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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14화 (14/463)

14화: 첫 관문

장 태태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환장을 바라봤다. 강환장은 이동의 말을 못 들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 태태는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자네 생각해서 하는 말일세. 좋네. 반드시 들여야겠고, 지금 당장 들여야겠다니, 좋네. 고가 여자를 데리고 와 보게.”

“고씨가 어제 너무 놀라서, 제가 벌써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강환장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는데, 느긋하고 태연한 말투였다.

장 태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가 금세 봄바람이라도 분 듯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경사스러운 일이군. 고야, 축하하네.”

강환장이 고개를 들고 장 태태를 바라봤다. 경계하고 방어하는 기색이 가득한 눈빛에 장 태태는 빙긋이 웃었다.

“그만 가보게. 난 아동과 이야기 좀 하겠네.”

강환장은 주저하다가 장읍을 하고 물러갔다. 오늘 일이 너무나 중요했다. 그 일과 비교하면 장 태태의 분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화를 낸다고 뭘 어쩌겠나. 시간 지나면 알아서 삭이겠지.

장 태태는 팔걸이의자에 단정하게 앉아서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팔걸이를 잡고 몸을 일으켜서 이동의 침상 앞에 앉았다.

“아동,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옥가아가 사람이 변한 것 같구나.”

이동은 가슴이 철렁해서 장 태태를 올려다봤다.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사람이 변한 게 아니에요. 그는 그대로예요. 그저 전엔 제가 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제 들어왔을 뿐이에요. 우리 앞에서 가면을 쓸 필요가 없어진 거죠.”

장 태태는 미간을 단단히 좁혔다. 이동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어머니, 그 사람 이제 우릴 상대하느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게다가 해야 할 큰일이 너무 많아서 우리를 상대하느라 마음 쓸 여유가 없어요. 우리, 이제 어째야 해요?”

장 태태는 얼굴을 흐리고 한참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사람을 시켜 터트린 것이냐?”

“아니에요. 수련, 네가 말씀드려.”

이동은 피곤한 표정이었다. 머리를 크게 다쳤고, 밤새 시달렸다. 창백한 얼굴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수련은 청서가 저녁에 찾아와서 세자야가 술에 취했으니 중문으로 마중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던 일을 말하고 이어서 말했다.

“어젯밤에 대요 댁이 소복을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물어봤대요. 세자야를 마중 가자고 청서가 데리고 나갔는데, 가다가 갑자기 이낭자 거처로 갔대요. 청서가 반딧불이 잡으러 가자고 이낭자를 불러냈고요.”

장 태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반딧불이를 잡아? 이런 날씨에 반딧불이가 어디 있어서? 강가 이낭자, 바보인 거냐?”

“저도 얼떨떨해서 일부러 물어봤더니, 대요 댁이 하는 말이, 자기도 이상했대요. 그런데 소복이 그렇게 말했다는데요. 반딧불이 잡으러 간다고요.”

수련이 재빨리 덧붙여 설명했다.

“음. 어제는 누가 세자야 시중들었지?”

“청서예요. 오늘 아침에…….”

수련이 문죽을 바라보자, 문죽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날이 막 밝자마자 수련 언니가 가 보래서 큰 주방에 갔어요. 마침 제비집 갱(羹)을 가지러 온 청서를 만났어요. 웃고 떠들고, 마음 편해 보였어요.”

장 태태의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너희들, 다 잘하고 있다. 낭자가 몸이 안 좋으니 너희들이 필요해. 마땅히 이렇게 마음 써야지. 너희 넷, 만 어멈에게 가서 다섯 냥씩 받아 가라. 대요 어멈에게도 다섯 냥 보내고.”

그러고는 수련에게 눈짓했다.

“문 앞에 가서 지켜라.”

수련은 서둘러 대답하고 모두를 데리고 나간 다음 문을 닫고 밖에서 지켰다.

“보아하니, 세자야 스스로 연기하고 들킨 것 같구나.”

수련이 문을 닫자, 장 태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동은 몸을 위로 옮기며 대답했다.

“그 사람이 아니에요. 청서예요.”

“우둔해 보이던데. 똑똑해 보이지도 않고.”

