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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12화 (12/463)

12화: 반딧불이 한 쌍을 잡다

고 낭자는 석가산 뒤에서 나와서 손수건을 꼭 쥐고 수줍은 얼굴로 강환장을 바라봤다. 강환장은 멈칫하다가 무심결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늦은 시간에 예서 무얼 하는 거냐?”

“오라버니.”

고 낭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몇 걸음 다가가 고개를 치켜들고 강환장을 올려다봤다.

“오라버니, 나 못 살겠어요.”

“무슨 일이야?”

강환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매서운 그 눈빛에 고 낭자의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고 낭자는 갑자기 치솟은 두려움을 입술을 깨물며 억누르고는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오라버니, 아버지와 큰 오라버니가, 저를 억지로 혼인시키려고…….”

고 낭자의 눈물이 복숭앗빛 볼을 타고 구슬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강환장을 올려다보며 목이 멘 듯이 말도 잇지 못했다. 누구와 혼인하라고 강요하는 건지 그녀도 모른다. 아직 강요하지 않았으니까.

강환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1년 뒤에야 이 여인을 첩으로 들이는데?

그 1년 동안 이 여인 아비가 혼인하라고 강요한 적이 있던가?

이런 사소한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당시에 몰랐던 일인지도 모르겠고.

“오라버니!”

강환장이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고 낭자의 불안이 갈수록 짙어졌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거의 강환장과 찰싹 붙을 것 같은 거리에서 얼굴을 치켜들고 비에 떨어지는 복숭아 꽃잎 같은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 나 못살아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우느라 서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온몸을 던져 강환장의 품에 안겼다. 강환장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를 잡고서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 볼에 입을 맞췄다. 몇십 년 동안 해온 동작이라 거의 본능처럼 자연스러웠다.

“오라버니!”

고 낭자는 크게 기뻐하며 강환장을 꼭 끌어안고 자기도 볼에 입술을 맞추려고 까치발을 들었다.

내 도박이 옳았어. 오라버니는 역시 내게 마음이 있어!

청서는 저 멀리서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강녕을 끌고 석가산 쪽으로 달렸다.

“어서요! 저기, 아주 많아요!”

강녕은 몸을 옆으로 튼 채 끌려가듯 앞으로 달렸고, 소복과 강녕의 시녀 옥하가 뒤뚱거리며 뒤를 쫓았다. 오는 내내 두 사람은 반딧불이 반 마리도 못 봤다. 무슨 반딧불이가 있다고.

석가산과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청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강녕은 청서의 등에 쿵 머리를 박고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고개를 들자마자 석가산 쪽에 얼싸안고 있는 그림자를 보고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귀가 찢어져라 외쳤다.

“꺄아아아아악! 도둑이다! 요괴다! 귀신이다!”

그 주인에 그 종 아니랄까, 옥하도 따라 미친 듯이 외쳤다.

“누구 없어요? 귀신 있어요! 도둑이 들었어요!”

사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소복은 강녕과 옥하의 비명에 놀라서 우앙, 울음을 터트렸다.

수화문 밖, 어멈과 문지기들은 막 귀가한 강환장의 시중을 들고 채 흩어지기도 전에 독산, 마부 대교와 함께 몽둥이를 들고, 의자를 들고, 또 찻주전자까지 덜렁 들고서 우르르 몰려왔다.

고 낭자는 놀라서 다리부터 풀렸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두렵다는 듯이 ‘오라버니!’ 하고 부르는데, 두 손은 죽어라 강환장의 허리를 두르고 아까보다 더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는 첩이 되어 이 저택으로 들어오기로 단단히 작정했다. 정식으로 혼인한 사람만이 처고 사통한 사람은 첩이니 하는 건 상관하지도 않았다. 이 기회에 확실히 해서 더 신경 쓸 일만 없으면 그만이었다.

강환장은 곧바로 고 낭자를 밀어내려 했지만, 밀어도 밀리지 않았다. 고 낭자의 양팔은 쇠사슬 같은데 몸은 또 폭신폭신한 반죽처럼 품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 분명 혼절한 듯했다. 그녀는 원래 나약하고 가냘프니까.

