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기선 잡기
이 시기의 강환장이 마차를 타는 습관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차를 타는 건, 그의 쉰 생일이 넘은 다음 일이었다.
“대내내?”
청국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또 두 눈이 멍하게 풀리셨어…….
“괜찮아. 계속 말하렴.”
이동이 청국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이자 청국도 웃어주었지만, 눈물이 뚝 떨어졌다.
“대교…… 대교가 하는 말이, 세자야가 출타하시고 곧바로 능운루 맞은편 경상 다관으로 가셨대요. 오시에 독산이 그를 불러서 들어갔더니, 맞은편 능운루에 가서 독채를 정하고 오라고 세자야가 분부하셨대요. 오늘 쓰실 거라고. 목향 나무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정하라고 하셨대요. 능운루 장궤가 그랬다는데, 진왕이 목향 나무 바로 맞은편에 있는 목향각을 정했대요. 오늘 사시쯤에 쓴다고요. 그래서 대교는 목향각 바로 옆에 있는 체당청으로 정했대요. 언제 쓸 거라고 세자야가 말씀하시지 않아서, 종일 쓰는 것으로 했더니 세자야가 흡족해하셨대요.
경상 다관에서 나와서는 대상국사(大相國寺)에 가셨대요. 사찰에 지객승(知客僧: 절의 손님을 접대하는 스님) 무지(無智) 스님과 차를 마신다고요.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나와서 장원루에 가셨대요. 문회(文會: 문인이 모여 담소 나누는 자리)에 가신다고요. 장원루에서 저녁을 드시고 나와서는 저택으로 곧바로 돌아오셨대요.”
이동은 열심히 이야기를 들었다. 능운루 맞은편, 독채…….
진왕을 다시 우연히 만나려는 건가. 전생에 진왕을 만난 것이 요 며칠 사이였었구나. 어쩐지, 아까 다급하게 가더라니.
대상국사 지객승 무지라…….
이 무지가 분명 20여 년 뒤 명성이 혁혁한 대상국사 주지, 무지 방장(方丈)이겠지. 황상도 허리를 숙이고 합장하며 대접하는 큰스님, 무지. 대상국사 지객승이었구나.
이번 생엔 더 높이 올라갈 야심을 품은 건가? 지난 생에 이미 지극히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으면서, 이번 생에도 이렇게까지 애를 쓰다니. 뭘 더 어쩌려고.
그가 뭘 어쩔 생각인지 몰라도, 한 가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해졌다.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돌아왔다. 혹은 함께 그 황량몽을 꾸었거나.
언제 돌아왔을까? 나보다 더 빨리? 아니면 나보다 더 뒤에?
진왕 뒤를 따라서 능운루에서 나온 강환장은 공손한 모습으로 진왕을 배웅했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길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서 개운한 표정으로 마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가자고 명령했다.
전생 기억이 또렷했다. 그날 능운루 밖을 걷다가 고개를 들고서 떠들썩한 능운루를 올려다봤다. 명성이 자자한 목향 담장의 장관을 감상하고 있는데 진왕이 나왔다. 진왕이 바라보길래 재빨리 공수하며 예를 갖추자, 진왕이 말을 걸어서 함께 몇 마디 나눴다.
다음에 다시 진왕을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눈 건 그로부터 두 달 뒤의 일이었다. 진왕 곁에 이미 묵신(墨宸) 그 어리석은 물건이 있었다.
묵가 일곱째, 묵칠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쓸모라곤 전혀 없는 이 어리석은 물건은 강환장보다 더 일찍 황상의 휘하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평생 황상의 신뢰를 받았다. 황상은 그를 평생 신뢰하고, 총애하고, 또 평생 방임했다.
‘고지식해서 그런다. 신경 쓰지 마라.’
‘천생 거칠고 올곧아서 그렇지, 악의는 없다. 일일이 따지지 마라.’