장 태태는 묘하게 마음이 좀 놓였다.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서는 확실히 똑똑하진 않았다. 게다가 조금밖에 없는 지혜를 모두 뒤에서 남 발목 잡는 데 쓰기도 하고.

“옥가아가 한 게 아니라면, 어젯밤에 청서가 시중들 때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옥가아는 영리한 사람이고, 이 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서 몇 마디면 확실하게 알아낼 것을. 어째서 네가 했다고 단정 짓는 게냐?”

장 태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동은 처연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가 영리한 사람이라서예요. 영리하고 자부심 넘치는 사람이라서, 자기는 절대로 잘못 보고,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할 때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틀린 게 있다면 모두 내 탓이라고 생각해요. 모두 남 탓이라고 생각하죠.

“어머니, 강환장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고 낭자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고 낭자의 명성을 해칠 텐데, 사통하는 모습을 일부러 들키겠어요? 게다가 강환장이 악독하긴 해도 어찌 됐든 글공부한 세도가 자제에요. 청고하기 짝이 없죠. 사통하다가 걸리는 그런 저속한 수단을 쓰진 못해요. 청서예요.”

“그렇긴 하지.”

장 태태가 한숨을 내쉬며 애틋한 듯 이동의 이마를 바라봤다.

“아동, 너도 달라졌구나. 철들었어. 가여운 것…….”

장 태태는 목이 메서 뒷말을 삼켰다. 보물 같은 딸이 이런 일로 철이 들다니, 대가가 너무 컸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고가 그 계집을 들이게 내버려 둘 것이냐?”

“네. 들이라고 해요. 그리고 청서도 첩으로 올릴 거예요. 추미와 춘연도 그 김에 머리 올려서 그에게 주려고요.”

이동이 냉담하게 말했다.

“그것도 좋지.”

장 태태는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청서가 사통을 잡는 이런 일을 꾸밀 정도라면 앞으로도 조용히 지내진 않으리라. 춘연이든 추미든, 모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네 사람을 고른 것도 이런 때를 대비해서였고. 독에는 독, 정말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머니, 당분간 성 밖 별장에 가서 묵을까 해요.”

이동이 나지막이 하는 말에 장 태태의 손이 떨렸다. 이동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어머니도 보셨잖아요. 이 집안은 엉망진창이에요. 전 지금 조금만 오래 깨어 있어도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요즘은 수련과 아이들 덕분에 버티고 있어요. 며칠 지나면 고 낭자가 들어올 텐데,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어머니, 계속 이 집에 있으면 병이 낫지 않을뿐더러, 전 죽어요.”

이동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장 태태는 애간장이 끊어질 듯해서 쉴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네 상처…… 네 병……. 딸아, 걱정하지 말아라. 어미가 있지 않니. 어미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내 딸아, 어미 마음이…… 애가 끓는구나.”

“어머니, 고씨에게 집안일을 맡기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해요. 한평생은 길어요. 저는 일단 몸조리부터 잘할래요. 몸이 나아야 이 엉망진창인 상황을 해결할 기운이 나죠. 어머니, 항상 그러셨잖아요. 사람이 너무 고집스러우면 안 된다고요. 물러나서 나아갈 기회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요.”

이동은 어머니를 붙잡고 절실하게 말하면서도 목이 멨다.

어머니가 애가 끓는다고 하시지만, 나라고 안 그럴까.

이번 생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썩은 내가 나는 진흙탕, 강씨 가문을 꼭 벗어나야 한다.

“그래, 그래. 착하지, 내 딸. 어미도 네 생각이랑 같다. 어미 뜻도 그렇다. 일단 몸조리부터 하자. 그게 먼저다. 딸아, 네 말이 맞다. 한평생은 길다. 내 딸, 성장했구나. 철들었어. 딸아, 아무것도 마음에 담아둘 것 없다. 생각할 것 없어. 별일 아니야. 젊을 때 이상한 짓 한 번 하지 않는 사람 있느냐? 환장은 아직 젊고 막 혼인한 때라 두어 해만 지나면 정신 차릴 것이다. 딸아, 우리 멀리 보자꾸나. 응? 착하지.”