분명 그 여인이 꾸민 짓이다!

강환장은 곧바로 이동을 떠올렸다. 무슨 생각이지? 이런 짓을 해서 좋을 것이 무엇이기에?

강환장은 요 며칠 쌓여온 이유 모를 조바심이 한데 모여 화가 치밀었다. 그는 고 낭자를 끌어안고, 벌떼처럼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을 돌아보며 매섭게 호통쳤다.

“시끄럽다! 법도를 모르느냐!”

몽둥이니 의자니 찻주전자를 든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각상처럼 굳은 채 강환장을 죽어라 끌어안은 고 낭자, 그리고 고 낭자를 꽉 안은 강환장!

맨 앞에 있던 대교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몽둥이를 휙 던지고 돌아서서 사람들을 비집고 나가더니 몇 걸음 안 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강환장이 고 낭자를 부둥켜안은 채, 아직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강녕 앞으로 몇 걸음 만에 다가가더니 손을 번쩍 치켜들어 뺨을 내리쳤다. 강녕의 비명이 뚝 그쳤다.

청서는 강환장 품에 단단히 안긴 고 낭자를 바라보고는 갈등 끝에 입을 열었다.

“세자야, 고 낭자가 어디 안 좋은가요? 제가 부축할게요.”

두려움 때문에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환장은 청서를 상대하지도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동을 찾았다. 어디에 있는 것이냐. 어디에 있어?

“세자야, 제가 부축할게요.”

강환장이 뺨을 때리지도 걷어차지도 않자, 청서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적잖이 진정되어서 고 낭자를 부축하려고 다시 공손하게 앞으로 나섰다.

“넌 이낭자를 모시고 돌아가라.”

강환장이 싸늘하게 명령하고는 고 낭자를 얼싸안고 곧장 정원으로 향했다.

지금 바로 첩으로 들일 것이다! 그 여인이 뭘 어쩌겠어. 감히 뭘 어쩌겠냔 말이다!

강환장이 고 낭자를 끌고 진 부인의 정원으로 향하자마자, 이동은 그 소식을 들었다.

중문 밖에서 당직 서는 종복 중에 이동이 시집을 오면서 데려온 종복이 여럿 있어서, 이런 일은 당연히 곧바로 기별이 올 수밖에 없었다.

어멈들의 기별을 들은 수련은 모두에게 동전 5백 전을 상으로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뻔뻔하네요!”

화가 나서 음이 다 엇나간 수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당황한 듯이 목소리를 높여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야, 오셨어요!”

수련이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나서 불을 끄고 휘장을 내리려는데 이동이 말렸다.

“뭘 당황해.”

“대내내, 그…….”

‘그’라고 입을 떼자마자 강환장의 다급한 걸음 소리가 벌써 상방 입구에서 들렸다. 이동은 일으켜달라고 문죽에게 눈짓했다. 제대로 앉기도 전에 강환장이 잔뜩 노기 띤 얼굴로 들어왔다.

“무슨 짓을 한 것이오!”

이동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저렇게 소리치는 그의 모습은 몇십 년 동안 그녀가 봐 온 강환장과 완전히 똑같았다.

‘무슨 짓을 한 것이오!’

강환장이 그녀에게 가장 많이 하던 말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한순간, 이동은 어렴풋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화려하고 찬란한 실내, 그곳을 가득 채운 종복 앞에서 그가 혐오가 가득한 얼굴로 화를 내면, 그녀는 쭈뼛쭈뼛 비굴하게 나지막이 물었었다.

‘무슨 일이에요?’라고.

강환장은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는 혐오와 분노가 치솟았다. 너무 치솟아서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저속하고 무지한 여인!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여인이, 고씨의 신발을 들어주기에도 부족한 여인이, 하필 정실 자리를 차지해서는!

지난 생에 저 여인은 정실이라는 이유로 집안을 틀어쥐고서 고씨를 적으로 여기고 사사건건 고씨를 핍박했지.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고씨를 난처하게 했지만, 고씨는 한 번도 따지지 않았어. 고씨에겐 나와 아이밖에 없으니까. 뛰어난 아들을 키워낸 건 바로 고씨야.

