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6화 (16/463)

16화: 누구나 속셈은 있다

강환장의 얼굴에 성가신 표정이 떠올랐다. 이 저택에서 그는 벌써 십여 년 동안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노태야로 지냈었다. 조정에서도 차상(次相: 부승상)인 그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왔더니,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니. 특히 어머니 때문에 벌써 질릴 대로 질려서, 지금은 어머니에게 도저히 맞춰줄 수가 없었다.

“됐습니다!”

강환장이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치자, 팔자가 사납다고 울며 호소하던 진 부인이 깜짝 놀라 연신 끅끅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오 어멈이 다급하게 다가가서 진 부인의 등을 살며시 두드리며 진정시켜 주었다. 진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환장을 바라보며 손가락질하는데, 딸꾹질이 자꾸 나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 일이 이미 벌어졌는데 이런 말씀만 계속하면 무얼 합니까. 고씨는 어머니 생질녀입니다. 이렇게 질타하시면, 이모까지 질타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어머니도…….”

강환장이 말을 멈추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니도 별로 좋을 게 없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만났는데, 누이가 겁이 많아 놀란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나는…….”

드디어 숨을 고른 진 부인이 입을 떼자마자 강환장이 말꼬리를 잡아챘다.

“어머니도 나이 드셨습니다. 몸도 좋지 않으신데, 이런 작은 일을 뭐 하러 신경 쓰십니까. 너희들!”

강환장이 강완, 강녕과 오 어멈을 훑어봤다.

“다들 잘 들어라. 부인은 연로하고 몸도 좋지 않으시다. 앞으로 이런 사소한 일로 신경 쓰이게 하지 말아라! 다들 들었느냐? 다시 이런 일을 알리면, 장을 쳐서 숨을 끊어 놓을 테다!”

“네 이놈!”

진 부인이 화가 치밀어서 강환장을 향해 삿대질하며 헐떡거리다가 또 숨통이 막혔다.

“어머니, 어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고씨를 첩으로 들이자고 하셨지요? 아주 좋은 생각 같습니다. 며칠 내로 집으로 들이지요. 오 어멈, 부인은 이런 성가신 사소한 일을 제일 싫어하시네. 자네가 수고하게.”

오 어멈은 두려움에 가득한 눈빛으로 강환장을 바라보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강환장은 진 부인에게 장읍하며 물러가겠다고 인사했다.

“어머니, 푹 쉬십시오.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진 부인은 강환장이 밖으로 나간 다음 휘장의 흔들림이 멎고서야 겨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큰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사는 게 왜 이리 고된 것이냐. 멀쩡하던 옥가아가……. 아이고, 내 팔자야.”

진 부인은 탁자를 내리치며 팔자가 고되다고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강녕은 강환장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활력을 찾고 기운이 펄펄 넘쳤다.

“고 언니가 정말로 우리 집에 들어와서 큰 오라버니 첩이 되는 거야? 그럼 앞으로도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 거야, 아니야?”

강녕의 두 눈엔 호사가의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허튼소리 하지 마!”

강 대낭자 강완이 미간을 찌푸리며 강녕을 툭 때렸다.

고 언니가 갑자기 오라버니의 첩이 된다니,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 전에는 고 언니가 새언니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비록 첩이지만, 새언니나 마찬가지라서 이제 그렇게 된 셈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 거지?

“아이고, 내 팔자야.”

진 부인의 울음소리가 더 처량해졌다.

삼종사덕(三從四德)을 삶의 모범으로 삼는 진 부인에게는 첫째, 지아비는 절대로 틀리지 않고, 둘째, 아들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 지금 아들이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고함치는 것 역시 아들 잘못이 아니었다. 그냥 자기 팔자가 고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모셔서 진 부인의 성격을 훤히 꿰고 있는 오 어멈은 웃음을 띠며 위로했다.

“부인,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가아 나이엔 원래 다 이렇습니다. 부모와 의견이 틀어지고 할 때랍니다. 고 낭자는 청매죽마인 셈이잖아요. 고 낭자를 끼고 도는 것도 인지상정이죠.”