‘묵칠이 그런 속셈이 어디 있나. 강 경(卿), 괜한 생각이다’
강환장의 불끈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황상은 묵칠에게 평생 당한 셈이었다. 묵칠을 씹어먹고 갈가리 찢어놓고 싶었다.
이번 생엔 기선을 잡았으니 절대로 아둔한 돼지 같은 묵칠이 황상의 총애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리라. 조정에 발을 들일 기회는 더더욱 주지 않으리라. 사사건건 그의 앞을 가로막은 전생처럼은 절대로 되지 않으리라.
대문 앞에서 마차에서 내린 강환장은 마중 나온 문지기에게 물었다.
“전씨는?”
강씨 가문 장방(帳房: 장부를 관리하는 곳) 관사 전씨가 목소리를 듣고 나와서 몇 걸음 만에 강환장을 뒤따라갔다. 강환장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시했다.
“은자 5만 냥을 바로 준비하게. 바로 바꿀 수 있는 천 냥짜리 은표로 준비하고, 준비되면 즉시 가지고 오게.”
“예? 세자야, 장부엔…….”
전 관사가 한참 얼떨떨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강환장은 어느새 빠른 걸음으로 중문 안으로 들어가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없었다.
전 관사는 얼이 빠져서는 눈앞에 서 있는 월동문을 바라봤다.
은자 5만 냥이라뇨! 강가 장부에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돈이 5백 냥이라도 넘은 적이 있었던가요!
강환장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곧장 진 부인 정원으로 향했다.
아침에 서둘러 나가느라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고씨가 아직 진부인 정원의 후조방에 있는 걸 장 태태가 알게 되면…….
장 태태가 모를 리가 있나. 우리 강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샅샅이 귀에 들어갈 텐데.
강환장은 이를 갈며 걸음을 서둘렀다. 소홀했다. 장 태태가 지금 그녀를 면박 주고 몰아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화문을 넘어 들어가자마자, 상방 문 앞에 무릎을 꿇은 고 낭자가 보였다. 가슴이 쿡 쑤시고 분노가 치밀었다.
계단으로 달려 내려가 뜰을 가로질러 몇 걸음 만에 상방 입구에 이르렀다. 그는 고 낭자를 잡아 세우며 매섭게 외쳤다.
“일어나라! 기억해 둬라! 여긴 수녕백부, 강부다! 외간 사람을 상대할 것 없다!”
고 낭자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듯 강환장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말이야?
시녀가 벌써 휘장을 들어 올렸다. 강환장은 옥묵에게 고 낭자를 부축하라고 눈짓하고는 분노 가득한 모습으로 상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방 남쪽 창가 아래 화항 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던 진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강환장을 바라봤다. 입은 반쯤 벌린 채, 경악하고 또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강녕은 강완과 딱 달라붙을 듯이 화항 구석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오라비의 얼굴을 살피고 싶은데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보지 않자니 더 불안했고.
큰 오라버니, 이번에 진짜로 화가 났어!
강환장은 휙 돌아서면서 방 안에 있는 모두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서서 또 둘러보고는 조금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 태태는 가셨습니까?”
‘장 태태’라는 세 글자에 잠시 눈물이 멎었던 진 부인은 강물 같은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렸다.
“아들! 드디어 돌아왔구나! 그 장씨, 우리 집에 와서 내게 먼저 오지도 않았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치자. 네 처가 몸이 안 좋지 않니. 나도 자식이 있는 몸이라 이해한다. 탓하지 않아. 하지만 네 처 거처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돌아갔다. 네 어미에겐 기별조차 하지 않았어! 얼굴을 내밀지 않았을뿐더러, 인사조차 없더구나! 옥가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걸까? 우리 강가가 안중에 없다고 대놓고 드러내는 것 아니냐?”
진 부인은 말을 할수록 마음이 아파서 폭우가 내리는 듯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강환장의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장 태태가 오지 않았는데, 고씨는 왜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걸까.
강환장의 시선이 강녕에게 향하자, 강녕은 겁에 질려 힘껏 뒤로 웅크렸다.
