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침묵이 흘렀다.
[제임스와 얘기 많이 했어요?]
[그랬소. 그렇지만 내가 무슨 도움이 되었을 것 같진 않소. 난 원래 여자에게 구애하는 법이 서투른 사람이라서.]
그가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애나는 혀가 굳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들은 난로에서 장작이 탁탁 튀기며 타는 소리를 듣고 서있었다. 한참 뒤에 칼이 말했다.
[마지막엔 조금 덜 초조해 하는 것 같았소. 얘기를 많이 한 것이 도움이 되었나 보오.]
[그랬을 거예요.]
애나는 뭔가 더 할말을 찾아 머리를 쥐어 짰다.
[배고파요, 칼?]
그의 머리 속엔 음식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야 언제나 배고픈 사람이잖소.]
[식사 준비는 됐는데 마지막으로 할 일이 조금 남았어요.]
[서두를 필요는 없소.]
[그럼 기다리는 동안 차나 한잔 마실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오.]
[장미차로 드릴까요?]
그녀는 칼의 목젖이 크게 솟았다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음. 좋소.]
[그럼 앉으세요, 내가 끓일게요.]
칼은 의자에 앉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간이 선반에서 찻잔을 꺼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사하기 전에 당신에게 찬장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난 상관 없어요. 날씨가 더 추워지면 달리 할 일이 없잖아요. 그때 만들어 주세요. 난 당신이 집안에서 일하는 동안 나무 냄새를 맡는 게 좋아요.]
[나무는 벌써 생각해 두었소.]
[그래요? 무슨 나무인데요?]
[옹이가 많은 소나무로 정했소. 옹이를 평평하게 잘라서 광을 내면 보석처럼 아름답지. 당신이 참나무나 단풍나무를 원한다면 말만 해요.]
그는 주전자를 들어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따르는 애나의 스커트가 바닥에 닿는 모양을 관찰했다. 그녀는 몸을 획 돌리며 말했다.
[오, 아니에요, 칼. 나도 소나무가 좋아요.]
하지만 그녀가 너무 빨리 도는 바람에 그릇에 담긴 뜨거운 물이 튀어 칼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가 움찔 몸을 비켰다.
[앉아요, 칼 뜨거운 차로 당신을 목욕시키지는 않을 테니까요.]
칼은 그녀를 위해 의자를 뽑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나는 곧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가 의자에 앉기를 기다렸다. 칼이 자리에 앉자 그녀가 그의 컵에 장미차를 따랐다. 애나에게서 희미하게 카밀레 향기가 풍겼다.
[컴프리차가 아니어서 미안해요. 당신이 컴프리차를 가장 좋아한다는 거 알아요. 굳이 그 차를 달라고 하지 않은 건 내가 다 뽑아 버려서 별로 남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밭에 심은 컴프리가 다 죽어도 상관없소. 숲에 가면 얼마든지 있으니 내년 봄에 옮겨 심으면 되오.]
[그래도 당신은 컴프리차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장미차도 그만큼 좋아하오.]
애나는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르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으로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차예요.]
그녀는 머그 잔을 들어올리며 건배를 청했다.
[장미차를 위해서.]
그가 자신의 컵을 들어서 애나의 잔과 부딪쳤다. 그는 첫날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장미차를 끓였었다.
[장미차를 위해서.]
칼이 따라 했다. 두 사람은 찻잔을 입술로 들어올리며 서로를 쳐다보다가 재빨리 외면했다.
[이 모든 걸 언제 다 준비했소?]
그가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애나는 어깨를 한번 들썩했다.
[꽃을 투박한 우유 병에 꽂으니 참 보기가 좋소.]
[고마워요.]
[식탁보도 멋지오.]
[고마워요.]
[그리고 커튼도. 당신과 커튼이 아주 잘 어울리는군.]
그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커튼과 똑같은 드레스라니, 생각하면 우스웠다.
[커튼에 숨으면 날 찾기가 힘들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똑같은 옷감이라도 당신이 입은 옷의 느낌과 커튼엔 큰 차이가 있소.]
망할 놈의 손 같으니라고! 어느새 그녀는 수줍은 여학생처럼 손으로 드레스 칼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겨우내 당신이 바지 입은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옷감을 사러 또 다시 읍내엘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소.]
[그럼 처음부터 내 드레스를 만들어 입으라고 사온 것이었군요?]
[난 당신이 그 옷감으로 커튼을 만든다고 해서 무척 낙담했소.]
[전부 다는 아니었어요.]
칼이 펜싱 선수처럼 팔을 뻗어 그녀에게 컵을 내밀었다. 그녀가 차를 더 따라 주었다.
[드레스가 정말 예쁘오, 애나.]
[그래요?]
새삼스러운 얘기를 듣는 것처럼 그녀가 반문했다.
[제임스의 바지들보다 훨씬 낫소.]
[그래도 난 그 바지에 많이 익숙해졌어요.]
[하긴 나도 바지 입은 당신을 보는 데 익숙해졌소.]
[놀리지 말아요, 칼.]
