다. 은호라니!
오씨는 얼떨떨해져서 한참 동안 입을 뻐끔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은호요. 언니, 내 말 들어봐요. 그 만씨 여편네가…….”
오 어멈이 매우 성가신 듯이 동생의 말을 잘랐다.
“됐다, 됐어. 다 알아들었다. 얼른 돌아가. 대내내의 물건이 다시 집안에서 나가면 곧장 와서 알리고! 그리고 무슨 수를 써도 막아야 해. 됐어, 됐어.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이만 돌아가.”
“알겠어요!”
오씨는 쪼르르 측문으로 돌아갔다. 문간으로 들어가서 자리 잡고 차를 마시다가 드디어 크게 깨달은 듯 허벅지를 내리쳤다.
대내내의 물건이 바로 대대내의 혼수였구나! 만씨가 대내내의 혼수를 훔친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