“어머니, 뭐 하러 그런 실랑이를 합니까. 상인 가문이 법도를 알겠습니까? 어머니, 고씨가 왜 문 앞에 무릎 꿇고 있습니까?”
강환장은 대충 진 부인을 위로하고는 곧바로 고씨 일을 물었다.
강환장이 고 낭자 일을 묻자, 진 부인의 눈물이 뚝 그치더니 다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탁자를 내리치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 말했다.
“난 줄곧 방택, 저 아이가 좋은 아이인 줄 알았다. 이렇게 덕도 없고 품위도 없고 염치없는 줄 몰랐다! 진씨 가문과 연관 있는 사람 중에 이런 수치스러운 일이 있었던 적이 있느냐? 정말이지 이 늙은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내가 이미 사람을 보내 저 아이 아비, 어미에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염치없는 짓을! 이제 앞으로……. 앞으로 저 아이는 제대로 된 지아비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아이고, 내 얼굴까지 먹칠했구나!”
진 부인은 거의 목놓아 울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냐?”
강환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오 어멈을 노려봤다.
“고씨…….”
“다 들었다! 네 누이가 다 이야기했어! 끝까지 내게 감출 생각이었느냐?”
진 부인이 강환장의 말을 자르며 다시 한 번 탁자를 내리치느라 눈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난 좋은 아이인 줄 알았지. 이렇게 수치심도 없을 줄이야. 너도 속은 것이다! 천한 것! 가문의 수치다, 수치!”
“어머니!”
강환장은 진 부인의 울음소리에 온몸이 거북해져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는 진 부인의 울음소리를 억누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젯밤에 지나가다 마주쳐서 이야기 몇 마디 나눈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녕이 난리를 부린 것이라고요!”
강환장이 눈을 부릅뜨자, 강녕은 놀라서 힉 소리를 내더니 언니 강완 뒤로 숨었다.
“편을 드는 것이냐! 네 누이가 똑똑히 봤단다! 그것이 널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더라! 아예 네 몸에 녹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듯이 찰싹 붙어 있었다던데! 그런데도 편을 들어?”
진 부인은 화도 나고 마음도 아팠다.
“대갓집 낭자 중에 이런 아이가 어디 있느냐. 우리 진씨 가문이었다면 연못에 빠뜨렸을 일이다! 그런데도 편을 들어! 옥가아, 왜 이렇게 어리석은 것이냐. 저것이 여인의 네 가지 덕 중 어디 하나 갖춘 것이 있더냐? 내 얼굴까지 먹칠했다! 옥가아, 저건 수치심이 없는 것이다. 수치심이 없는 것이라고!”
진 부인은 가슴을 두드리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오 어멈은 강환장의 표정을 힐끔 보면서 궁둥이를 슬쩍 옮기며 다가가 웃는 얼굴로 달랬다.
“부인, 말씀이 과하세요.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원래 고 낭자를 세자야에게 들여주실 생각이셨잖아요. 고 낭자도 그 일을 알고요. 다만…….”
“황당한 소리!”
진 부인이 매섭게 오 어멈의 말을 잘랐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오 어멈 얼굴에 침이 가득 튀었다.
“아직 정해진 것 하나 없다. 그저 해 본 말이지. 그리고 설령 정해졌다고 해도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에 사내 품에 달려드는 건 아니지!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고 했거늘! 이게 무슨 짓인가? 내 얼굴까지 먹칠을 했어! 글을 알고 예를 아는 아이인 줄 알았더니, 그 보람도 없이. 속 터져 죽겠네!”
진 부인은 힘껏 가슴을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은 다시 입에 올리지도 말아라! 이렇게 염치도 없고 수치를 모르는 천한 계집은 옥가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강가에도 어울리지 않아! 우리 가문까지 망신당하게 둘 순 없어! 난 좋은 아이인 줄 알았지! 속 터져 죽겠다!”
오 어멈은 목을 움츠리고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완고한 진 부인은 예의를 따지지 말아야 할 때 가장 예의와 법도를 따지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