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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11화 (11/463)

11화: 어두운 밤에 화원을 맴돌다

경성 수녕백부.

고 낭자가 기운을 차리고 진 부인과 함께 저녁을 마쳤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그녀가 상방에서 나와서 월동문(月洞門: 정원 담을 뚫은 원형 문)으로 돌아 들어가자, 옥묵이 나지막이 보고했다.

“세자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대내내는 벌써 식사하셨고요. 주방에서 세자가 드실 해장탕을 준비했어요.”

고 낭자의 걸음이 멈칫하더니 천천히 몇 걸음 내딛다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가서 두봉 가지고 와. 아직 시간이 이르니 화원에 가서 좀 거닐고 싶어.”

청서는 붉은 토기 화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한 손으로 둥글부채를 쥐고서 흔드는 듯 마는 듯 부치면서 시녀 명교가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왕 어멈이 와서 해준 말인데요, 옥묵이 몇 번이나 가서 세자가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대요. 돌아와서 식사하시지 않는다고 했더니, 또 대내내는 식사하셨는지 묻더래요. 상대하지 않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찾아왔대요. 봉운 언니 대신 말 전하러 왔다고요. 말을 전하고는 돌아가지 않고 오매를 보고는 세자가 드실 해장탕 준비하냐고 묻더래요. 왕 어멈이 성가셔 죽겠다고 하더라고요.”

“응. 알겠어. 방 안에 당증소락(糖蒸酥酪: 설탕 넣은 요거트) 있어. 아까 대내내께서 주신 거야. 네가 먹어. 먹고 나서 정원에 한 번 다녀와. 반월한테 수본(繡本: 자수 도안) 한 장 달라고 하고, 그 김에 고 낭자가 있는지 보고 와. 없으면, 어디 갔는지 물어보고.”

“저 당증소락 제일 좋아해요! 대내내가 언니한테 참 잘해주시네요!”

명교는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청서는 명교가 소락을 먹고 폴짝폴짝 뛰면서 나가는 걸 보고 일어나서 초조한 듯 몇 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화로에서 사발을 꺼내 탕을 따라서 쟁반에 받쳐 들고는 청휘원으로 곧장 달려갔다.

기척을 들은 이동이 수련에게 분부했다.

“난 심하게 어지러워서 누웠다고 해. 뭐라고 하는지 네가 듣고 와.”

“네.”

수련이 대답하고 나갔더니, 마침 청서가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대내내는 저녁 잘 드셨어? 오늘 탕에 천마를 넣었는데…….”

“쉿!”

수련이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고서 목소리를 낮췄다.

“저녁으로 탕만 조금 드시고 너무 어지러워서 막 눈 감고 잠드셨어요. 탕은 여기에 둬요. 이따 깨시면 말씀드릴게요.”

“벌써 누우셨어? 세자야가 아직 안 돌아오셨는데…….”

청서는 실망과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몸이 저렇게 안 좋으신데, 세자야도 그걸 나무라지 못해요.”

수련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런 뜻이 아니야. 내 말은, 대내내 몸이 안 좋으신데, 세자야가 왜 일찍 돌아오지 않으시냐는 거야. 일찍 돌아오셔야지. 매일매일 이렇게 늦게 돌아오시다니. 대내내가 걱정하실 텐데, 그래도 되나 싶어서 하는 말이야.”

청서가 다급하게 해명했다. 정말로 그런 뜻은 아니었다.

“세자야가 어린애인가요. 대내내가 걱정해도 다 헛걱정이지.”

수련도 대충 넘겼다.

“주방에 해장탕을 준비했던데, 오늘도 술을 많이 드시고 오시려나.”

청서는 탕을 내려놓고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중문에 마중이라도 가지 그래? 혹시 술을 많이 드셨으면 어째. 독산은 중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데, 세자야 혼자……. 혹시 술기운이 오르면 어떡해. 3월이라도 해 떨어지면 매우 추워.”

“대내내가 일어나시면, 언니 대신 제가 귀띔해드릴게요. 어렵게 잠드셨어요. 깨우면 안 돼요.”