장 태태는 슬픔을 억누르고 부드럽게 딸을 위로했다.

“알아요. 전 괜찮아요.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성 밖으로 요양하러 가는 일, 일단 꺼내지 마세요. 강환장에게 첩들을 들여주고, 정리할 것들도 좀 하고요. 혼수 정리도 해야 하고요. 다 준비되면 이야기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 태태는 냉혹해 보일 정도로 차분하고 침착한 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앞이 흐려지고 마음이 아팠다. 하룻밤 새, 딸이 자기보다 더 늙어버린 듯했다.

이동은 어머니를 배웅하고 한참 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난 생엔 추미와 춘연은 강환장 곁에 가지 못했다. 자신이 그녀들을 멀리 보내 버렸었다.

강환장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자신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나쁜 인간일 것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악독하다고 여기는데, 그런 자신이 나서서 추미와 춘연을 첩으로 들이면, 두 사람에게 악감정과 경계심만 생길 것이 아닌가. 에둘러서 들여보낼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문죽?”

“여기 있어요.”

문죽이 대답하며 들어왔다.

“적금 나사(螺絲: 날개를 편 나비 모양) 비녀 두 개랑 적금 팔찌 한 쌍을 추미에게 가져다줘. 부인을 모시는 오 어멈에게 주라고 해. 뭐라고 말하냐면…….”

이동이 허리를 숙이고 나지막이 분부하자 문죽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련에게 물건을 받아서 손수건으로 잘 감싼 다음에 추미를 찾아갔다.

지시를 마친 이동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깊게 잠이 들었다.

비녀와 팔찌를 받은 추미는 팔찌를 빙글빙글 돌리며 궁리하다가 비녀와 팔찌를 품에 안고 조용히 춘연을 불렀다. 두 사람은 구석에 웅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수군거렸다. 추미가 비녀를 춘연에게 찔러준 다음에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처에서 나가 오 어멈을 만나러 후원으로 향했다.

한숨 자고 일어난 이동은 훨씬 개운하고 편안해져서 기운이 있어 보였다.

수련은 이동에게 음식을 좀 먹이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추미가 사람을 보내 이야기를 전했어요. 다 잘 됐답니다. 안심하세요. 세자야는 아침에 우리 거처에서 출타하셨어요. 이번에도 대교가 따라갔어요.”

“그래. 어제 대교한테 물어봤어?”

잘 자고 일어난 이동은 개운한 얼굴로 뒤에 등받이를 대달라고 눈짓하고는 일어나 앉았다.

“네. 청국을 보내서 물어봤어요. 청국!”

수련이 바깥 난각에서 바느질 중인 청국을 불렀다.

“대교가 뭐라고 했는지 대내내에게 말씀드려.”

청국이 각답에 비스듬히 걸터앉아서 말했다.

“대교가 그러는데, 어제 세자야가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마차를 쓰신다고 했대요. 마차부터 타고 나가서 말로 갈아타셨대요.”

이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성엔 몇십 년 동안 불문율이 있었다. 청장년 사내는 병이 깊지 않은 이상 마차를 타지 않는다는 것. 마차를 타면 게으르고 사치스럽다고 뒤에서 욕을 했다.

강환장은 그녀와 정혼하기 전에 이미 가세가 심하게 기울어서 마차를 쓸 형편이 아니었다. 마차도 없고, 말도 없었다.

강환장과 선을 봤던 그 날 상황을 똑똑히 기억했다.

어머니는 선 자리를 다루로 정했었다. 이가 점포 중 한 곳으로, 그녀와 어머니는 일찍 도착해서 2층에 서서 지켜 보고 있었다. 강환장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손님을 태우는 마차에서 재빠르게 뛰어내리더니 무의식적으로 좌우를 둘러봤다. 그러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모친을 부축한 다음 마차 삯을 마부에게 건넸다.

그녀는 수치와 분노를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과 다루 사환이 열정적으로 반길 때 거북해하는 행동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그가 저렇게까지 돈에 연연하는 걸 보면 진짜로 똑똑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하나도 새겨듣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저렇게 신선같이 우아하고 고운 소년이 돈 때문에 저렇게 고생하고 굴욕을 겪는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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