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화 (3/463)

3화: 처절한 후회

그 말에 장 태태가 살짝 얼떨떨해졌다.

“어쩔 수 없이 나와 혼인한 거예요. 강씨 가문이 너무 빈곤해서. 돈 때문에 나와 혼인해야 했던 게 너무 수치스러웠나 봐요…….”

이동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강환장이 얼마나 뼛속까지 고고한 사람인지, 평생을 보아와서 너무나 잘 알았다. 가난이란 글자에 숨도 못 쉴 정도로 짓눌려 있던 그에게 이씨 가문의 산처럼 많은 돈은 부귀가 아니라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동은 부르르 진저리쳤다.

그는 단 한 번도 장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막 혼인했을 땐, 해마다 연말이 되면 장부를 끌어안고 칭찬 한마디 해주길 기대하며 그를 찾아갔다. 그는 단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않았다. 혐오감을 전혀 감추지 못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돈 이야기가 저속해서 싫어하는 줄로 알았다. 그녀가 바보였다. 그렇게 영특하고 세상일을 다 꿰뚫어 보는 사람이 돈의 중요성을 왜 모를까. 돈을 혐오할 리가 있나…….

“어머니, 그는 나를 증오해요. 우리를 증오해요. 우리 돈을 증오해요.”

장 태태의 안색이 변했다.

“딸아,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많은 일이 떠올랐다.

그가 진왕(晉王) 곁에서 막 두각을 드러냈을 때, 한 번은 어사가 강씨 가문을 탄핵했다. 강가가 며느리의 혼수로 먹고산다고. 강환장이 후원에서 크게 취해서 미친 것처럼 울부짖으면서 욕을 해대던 광경이 눈앞에 선했다.

그때는 어리석게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사를 욕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를 욕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미칠 듯이 그에게 빠져 있었다. 그가 남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게 하려고 혼수를 변통해서 수많은 양전(良田)과 점포를 강가 명의로 사들이고 보란 듯이 키워나갔다.

이동은 가슴이 욱신욱신 아팠다.

“어머니,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 사람, 그 사람 나를 건드리지 않아요. 건드리면 닦고, 씻어요…….”

이동은 눈앞에 피처럼 붉은 비단 이불과 휘장을 바라보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마음이 거북하면서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세세한 일들이 다 떠올랐다.

“어머니, 그 사람 나를 혐오하고 우리를 증오해요.”

“그럼 너…… 아직 깨끗한 몸이니?”

장 태태의 손가락 끝이 서늘해졌다.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어머니도 그 사람이 속셈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장 태태는 혼란스러워졌다.

“어머니, 혹시 그 사람이 저더러 살림을 맡으라고 하면……. 그 사람은 겉으로는 저를 존중하지만, 속으로는 저를 강가 사람으로 보지도 않아요. 진정한 강가 사람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고요. 원하면 저는 아이를 못 가지게 할 수도 있겠죠. 첩을 들이면 되니까요. 자기 마음에 드는, 서생 가문의 가난한 여인을 들이겠죠. 그 사람 외사촌 고 낭자처럼요. 자식은 첩들에게서 얻고, 나는 그저 강가의 금고로 여길 거예요.

나와 혼인한 이유가 바로 이씨 가문의 돈 때문이었어요. 강가를 위해 일하고 돈을 벌어줄 사람, 강가를 부귀하고 영광스럽게 키워줄 사람, 그가 출세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 그걸 위해서 날 소처럼 부려 먹을 거예요…….”

힘겨웠던 몇십 년을 떠올린 이동은 괴로움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몸을 기대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꾹 다문 장 태태의 눈빛이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솔직히 이 어미에게 말해라.”

며칠 전 만월연(滿月宴: 한 달째에 여는 연회. 보통 출산 한 달째 아이를 선보이는 연회)때만 해도 딸의 눈엔 강환장밖에 없었고, 강환장의 미소 한 번에 빛이 날 정도로 행복해했다. 그런데 오늘 딸이 말하는 강환장은 부모를 죽인 원수 같았다. 분명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이동은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영명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머니, 수련을 불러주세요.”