수련은 청서가 말꼬리를 잇지 못하게 대충 얼버무려 넘겨 버렸다.

결국 청서도 웃음 지으며 인사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거처로 돌아와서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아예 입구에 서서 명교를 기다렸다.

명교는 금세 수본을 들고 돌아와서는 폴짝폴짝 안으로 들어왔다.

“청서 언니, 일단 수본 받아요. 고 낭자는 부인 거처에 없었어요. 저녁 먹고는 소화한다고 화원에 갔대요.”

“알았어. 오늘은 이제 볼일 없으니까, 이만 가서 네 일 봐.”

청서는 명교를 내보내고는 팔짱을 낀 채 조마조마한 얼굴로 빙빙 맴돌았다.

고 낭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세자야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서 이 혼인을 맺었다. 혼담을 마무리 지은 그 날, 세자야는 만취해서 그녀의 손을 붙들고 쉴 새 없이 물었었다.

‘정말로 그 돈 냄새 폴폴 나는 상가 여식과 자식을 낳고, 그런 여인과 마주하며 평생을 보내야 할까?’

세자야는 대내내를 마음에 두지 않은 이상, 대내내가 질투하는 걸 용납하지 않을 성격이야. 대내내도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이런 나리, 이런 대내내는 등불을 들고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어. 앞으로 이낭이 되면 분명 더 좋은 나날이 펼쳐질 테고. 아이까지 생기면, 평생 원만하게 보낼 수 있어.

하지만 고 낭자가 들어온다면…….

청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고 낭자가 어떤 물건인지 똑똑히 꿰뚫고 있었다. 그 여인은 남을 품을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비를 잘 일으키고 겉 다르고 속 다른 염치없는 물건이었다. 세자는 아름다운 그것의 외모에만 푹 빠져서, 영특하고 세속적이지 않은 여인이니 하며 좋게 봐도 너무나 좋게 볼 뿐. 그런 여인이 집안에 들어오게 되면 세자의 마음은 온통 그녀에게 다 빼앗겨 버릴 것이다.

대내내야 지위가 있으니 설령 세자의 총애가 없다고 해도 고 낭자가 대들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나 같은 비첩은 매일 핍박당할 텐데, 그러고 어떻게 살아.

해가 다 졌고 화원에 불도 켜지 않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화원을 거닐기는 무슨. 화원이 아니라 세자야를 거닐러 간 거겠지!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소복, 나랑 밖에 좀 나가 보자. 세자가 술을 많이 마셨을까 걱정된다고, 대내내께서 우리더러 중문에 마중 가보라고 하셨어.”

마음을 다잡은 청서는 시녀 소복을 불러서 함께 중문으로 향했다.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몇 년 동안 빈곤했던 수녕백부는 밤에 주인이 없을 땐 실내에도 불을 켜지 못하게 해서 화원은 더더욱 등불 하나 없었고 오로지 달빛뿐이었다. 다행히 만월이 가까워질 때고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꽤 잘 보였다.

청서는 소복을 데리고 크게 길을 돌아서 진 부인의 정원 입구에서 중문 쪽으로 향했다.

한창 걸어가다가, 청서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칫했다.

바보! 정말 뭐라도 보게 되면 밝힐 거야, 말 거야? 밝히게 되면, 가장 먼저 세자 눈 밖에 나게 돼! 밝히지 않으면……. 밝히지 않을 거면 뭐하러 가?

청서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고, 소복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청서 언니, 왜 그래요?”

“아니야. 나는……. 내 말은……. 너랑 내가, 그러니까 만약 세자야가 술을 너무 많이 드셨으면 우리 둘만으로는 못 옮겨. 아니 못 옮기는 건 아니고…….”

그 몇 마디 하는 사이, 청서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사통하는 장면을 잡는 건, 대내내가 나서는 게 제일 좋아. 하지만 대내내 몸이 너무 안 좋으니……. 수련? 안 돼. 대내내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여우잖아. 게다가 대내내의 분부 없이는 거처 대문도 못 나간다고 들었어.

대내내가 안 되면 또 누굴 찾아야 할까?

이낭자!

