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변함없는 그 사람
강환장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한기가 가득했다. 수련은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켰고, 이동은 대답 없이 강환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강환장이 얼굴 가득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결심했다니, 그래, 좋소! 이토록 병이 깊어 우리 강가의 안살림을 맡을 수 없다고 하니, 아무래도 내가 고심하여 당신 근심을 덜어주어야겠군! 고씨는 글을 알고 예절에 밝고 온유하고 현숙한 사람이지. 곧 집으로 들여 당신 대신 집안일을 관리하며 시부모와 지아비를 모시도록 하겠소!”
강환장은 싸늘하게 웃으며 돌아서고는 소매를 휘두르며 나갔다.
“가서…… 어머니를……. 아, 머리야…….”
이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환장이 고씨를 들이려고 해서가 아니라, 고씨에게 안살림을 맡기려고 해서가 아니라, 부부로 산 지 몇십 년인데 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아서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를 믿지 않아. 존중은 더더욱 하지 않아. 나를 바라보는 시선엔 증오밖에 없어. 도저히 풀지 못할 정도로 강한 증오가…….
청서는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사통하는 걸 정말로 잡을 줄은 몰랐다. 세자야가 고씨 계집을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더욱 몰랐다. 고씨 계집이 그렇게까지 염치가 없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 자리에서 들키길 고씨 계집이 자기보다 더 바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어렴풋이 들었다.
사통하는 모습을 들키고, 그 김에 세자야의 이낭이 될 생각이었던 거로구나!
대내내의 거처에 불이 지금까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세자야의 성정에…… 대 내내의 성정이면…….
절망감이 몰려들자 청서는 제 뺨을 내리치고 싶었다.
대내내가 대놓고 말했었는데. 몸이 조금 좋아지면 작게 연회를 열어 자신을 첩으로 올려 주겠다고. 하지만 이런 난리가 났으니 첩으로 올라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하리라. 그리고 세자야도. 세자야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모해하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청서는 생각할수록 두렵고, 생각할수록 후회됐다. 어깨를 감싸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청서는 벌떡 일어섰다.
세자야가 돌아오셨다!
강환장은 자기 앞에 빳빳이 굳은 청서를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바라봤다.
“왜 이러는 것이냐? 왜 이렇게 겁에 질렸어!”
“세자야! 용서해주세요! 아니에요……. 제가…… 아니에요…….”
강환장의 온화한 목소리에 청서는 한숨을 돌리면서 털썩 무릎을 꿇고 횡설수설 용서를 빌었다. 강환장은 화도 나고 우습기도 했다.
“일어나라! 이 정도 일로 이렇게까지 겁먹은 것이냐? 우선 차 한 잔 내오너라.”
청서가 지척지척 걸어가 차를 바치자, 강환장은 한 모금 마시고는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아라.”
청서는 간이 철렁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두 손을 미칠 듯이 배배 꼬면서 눈을 반짝이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게…… 대내내가…… 주방에 해장탕을 준비하시길래, 제 생각에…… 세자야께서 돌아오셨을 때, 술을 많이 드셨을 것 같고…….”
청서는 이야기하면서 쉴새 없이 강환장의 표정을 힐끔거렸다. 그의 온화한 표정에 마음이 진정되면서 말도 순조롭게 술술 나왔다.
“세자야가 술을 많이 마셨을까 봐 걱정했어요. 독산은 중문 안으로 못 들어오잖아요. 세자야가 술을 많이 드시고 행여나 어디에 부딪힐까 봐, 대내내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어요. 나중에 소복이랑 마중 가다가, 어두운 하늘에 반딧불이 같은 걸 봤어요. 이낭자가 수국공부에 있는…… 그런 반딧불이 등롱을 가지고 싶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 그런데, 그런데…… 그럴 줄은……. 살려주세요, 세자야.”
청서가 털썩 소리와 함께 다시 무릎을 꿇었다. 강환장이 그녀를 발끝으로 툭 찼다.