장 태태가 수련을 불러들이자, 이동은 머리에 묶은 면포를 풀라고 지시했다. 자기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번엔 분별없이 그냥 참았다. 강환장이 싫어할까 봐, 어머니가 너무 걱정해서 쓰러질까 봐,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수 없으니 그냥 버티고 참았다. 그렇게 한평생 통증이 남았다.

장 태태가 놀란 얼굴로 그녀의 머리 위 피 묻은 상처를 바라봤다.

“어머니, 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아요.”

이동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늘에 붕 뜬 기분이었어요. 주변이 조용한데, 강환장이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어요. 뭐라고 했냐면, 이 여인이 죽더라도 4, 5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어요. 지금 이 여인이 죽으면 강씨 가문의 돈더미가 다 사라진다고. 강가가 몇 대는 먹고살 돈더미가 다 사라진다고요.”

장 태태는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어머니, 전 정신 차렸어요. 그땐 뭐에 홀려서 눈이 멀었었어요. 어머니도 절 말렸었잖아요. 강가가 너무 가난하고, 강환장이 속셈이 너무 깊다고요……. 어머니, 저 너무 후회돼요.”

이동은 피를 철철 흘리듯이 후회라는 말을 내뱉었다.

장 태태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 당시 혼삿말을 넣으러 왔던 사람 중에 제일 마음에 든 상대는 강씨 가문이 아니었다. 딸이 강환장을 마음에 들어 했고, 어떻게든 혼인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혼인한 지 고작 한 달 만에 딸이 이렇게까지 후회하고 증오하다니!

장 태태는 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물을 철철 흘리는 이동의 눈빛이 몇십 년이나 나이 든 것 같아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사랑이 깊을수록 한이 깊은 이치를 그녀가 모를까.

“딸아, 그만 울고 어미의 말을 들으렴. 강환장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지 않니. 아까 네가 들었다는 그 말도, 네가 정신이 없어서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단다.”

“어머니!”

“안다, 알아. 진정해라.”

다급해 보이는 이동의 모습에, 장 태태는 서둘러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어미 말을 들어라. 진짜로 여기지도 말고, 또 다 가짜라고 여기지도 말아라. 이 일은 진위를 구별하기 어렵단다. 하지만 어떤 사람인지 분간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려고 들면 똑똑히 보인단다.”

이동은 한시름 놓고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머니를 쳐다보며 계속 말하길 기다렸다.

“첫째, 어미가 줄곧 가르쳐 온 것은?”

“내색하지 말 것이요.”

“옳지. 해야 할 일만 하면 된다. 저녁에 세자가 돌아오면, 그 계집애 둘이 어떻게 널 밀었는지 수련이 이야기하게 하렴. 사실대로 세자에게 알려주면 된다. 다른 건 말할 것 없고, 세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면 된다. 나는 바로 진 부인을 만나러 가마. 내가 가고 나면 그 아이들이 분명 사과하러 올 것이다. 세자가 보는 앞에서 두 사람을 만나라. 잊지 말아라. 대범해야 한다. 넌 다 좋은데 성질이 너무 급해. 여긴 친정이 아니다, 참는 걸 꼭 익혀야 해.”

“명심할게요, 어머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이동은 마음이 시렸다. 예전엔 참지 못해서 얼마나 당했는지 모른다. 이미 똑똑히 새겼고, 익혔다.

장 태태가 일어서는데 이동이 소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장 태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기분으로 가만히 소매를 뺐다.

“얘도 참, 갈수록 어린애가 되는구나.”

강환장이 서둘러 수녕백부로 돌아왔을 때, 장 태태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눈물을 훔치던 진 부인은 아들이 돌아온 걸 보고 대뜸 울음을 터트렸다.