청서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낭자는 무슨 일이 생기면 이것저것 생각하지도 않고 냅다 비명부터 지르고 보는 성격이지. 잘됐어! 이낭자의 목소리를 빌려서 고가 그 계집애 얼굴에 먹칠하는 거야. 어차피 뻔뻔한 년이잖아!

청서는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생각났는데, 전에 고 낭자가 우리 화원에서 반딧불이를 본 적 있대. 이낭자가 반딧불이 너무 보고 싶다고 그랬었어. 우리 이낭자를 불러서 같이 반딧불이 보러 가자.”

말을 마친 청서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이낭자 강녕의 연청원(蓮淸院)으로 달려갔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어!

소복도 잰걸음으로 뒤에서 따라 달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겨우 3월, 아직 날이 추운데 반딧불이가 어디에 있어서?

이낭자 강녕은 조금 전에 진 부인 거처에서 돌아왔다. 어머니가 기분이 안 좋아서 언니와 함께 어머니와 이야기만 잠시 나누고 온 터였다.

방긋방긋 웃으며 반딧불이 보러 가자고 하는 청서의 말에 강녕은 성가신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딧불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날은 그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고, 날도 늦어서 이제 자려던 참이건만.

다급해서 속이 탈 지경이던 청서가 이낭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제가 같이 반딧불이를 잡아드릴게요. 흰 천을 씌운 조롱(鳥籠)에 넣어서 연청원 회랑에 걸어 놓아요. 요즘 이게 유행이래요. 수국공부(隨國公府) 꽃놀이 연회 때 화원에 등불을 켜지 않고 곳곳에 반딧불이 조롱을 걸어 놓았대요. 반짝반짝, 선경 같았다지 뭐예요.”

강녕은 순간 마음이 움직였다. 그녀가 가장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집안이 바로 경성 최고 가문이라고 불리는 수국공부, 주 태후와 주 귀비의 친정이었다.

작년에 오라버니가 이씨 가문과 정혼한 후, 어머니가 처음으로 힐수방(擷繡坊)에 자매를 데리고 가 옷을 지었다. 주씨 가문 낭자들이 모두 석류홍 빛의 도선군(挑線裙)을 입는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를 졸라서 한 벌 지었었는데, 역시나 그 치마를 입으니 너무나 예뻤다.

(※도선군: 문양이나 다른 색을 엮어서 올록볼록한 느낌을 주는 치마)

“어서 가요. 더 늦으면 없을 거예요.”

속이 타는 청서는 강녕이 동요하는 표정이자 대뜸 붙잡고서 웃으며 밖으로 잡아끌었다. 온통 수국공부의 반딧불 조롱 생각뿐인 강녕은 눈빛을 빛내며 청서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반딧불 조롱 정도야, 나도 가질 수 있어!

중문 석가산 뒤, 고 낭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월동문 밖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오라버니가 얼른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또 주변이 너무 밝고 사람이 많을 때 일찍 돌아올까 봐 걱정이었다.

수화문 밖에서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 그리고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수화문垂花門: 중문. 문 위에 지붕 같은 덮개가 있고, 덮개 네 귀퉁이에 꽃을 조각하고 채색 그림을 그린 짧은 기둥이 드리워져 있다.)

오라버니가 돌아왔어!

강가는 가세가 기운 지 오래였고, 왕래하는 객이 아주 적어서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가족뿐이었다.

고 낭자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녀의 종신대사가 오늘 밤에 결정된다.

흐린 얼굴로 수화문 안으로 성큼 들어온 강환장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조급한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돌아와서 지금까지 가장 견딜 수 없고 적응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저택의 궁상스러움과 퇴락이었다. 법도가 아예 없었다.

내 수녕왕부가 언제 이렇게 엉망진창인 적이 있었나. 체통도 없고, 법도도 없고!

강환장은 걸음을 멈추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셨다. 서두르지 말자. 서두르면 안 된다. 진왕을 알게 되어 임무를 받게 되면 모든 것이 좋아진다. 금방이다. 서두르면 안 된다. 이번 생에선 단 한 걸음도 어긋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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