진 부인이 매섭게 오 어멈을 호통쳤다.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옥가아는 그런 무람없는 사람이 아닐세. 이건 분명…… 그 천한 것이 종용한 것이야! 난 착한 아이인 줄 알았건만. 이렇게 염치를 모르는 것일 줄이야. 속 터져 죽겠네!”

“부인 말씀이 맞습니다. 가아가 얼마나 훌륭한가요. 고 낭자 일도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처는 덕으로, 첩은 미색으로 들인다고 하잖아요. 일개 이낭일 뿐인데, 겉모습만 예쁘장하면 됐지, 덕이 무슨 소용입니까?”

오 어멈은 이런 일에 아주 노련하고 능숙하게 진 부인을 쥐락펴락했다. 진 부인이 별안간 훌쩍이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하지만 옥가아의 처가 일개 상인 가문 여식 아닌가. 아이고, 내 팔자야!”

진 부인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오 어멈은 울어대는 진 부인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사람 눈물은 한계가 있어서 많이 울면 눈물이 마른다고 그러던데, 부인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4, 50년은 울었으면서 어찌 아직도 눈물이 이렇게 많기만 할까. 부인에게 가장 내놓을 만한 것이 눈물뿐인 걸까?

“이렇게 염치도 모르는 물건이 옥가아 곁에 있으면 내가 어찌 마음을 놓겠나. 옥가아가 그 물건을 어찌 대하는지 좀 보게. 아이고, 내 팔자가 너무 사납구나!”

정신을 차린 오 어멈이 냉큼 다시 위로했다.

“부인, 진정하세요. 가아 곁에 여인이 어디 하나뿐입니까. 게다가 집안에 들어온 다음에 부인께서 차근차근 가르치면 되지요. 부인이 못 가르칠 사람이 있겠어요? 그저 마음을 조금 더 써야 할 뿐이에요.”

오 어멈은 속셈을 굴렸다.

세자가 고가 계집을 남달리 생각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중시할 줄은 몰랐네. 고것 때문에 부인에게 대들기까지 한 걸 보면, 고가 계집이 앞으로 세자를 독차지하겠지.

고가 계집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 계집 뒤엔 입을 바지도 없는 가난한 동생들이 줄줄이 있잖아. 돈 뿌리는 능력으로 치면 고가 노야가 이 댁 노야보다 더 뛰어나고, 고가 대야는 못된 짓, 무능함, 돈 잘 쓰기로는 그야말로 청출어람이고.

부인이 단단히 단속하셔야 해. 아니면 강부 전체를 고가로 옮겨갈지도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진 부인이 또 훌쩍대면서 숨을 고르고는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다른 건 둘째치고, 이렇게 염치없는 천한 것이 들어와서 몇 년 뒤에 아이를 낳으면 그땐 어쩌지? 그 어미에 그 자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옥가아를 보게, 나를 쏙 빼닮았잖은가. 닮지 않은 구석이 한 곳이라도 있는가? 이러다가…… 아이고, 내 팔자야!”

“부인, 참 멀리 생각하시는군요.”

오 어멈의 이 말이 아첨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별문제 아닙니다. 아이를 낳으면 부인이 데리고 와서 키우시면 되지요. 게다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세자야가 어떤 분인가요. 자식이 세자야를 조금만 닮아도 걱정할 것 하나 없습니다. 거기에 부인이 곁에 두고 키우시면, 아무런 문제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응, 그건 그렇지. 옥가아를 조금만 닮아도 되지. 휴, 고씨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만 해도 내 이 마음이…… 슬퍼서……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네!”

진 부인의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 이낭자는 턱을 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어머니와 오 어멈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여기까지 듣고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그럼 고 언니가 우리 집에 들어오면 대체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언니라고 불러야지, 아니면 뭐라고 불러!”

강 대낭자가 다시 동생을 철썩 내리쳤다.