“일어나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르겠느냐? 일어나라. 네 탓이 아니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목욕 시중이나 들어라. 내일 중요한 일이 있다.”
평생 함께한 사람인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 모를까. 너는 충직하고 우둔해서 나쁜 마음은 조금도 먹지 못하는 여인이다. 휴, 고씨가 음으로 양으로 감싸지 않았으면, 너와 네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강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벗기라고 눈짓했다. 청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녀는 강환장의 잠자리 시중을 든 후에 천천히 난각(煖閣)으로 돌아가서 훈연로 옆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강환장이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생각할수록 어리둥절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무슨 함정에 빠졌는데?
이동의 거처엔 밤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을 무렵, 장 태태가 벌써 도착했고 강환장이 중문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마차에서 내린 장 태태는 곧장 진 부인의 정원으로 향했다. 뒤를 따르던 강환장은 아차 싶어서 급한 걸음으로 장 태태를 앞질러서 장읍(長揖: 읍, 두 손을 맞잡아 쥐고 아래위로 흔드는 절. 동작을 크게 하는 것을 장읍이라 한다.)하며 웃음 지었다.
“태태, 청휘원은 저쪽입니다.”
“나도 아네. 이 집안에선 법도를 중시하지 않는가. 예법, 체통을 가장 따지지. 그동안 나도 꽤 배웠네. 자네 집에 온 이상, 부인께 먼저 문안드리지 않으면 큰 결례 아닌가.”
장 태태가 강환장을 지나쳐서 앞으로 걸으면서 조용히 말하는데, 날이 뾰족 선 말투였다.
강환장은 눈을 내리깔고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몇십 년 살아온 그로서는 이런 비아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환장이 다시 장 태태 앞으로 다가갔다.
“가족끼리 법도가 웬 말입니까. 어머니가 요즘 편찮으십니다. 어제는 또 늦게 잠드셔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먼저 아동에게 가시지요. 태태께서 걱정하실까 봐 의원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붙잡아 두었습니다.”
장 태태는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돌아서서 곧장 청휘원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이동이 걱정되어서 날개를 꽂고 날아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수련의 손을 잡고 약을 받아마시던 이동은 장 태태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약을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하고 그전에 마셨던 약까지 같이 토해냈다. 장 태태가 다급해져서 후다닥 들어갔다.
“내 딸! 내 보물! 왜 이러는 것이냐!”
“어머니!”
이동은 옷에 시커먼 약즙을 묻힌 채 창백하고 기운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못 살겠어요. 못 살겠어요…….”
“낭자!”
수련은 울먹이며 외쳤고, 장 태태는 심장이 뽑히는 것 같아서 이동을 끌어안고 목이 메 소리쳤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어미가 있다. 어미가 있어. 살 수 있어. 내 보물, 내 딸아.”
방 안이 얼싸안고 울부짖고 어수선해졌지만, 강환장은 침상 앞에 서서 눈살을 찌푸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가끔 방 한구석에 있는 시진종(時辰鐘: 시계)를 힐끔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 일은 절대로 지체하면 안 돼!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장 태태가 강환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훤하게 알지만, 물을 건 물어야 했다.
“별일 아닙니다. 아동이 오해했습니다.”
강환장이 얼버무리며 말했다.
“어찌 된 일이냐?”
장 태태가 수련을 돌아보자, 수련이 털썩 무릎을 꿇고 아뢰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어멈이 찾아와 기별한 것부터 시작해서, 어멈이 무슨 말을 했는지, 강환장이 어떤 모습으로 뛰쳐 들어왔는지, 들어와서 뭐라고 했는지. 이동은 또 무슨 말을 했는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감추지도 않았다.
장 태태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옥가아, 난 자네가 철들고 예의 바르다고 생각해 왔네. 내가 아동을 감싸려는 게 아니라, 자네가 잘못한 걸세. 첫째, 아동이 한 짓이라고 했다고? 제대로 알아봤는가? 증인, 물증, 다 손에 넣었는가?”