그렇게 뛰어난 아들이 생모가 첩이라는 이유로 남에게 손가락질받고 공격당했다. 나아가서 이 나라에 서출 아들이 봉작을 승계한 선례는 없다고 자신을 몰아붙였다.

왕이라는 봉작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못한다면, 한평생 흘린 땀과 피가 모두 수포가 되는 것 아닌가! 그것 때문에, 그는 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강환장은 독사 보듯이 이동을 바라봤다. 다시 태어난 이번 생에서는 이 악독하고 어리석은 여인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자가 말하길, 자신의 운명은 이 여인과 얽혀있다고 했었다.

“내 앞에서 시치미 떼는 것이오? 이렇게 시치미 떼려고 사통하는 장면을 잡은 게 아니지 않소?”

강환장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이를 갈며 말했다. 이동은 망연한 얼굴로 수련을 바라봤고, 수련이 재빨리 무릎을 구부리며 대답했다.

“아까 중문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이낭자와 청서 낭자가 중문 안 석가산 옆에서 세자야와 고 낭자가 안고 있는 걸 봤답니다. 도둑이 든 줄 알고 이낭자가 소리를 친 바람에 사람들도 알게 되었고요. 소인이 막 대내내에게 말씀드리려는 참인데, 세자야께서 오셨습니다.”

이동이 느릿느릿 아하, 하더니 물었다.

“내가 한 짓이란 말인가요? 내가 당신더러 고 낭자를 만나라고 했나요, 아니면 고 낭자더러 당신을 만나러 가라고 했나요?”

“말주변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군!”

잠시 멈칫하던 강환장은 금세 불같이 화를 내며 왼손 다섯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비벼대는 그 손가락을 힐끔 본 이동은 갑자기 매우 통쾌해졌다.

전에는 행여나 그가 언짢아할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 잘 보이려고, 끝도 없이 굽히고 굽혔다. 감히 맞서지 못했으며 화를 낼까 봐 거스르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가 바라는 모습으로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다시 태어난 지금 말주변쯤이야 뭐가 대수일까. 말주변이 좋을 뿐만 아니라 손톱은 더 날카롭게 세울 수 있는데.

“이게 내가 한 짓이라고요? 그럼 확실히 물어봐야겠군요. 내가 사통했나요, 사통을 잡았나요? 사통은 당신 외사촌 누이가 했고, 사통을 잡은 건 당신 친누이죠. 모두 당신의 피붙이가 한 짓인데, 어째서 내가 한 짓이 된 거죠?”

이동은 머리를 뒤로 기대며 강환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 사내, 억지 쓰고 화를 낼 때 얼굴이 이렇게 뒤틀려 있었구나. 참 못났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는 간사한 계집 같으니!”

강환장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레졌다.

감히 말대답해? 이때부터 이렇게 악독했구나!

이동은 머리를 뒤로 기대며 숨을 헐떡였다.

“내가 몸이 이래서…… 마음을 편히 먹고 기를 다스려야 한다고 의원이 재차 당부했어요.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쓸데없이 기가 흐트러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지 몰라요. 이런 지경이라,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누가 통정하든 말든, 신경 쓸 여력이 있겠어요?”

“대내내는 오늘 약도 몇 번 토하시다가 겨우 드셨어요.”

수련이 재빨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말이 멈춘 틈에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과 당신 외사촌 누이, 그토록 정이 깊고 마른 장작 타듯이 열열하다고 하니, 첩으로 들이고 싶으면 들이세요. 마음대로 하세요. 어떻게 들이든, 그것도 마음대로 하세요. 첩으로 들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마음대로 들이세요. 나는 이미…… 당신네 강가에 들어왔는데,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뭐 하러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작까지 부려요. 나한테 이런 누명을 씌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이동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강환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동을 바라봤다. 능청스럽게 일을 꾸미는 능력이 벌써 이렇게 무르익었다니. 천생 음험하고 간악한 것이 맞구나!

“병이 깊어 불쌍한 척할 것 없소! 잘 들으시오, 이동, 당신, 아픈 척하긴 쉬워도 낫는 건 쉽지 않을 것이오! 제대로 생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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