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다시 태어나다
이동(李桐)은 벽을 향한 채 침상에 누워 멍하니, 붉은 휘장에 수 놓인 백자도(百子圖)를 바라봤다.
(※백자도: 많은 아이를 그리거나 수놓은 그림으로 자손 번영을 기원하는 길상도)
나는 분명 죽었는데? 그런데 눈을 떴더니 혼인해서 강부(姜府)로 들어온 지 두 달째로 되돌아왔어. 대체 어떻게!
관자놀이의 상처가 심하게 쿡쿡 쑤셨다. 피가 또 스며 나온 듯했다.
혼인해서 강부로 들어 온 지 두 달째라니…….
30여 년 전 일이라 다 잊은 줄 알았다. 그날의 광경이 어땠는지, 한순간도 흐릿해진 적 없이 지금까지도 강렬하고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상인 가문 여식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귀하기로 이름난 수녕백부(綏寧伯府)와 혼인을 맺고, 빼어난 풍채로 경성에 이름난 수녕백 세자와 혼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귀한 수녕백 가문이 지금 가진 것이라곤 전당표밖에 없을 정도로 빈곤해서였다.
대대손손 내려온 이 저택도 저당 잡힌 상태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제때 돈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이 저택은 반년 전에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대문 위에 걸린 수녕백부 편액과 등롱에 커다랗게 적힌 ‘강(姜)’자도 다른 이의 편액과 성씨로 바뀌었으리라.
이씨 가문은 그녀와 어머니, 단둘뿐인 외로운 집안이었다. 호주(湖州) 재물신이라 불리는 그녀의 어머니는 장사 수완이 매우 뛰어났다. 이동은 어머니를 따라잡을 수 없지만, 서무 처리, 장사 수완을 따지면 사내 중에 그녀보다 뛰어난 사람은 몇 없었다.
그녀는 그런 이가의 재산 절반을 들고 수녕백부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머지 절반의 재산도 거둬와서, 절동(浙東), 절서(浙西)에서 최고의 부자로 불리는 이가의 모든 재산이 그녀를 거쳐 모조리 강씨 가문의 것이 되었다.
이동은 텅 빈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30년 동안, 강가는 호화롭고 부귀해지고 그녀는 매일매일 숨도 돌리지 못하고 고생하며 바삐 움직인다. 멈출 수 없는 팽이처럼 뱅뱅 돌면서 애를 태우고 끓이면서.
이동은 견딜 수 없이 씁쓸했다. 하지만 눈시울이 버석 말라서 눈물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식을 한 명도 낳지 못했지만 슬하에는 아들 다섯, 딸 아홉이 있었다. 장자는 재난민을 구제하고 하도(河道)를 보수하여 큰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생모인 고 이낭의 봉작을 청했다. 그녀의 것과 똑같은 명부(命婦) 의복이 저택으로 하사되어 들어온 날, 그녀는 심신이 무너져서 쓰러졌다.
고 이낭은 아들 다섯, 딸 아홉 중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다. 고 이낭은 멋스럽고 우아했으며, 책을 많이 읽어서 매우 고상했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그녀의 글은 그녀의 성품처럼 세속을 벗어난 출중함이 있었다. 강환장은 고 이낭을 보고 있노라면 속세의 번뇌를 잊는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여전히 돈 냄새밖에 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대내내(大奶奶)!”
대시녀 수련이 가만히 불렀다. 이동이 천천히 돌아보자, 수련이 서둘러 다가와 부축해 일으키고는 뒤에 등받이를 대주었다.
이동은 수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련은 어릴 때부터 데리고 있던 아이로, 영리하고 신중하면서도 꼼꼼해서 계략도 참 잘 짰다. 강씨 가문으로 들어온 처음 2년 동안 수련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2년 후 겨울, 꽃병을 장식할 매화를 꺾으러 후원에 갔다가 실족해서 호수에 빠져 죽었다.
수련은 실수로 호수에 빠져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이동은 살림을 맡아서 너무나 바쁠 때였다. 수련의 죽음으로 가장 믿음직한 조력자를 잃었고, 그 후로 갈수록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당시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나중에 자리를 잡은 다음엔 알아내려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대내내, 태태께서 손 어멈을 보내셨어요.”
수련은 이동의 이마에 피가 어렴풋이 스며 나온 하얀 면포와 부어오른 한쪽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며 나지막이 고했다.
이동은 조금 멍해졌다.
그랬다. 전에는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다친 것을 감추고 손 어멈을 만나지 않았다.
“들어오라고 해.”
“대내내, 태태께서…….”
수련이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의미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태태가 알게 되면 몹시 마음 아파할 거란 말이리라. 낭자가 친정에 있었던 십여 년 동안엔 어딘가 부딪혀서 살갗이 까진 적도 없었으니까.
“불러와.”
이동은 양손으로 지탱하며 몸을 움직이고는 등받이를 더 가지고 오라고 눈짓했다. 왜 다시 살아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동안 겪은 모든 것이 황량몽(黃粱夢)이었을까.
(※황량몽: ‘메조 죽을 쑤는 짧은 동안 꾼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나타내는 말. 당나라 현종 때 여옹呂翁이라는 도사가 한단邯鄲의 주막에서 쉬고 있을 때 노생盧生이라는 젊은이가 들어와 신세 한탄을 하다가 여옹의 베개를 베고 잠이 든다.
노생이 꿈을 꾸는데, 출세했다가 모함받아 좌천되어 다시 높은 벼슬에 오르고 또 모반 사건에 휘말려 자결하려다가 아내가 말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죄로 판명되어 다시 벼슬에 오르고 끝내 국공에 봉해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노환으로 죽는 꿈이었다.