장 태태가 빤히 바라보자 강환장은 껄끄러워졌다. 그러나 그보다 분노가 컸다. 뻔한 일인데 알아볼 필요가 있나?
“아무 소리도 못 하는 걸 보니 알아보지 않은 모양이군. 옥가아, 자네와 고 낭자의 일을 들켜서 화가 났겠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 아동에게 화풀이했겠지. 그래, 이해하네. 하지만 아동 생각도 해야지. 아동은 신부네. 이 일이 퍼지면, 아동의 명성이 뭐가 되겠나? 아동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면, 자네, 자네 강씨 가문에 좋을 것은 무엇이고?”
강환장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두 번째, 아동이 심하게 다쳤는지 아닌지, 자네도 똑똑히 알 텐데? 아동의 이마에 커다란 상처가 생긴 걸 못 본 것도 아니고. 의원의 진단도 봤겠지? 그게 다 거짓인가? 내가 모신 의원은 못 믿는다 쳐도, 그럼 손 의원은? 손 의원도 못 믿나? 아동은 거의 죽었다 살아났네. 그런데 꾀병이라? 그런 말을 감히 어떻게 입에 올려?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다니, 무슨 생각인가? 화병으로 죽일 셈인가? 옥가아, 아동이 죽으면 자네와 자네 가문에 좋을 게 뭐가 있어서? 난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네!”
강환장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다가 공수하며 장읍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자네가 큰 뜻을 품고 큰일을 할 생각이란 걸 나도 아네. 큰일을 하려면 일거수일투족 모두 신중해야 해. 고씨를 첩으로 들이고, 곁에 미인 몇 두고 싶겠지. 괜찮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풍류 아닌가, 고상한 일이지!”
장 태태의 말엔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고씨는 아직은 자네 외사촌 누이일세. 아직 가마로 데리고 들어오지 않았어! 그런데 다 보는 앞에서 끌어안고 붙들고 있었다니, 옥가아, 자네 예법은? 덕행은? 앞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 누군가 이 일로 문제 삼을까 두렵지도 않은가? 그리고 자네가 한 말들, 내가 몇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처럼 고얀 소리는 처음 들었네. 아동이 쓰러지면, 강가가 무너지는가? 아동이 강가에 들어온 지 겨우 두 달, 아직 강가 안살림을 맡지 않았네. 아동이 들어오기 전에는 어땠는가? 강가가 무너졌는가? 첩을 들이는 이유가 집안일을 맡기기 위해서라니, 아동은 괜찮다만, 옥가아, 난 자네가 자네 어머니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네.”
“태태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장 태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환장은 다시 장읍하며 잘못을 인정했다. 간곡한 목소리, 성의 있는 태도였다.
장 태태는 가슴이 턱 막히고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강환장의 태도를 보니, 고심해서 늘어놓은 말을 전혀 새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예 듣지 않았던가.
장 태태는 서서히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말투는 꽤 평온했다.
“옥가아, 잘 듣게. 아동의 성격이 좀 교만하긴 하네. 그렇다고 남을 전혀 품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네. 몸이 아픈 동안 추미와 아이들을 자네 수발들라고 보냈지. 그리고 자기 월전에서 은자 두 냥, 동전 1천 전을 떼어 청서 낭자에게 주었어. 사람을 품지 못하는 성품이면, 그리 했겠나?”
“예.”
강환장은 고개를 숙이고 허심탄회하게 가르침을 받는 듯한 태도였다. 장 태태는 더욱 실망감이 짙어져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통방을 거두는 것과 외사촌 누이를 첩으로 들이는 건 다른 일일세. 혼인한 지 겨우 두 달인데 지금 바로 외사촌을 집으로 들인다니…….”
이동이 장 태태를 잡아당기며 말을 잘랐다.
“어머니, 일이 이렇게 되어서 더 미룰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