이 잠깐 사이에 강 대낭자도 속셈이 생겼다. 이 집안에서 가장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큰 오라버니였다. 아버지, 어머니 다 소용없었다. 큰 오라버니가 고 언니를 대하는 걸 보면, 당연히 온갖 수단을 다해서 그녀와 잘 지내야 했다. 어차피 원래부터 고 언니가 참 좋기도 했고.

“아이고!”

오 어멈이 강 대낭자를 힐끔 바라보며 무슨 소리냐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낭자가 예를 아시네요. 사리가 밝아요. 비첩은 비첩입니다. 첩이란 노비지요. 노야나 부인을 모시는 노비라면, ‘효’를 위해서 언니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예를 아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세자야를 모시는 통방, 소첩을 이낭자가 언니라고 부른다? 그럼 이낭자는 또 뭐가 됩니까? 첩과 언니 동생 한다니, 앞으로 두 분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시려고요? 앞으로는 말입니다, 고 낭자는 청서와 언니 동생 해야 한답니다.”

“첩이라고 다 같은 줄 알아?”

강 대낭자는 오 어멈의 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보다 영리하다고 자부하는 그녀는 내택 36계, 온갖 수완을 모두 쥐락펴락했다. 그런 그녀가 오 어멈이 이렇게 대놓고 면박 주는 걸 어찌 견디라. 그 자리에서 바로 얼굴을 붉히며 난리를 부렸다.

“고 언니 같은 사람은 첩이 되더라도 귀첩이야! 나랑 아녕이랑 언니 동생 하면 왜 안 돼? 게다가 처첩은 원래 자매야. 아황(鵝黃), 여영(女英) 같은 사이라고!”

(※아황, 여영: 중국 고대 전설 속 요堯 황제의 두 딸. 요가 순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두 딸을 순에게 시집 보내서 아황은 황후가 되고 여영은 비가 된다.)

강 대낭자가 핏대를 세우며 오 어멈을 훈계했다.

“아이고!”

오 어멈이 눈을 삐딱하게 뜨고 대낭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한 번도 강녕을 안중에 둔 적이 없었다.

“대낭자, 말씀은 잘하시네요. 앞으로 대낭자가 혼인한 다음에 고야 거처에 있는 통방, 시첩하고 모두 아황, 여영 하며 언니, 동생 하실 건가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아직 혼인하지 않은 몸인데,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 법도도 없어?”

강 대낭자가 화가 나서 눈썹을 치켜뜨고 매섭게 호통쳤다.

내가 이동 같은 상인 여식과 같아? 내 남편 곁에 천첩……들이 고 언니랑 같냐고! 나이 많은 것만 믿고 날뛰는 고얀 노인네 같으니!

오 어멈은 상대하기도 싫어서 돌아서서 계속 진 부인을 위로했다.

“부인,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노비일 뿐입니다. 들어와서 착하게 지내면 다행이고, 행여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서 세자야의 마음이 식은 다음에 거간꾼을 불러서 팔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큰일도 아니에요.”

진 부인은 훌쩍훌쩍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노비일 뿐이잖은가. 개나 고양이 같은 것이지. 따져서 무얼 하겠나. 자네 고가에 한 번 다녀오게. 가아가 원한다니, 집으로 들이세.”

“부인, 세자야 거처에 있는 청서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세자야를 모셨고, 착실하고 분별 있습니다. 부인께서도 많이 칭찬하셨잖아요. 대내내가 이번 달부터 대내내의 월전에서 은자 두 냥, 동전 1천 전을 떼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대요. 부인, 차라리 부인께서 청서를 첩으로 올려 주면 어떨까요? 세자야 곁에 고 낭자 혼자 둘 순 없잖습니까. 또 하나는, 은혜는 위에서 베푸는 거라고 하잖아요. 괜히 인정 베풀 기회를 대내내에게 넘길 이유가 있겠어요?”

오 어멈은 진 부인을 부추겼다. 청서가 찾아와서 부탁한 건 아니었다. 이미 확실해진 일을 굳이 찾아올 이유도 없고.

하지만 베풀 수 있는 은혜는 베풀어야 했다. 나중에 청서가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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