주모가 끓이던 죽이 아직 다 끓지 않은 시간 동안 꾼 꿈에, 황망한 노생이 ‘어찌 꿈일 수 있는가?’ 하자 여옹이 웃으며 ‘인생지사 또한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
“낭자, 이게 무슨 일입니까.”
팅팅 부은 이동의 얼굴을 본 손 어멈은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손 어멈이 이동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수녕백 부인(夫人: 보통 2품 이상 남편의 아내, 봉작을 받은 제후의 아내) 진(陳)씨의 심복 오 어멈이 불쑥 뛰어 들어왔다. 오 어멈은 몇 걸음 만에 손 어멈을 앞질러서 웃으며 말했다.
“안사돈 어른이 사람을 보내셨단 말을 부인께서 듣고 얼른 가보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모르시겠지만, 우리 가문엔 법도가 많답니다. 사돈댁에서 오신 분은 먼저 부인에게 문안을 드리고 대내내를 만나러 오셔야 합니다.
이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죠.
일단 저랑 같이 가서 우리 부인께 문안부터 드리고 다시 오시지요. 얼마 걸리지 않는답니다. 대내내가 다쳐서 편찮은데, 걱정 끼치면 안 되잖아요. 지나치게 신경 쓰면 큰일 납니다. 마음을 편히 먹고 푹 쉬어야 해요. 손 어멈이 오지 않았어도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 안사돈 어른께 잘 설명하려고 하셨어요.”
오 어멈은 손 어멈의 등을 떠밀면서 이동에게도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손 어멈, 이따 다시 돌아올 것 없어. 돌아가서 어머니께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할 말이 있다고 전해줘.”
이동은 오 어멈을 상대하지 않고 허약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손 어멈에게 지시했다. 손 어멈은 등 떠밀려서 나가면서 걸음을 멈추지도 못하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수련이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저게 무슨 짓이래요?”
“강가 사람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일을 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암투하고 사람 해치는 일에만 신경 쓰잖아. 상대할 것 없어.”
지난 생에는 이 집안에서 어디에 말도 못 할 서러움을 무수히 겪었었다. 그걸 떠올린 이동은 잠시 분노하다가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한 걸 남 탓할 것 없어. 내가 어리석었던 탓이려니 해야지.
지금도 나는 그런 저급한 수단은 못 부리겠지. 하지만 저급한 수단을 너무나 많이 봐와서, 그런 수단으론 무너지지 않아. 어림도 없지.
“대내내는 좀 괜찮아지셨느냐?”
밖에서 초겨울에 얼기 시작한 눈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동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온몸이 굳었다. 그녀의 지아비, 수녕백부 세자 강환장(姜煥璋)이었다. 처음엔 빼어난 자태로 경성에 이름을 알렸고, 나중엔 문무를 다 갖춘 유능한 신하가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수녕백부를 수녕왕부로 바꾼 사내였다.
이동은 쥘부채를 들고 어두운 얼굴로 들어오는 강환장을 바라봤다.
30년 전엔 이렇게 생겼었구나.
거의 잊고 있었다.
이렇게나 눈부신 사람이었구나. 과연 용모는 반안(潘安)을, 재능은 자건(子建)을 뛰어넘은 미남자라고 불릴 만했다.
(※반안: 중국 4대 미남. 초나라 송옥, 서진 반안, 위개. 남북조 시대 북제의 난릉왕 중에서 반안이 최고 미남으로 손꼽힌다. ※자건: 조식曹植, 조조의 아들, 조비의 아우)
예전에 그녀도 한눈에 그에게 반해서 기꺼이 그를 위해서, 강씨 가문을 위해서 몇십 년 동안 소처럼 일하다가 마지막엔 마음부터 얼어붙고 그다음에 몸이 죽는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강환장은 침상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화가 난 듯 빤히 보는 이동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 눈빛…… 예전에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토록 불손했었나?
이동의 부어오른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강환장은 은근히 마음에 걸려서 금세 고개를 돌렸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땐 한겨울이 지나 초봄이 된 것처럼 목소리가 훨씬 온화해졌다.
“당신이 넘어져서 심하게 다친 일로 다들 놀랐소. 어머님은 몸져누우셨고, 아완(阿婉)은 당신 대신 아픈 게 낫겠다고 괴로워하고 있소. 앞으로 조심하시오.”
이동은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살며시 ‘하’ 소리를 냈다.
“아완이 괴로워한다고요? 나 대신 아프고 싶다고요? 아완이 날 민 거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너무 살살 밀어서, 그 자리에서 날 죽이지 못한 게 괴롭다던가요?”
강환장의 표정이 굳더니 눈빛에 한기가 서렸다. 매서운 그 눈빛에 이동은 파르르 떨렸다.
이때부터 이 사람의 눈빛이 벌써 이렇게 매섭고 두려웠던가?
“넘어지더니 사람이 이상해졌군! 올케라는 사람이, 어찌 이런 말을 하나! 아완과 아녕(阿寧)이 얼마나 당신을 경애하는데.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푹 쉬시오!”
강환장은 곧바로 돌아서서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봤다.
“당신은 이제 이 집 사람이 되었으니 한마디 더 해야겠소. 당신은 강씨 가문의 여인이오. 아완과 아녕이 잘못한다면 그것도 강씨 가문의 잘못이며, 강씨 가문의 잘못은 곧 당신의 잘못이오.”
강환장은 휘적휘적 사라졌고, 이동은 온몸이 차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