[내가 지금 놀리는 거요?]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
[이젠 내가 놀리는 것이 싫소?]
아뇨, 좋아요.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애나는 다르게 대답하며, 그가 자신의 눈에서 진심을 알아 주기를 바랐다.
[오늘 밤엔 내키지 않네요.]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할 일이 있어요. 당신은 내가 일하는 동안 앉아서 차 맛이나 즐기고 계세요.]
애나의 마지막 말은 자신 없게 사그러들었다. 지금부터 그가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볼 것이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그녀는 옻칠을 입힌 새 프라이팬을 꺼내어 난로 위에 얹었다. 우묵한 그릇과 거품 내는 기구를 집어 든 그녀는 계란을 깼다.
[계란은 어디에서 났소?]
[곰 때문에 에릭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던 날 케이트린이 주셨어요. 하지만 오늘을 위해서 아껴 두었죠.]
칼은 입을 다물고, 애나가 계란을 저어 거품을 내고 그 위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밀가루를 넣는 과정을 관찰했다. 애나는 그릇에 우유를 부으며 등뒤로 그의 시선을 느꼈다. 반죽 준비가 끝나자 그녀는 기름도 두르지 않고 프라이팬에 쏟았다. 마지막 순간 기름을 두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흘금 칼을 돌아보고 나서 얼른 버터 덩어리를 넣었다. 프라이팬에서 반죽이 지글거리기 시작했을 때 애나는 갑자기 발을 구르며 지하 움막에 보관해 둔 크랜베리 잼을 기억해 냈다
[오, 내 정신 좀 봐! 곧 돌아올게요.]
그녀는 선 짐승처럼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무거운 지하 움막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며 애나는 스웨덴식 팬케이크가 다 익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생각했다. 잼 항아리를 꺼내 들고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를 반긴 것은 고약하게 탄 냄새였다. 당황한 그녀는 주방용 장갑도 없이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잡는 바람에 손을 데고 말았다. 칼은 밖으로 나간 애나 대신 팬케이크를 뒤집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 결국은 팬케이크가 새카맣게 타도록 내버려 두었다. 프라이팬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집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턱을 떨구고 바닥의 프라이팬을 내려다보는 애나의 뒷덜미엔 가느다란 잔 머리가 삐져 나와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칼은 의자에서 일어나 프라이팬을 집어 들고 문 밖으로 나가 팬케이크를 마당에 던지고 돌아와 프라이팬을 다시 난로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애나의 두 팔을 가볍게 잡았다. 그녀가 울부짖었다.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이래요!]
[아니오, 애나. 커튼과 식탁 보, 그리고 이 드레스는 훌륭하게 만들었잖소.]
[하지만 이걸 보세요. 케이트린이 가르쳐 준 그대로 했는데, 이게 뭐냐고요. 나한텐 되는 일이 없나 봐요.]
[당신은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소. 열심히 노력하는데 안되니까 화가 나겠지 반죽이 남았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봐요.]
[뭐하러 요? 또 엉망이 될 텐데. 내가 하는 일은 정말로 되는 일이 없어요.]
칼은 자포 자기에 빠진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간단한 음식이지만 이것에 실패한다면 오늘 그녀가 온갖 정성을 들여서 시작한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는 애나가 다시 용기를 내어 시도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오늘은 놀리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 만든 건 당신 생각보다 쓸 만한 것 같소. 봐요, 나나가 먹고 있소.]
애나는 문쪽을 돌아보았다. 맙소사, 정말로 나나가 그들을 향해 서서 타버린 팬케이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애나는 미안함과 계면쩍음이 뒤섞인 웃음을 웃고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칼이 돌아가 식탁에 앉는 동안 그녀는 조심스럽게 반죽을 프라이팬에 넣었다. 두 번째로 구운 팬케이크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당신 것도 구워 와서 함께 듭시다.]
[하지만 뜨거울 때 먹어야 해요.]
[그럼 당신 몫을 굽는 동안 식지 않게 오븐에 넣어 두어요.]
[좋아요.]
예쁘게 구워진 팬케이크를 자랑스럽게 오븐에 넣고 또다시 반죽을 프라이팬에 떠 넣는 그녀의 뒤에서 칼은 수지 양초를 가져 다 꽃병 양쪽에 세웠다. 그녀가 접시 두 개에 담긴 팬케이크를 들고 왔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고 어둠이 깃 들면서 촛불이 영롱하게 빛났다.
[자, 당신이 만든 훌륭한 팬케이크를 봐요.]
칼은 애나가 맞은편 식탁에 앉자 상냥하게 말했다.
[오, 칼. 그런 말로 위로할 필요 없어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도 팬케이크 만들 줄은 안다고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 아니오.]
그는 언젠가 애나에게 심한 말로 상처 주었던 것을 후회했다.
[어쨌든 그 비슷하죠.]
애나는 자신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전혀 다르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다 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에 있는 것이 크랜베리 잼 아니오? 난 먹어 보면 안 되는 건가?]
[어머, 여기 있어요!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케이트린이 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