“왜 이제야 돌아오는 게냐! 나랑 네 누이가 얼마나 핍박당했는지 아느냐!”

“장 태태가 심한 말을 하던가요?”

강환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누이가 잘못한 거라고, 굳이 직접 가서 사과하라지 무어냐. 혼자 넘어졌고, 네 누이는 잡아주려고 한 것인데, 호의로 한 일인데, 그게 잘못이 되다니. 그래, 우리가 남의 돈을 쓴 걸 어쩌겠니…….”

진 부인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곁에 앉은 강 대낭자와 강 이낭자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긴장해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 올케가 그렇게 심하게 넘어질 줄은 몰랐다. 그냥 넘어뜨려서 망신이나 조금 주려고 한 것인데…….

“어머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애지중지 키운 딸 아닙니까. 이 집에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이렇게 다쳤으니, 장 태태야 당연히 마음 아프겠지요. 말이 각박하게 나올 수밖에요. 인지상정입니다. 똑같이 구실 것 없습니다. 누이들이 잘못했든 아니든, 이씨가 손윗사람 아닙니까. 가서 사과 좀 한다고 안 될 게 무엇입니까. 심하게 다쳤는데, 정말로 일을 크게 키우면 우리 강가가 난처해집니다.”

강환장은 진 부인 곁에 앉아서 나긋나긋하게 설득했다.

“네가 날 다 위로하는구나. 우리 가문에서 가장 서러울 사람이 너인데! 이 어미는 그 애가 천한 상인 집안 출신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잠도 오지 않는다…….”

진 부인은 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빼어난 아들인데. 귀한 여인을 처로 맞이하고, 지위가 존귀한 처가가 뒤에서 밀어주면 벼슬길도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로울 텐데…….

강환장이 진 부인의 말을 잘랐다.

“어머니!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이씨에겐 이씨의 장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집안도 갈수록 좋아질 겁니다. 이제 제가 어머니 고생하지 않게 잘 모시겠습니다.”

“그 애에게 아도물 말고 또 뭐가 있다고……. 그래, 그래, 알았다. 더 이야기하지 않으마. 아완, 네가 아녕을 데리고 오라비와 함께 다녀오려무나. 내 딸들, 억울해도 너희가 좀 참아라. 오라비 체면을 생각해 줘야지.”

진 부인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서러움 당할 일 없게 하겠습니다.”

강환장은 잠시 더 위로하다가 일어서서, 뜨끔해서 간이 오그라든 강완과 강녕을 데리고 청휘원(淸暉院)으로 향했다.

강환장이 앞에서 가고, 강완과 강녕이 뜨끔한 마음으로 바들바들 떨면서 뒤따라갔다.

강완은 손에 든 손수건을 힘껏 비틀었다. 두 자매 모두 어머니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어머니는 쉽게 어를 수 있으니까. 큰 오라버니가 제일 무서웠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큰 오라버니를 속여 넘긴 일이 한 번도 없었고, 큰 오라버니는 몇 마디만 하면 모든 사실을 다 밝혀냈다.

이 정원 문을 나가면, 또 캐묻겠지.

벌써 정원 밖으로 나왔네! 어쩌지? 솔직히 이야기해?

그 천한 것이 너무 사납게 굴어서, 죽이진 못해도 껍질을 벗겨 놓고 싶었다고 어떻게 말해!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큰 오라버니를 속일 수 있을까? 말도 안 돼!

강완은 초조해져서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언니, 왜 그래. 서둘러. 오라버니가 저 멀리 갔잖아.”

강녕이 슬쩍 밀자, 강완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강녕의 말대로 두 사람은 어느새 오라버니와 훌쩍 떨어져 있었다. 강완은 잰걸음으로 달려가려는 강녕을 잡아당겼다.

“쫓아가면 안 돼! 멀리서 따라가자. 큰 오라버니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으면 어떡해.”

문득 깨달은 강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강환장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주춤주춤하며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청휘원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