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할 필요없소, 애나. 커스틴은 나를 고집스러운 스웨덴사람이라고 불렀소. 생각해 보
니 정말로 그랬던 것 같소. 우리에겐 난로가 필요 없다고 난 줄곧 고집을 피웠잖소. 커스틴
과 나는 오랫동안 얘기를 했소. 우리에겐 난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가 깨닫게 해 주
었지."
그의 말을 듣는 애나의 가슴속에 응어리가 맺혔다. 칼이 사온 무쇠 난로는 그의 아내가 간절
히 원해서가 아니라, 상냥한 커스틴이 친절하게 일깨워 준 결과였다. 난로를 생각하며 품었
던 모든 즐거운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칼에게 무슨 말로라도 그 보복을 하
고 싶었다.
"당신이 정말로 곰의 배를 갈랐소, 애나?"
칼이 감탄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 순간이 너무 싫었어요! 앞으로 평생 동안 곰 냄새라면 맡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가 차갑게 대꾸했다.
칼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냉정한 태도에 매우 당황했다.
"미안하지만 그 냄새를 며칠 더 맡아야 할 거요. 내일은 제임스와 함께 뼈와 고기를 바를 생
각이니까 그런 다음에는 비계를 녹여서 겨울에 쓸 수지 양초를 만들어야 하오."
"그렇다면 통나무집을 완성하기까지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네요. 얼마나 더 걸려야
하죠?"
"내일은 곰 고기를 만져야 하고, 창문을 다는 데도 하루가 꼬박 걸릴 거요. 문을 달고 난로
를 설치하는 데 또 하루가 필요할 테고, 그 다음엔 지금 사는 집에서 물건을 옮겨야 하겠지.
새 침대도 엮어야 하고 당신에게 약속한 대로 찬장도 만들어야 하오."
애나는 담장에서 일어나 땅으로 내려서더니 불쑥 집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찬장은 그만두세요. 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판잣집에서 나오고 싶어요. 냄새 나는 벽난로
도 지긋지긋하고, 시커먼 토굴에서 두더쥐처럼 사는 것도 질렸다구요!"
칼은 어쩌면 저렇게도 순식간에 태도를 바꿀 수 있는지 당혹스러워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산책을 시작했을 때는 사랑스럽고 달콤한 분위기였는데, 담장에 앉아 있는 동안 돌변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가 가져다 준 꾸러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았다.
그가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애나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칼은 그녀를 품에 안고 이 지겨운 반목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침대 끝에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화해를 시도하며 속삭였다.
[애나, 내가 가져온 작은 꾸러미가 마음에 드오?]
[아, 그건 아직 시간이 없어서 못 열어 봤어요.]
차디찬 대답이었다. 칼은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려고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애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아직도 풍기는 칼의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비참한 마음으로 그의 곁에 누워서 청승맞게 울고 있는 올빼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애나는 더 이상 잠든 척하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돌려 칼처럼 등을 대고 누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에릭을 위해서 당신이 저녁을 준비했소?]
그 순간 애나의 심장 파장이 두 배로 뛰었다.
[에릭은 우리를 도와서 곰을 매달아 주었어요. 당연하잖아요?]
애나의 마음 속에 새로운 희망이 뭉실뭉실 피어 올랐다. 칼은 지금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뿌리를 내린 홉 덩굴.
다음 날 아침 칼은 제임스를 데리고 샘물 근처에서 곰과 사슴을 부위별로 자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애나는 떨리는 손으로 선물 꾸러미의 포장을 풀었다. 안에선 그녀가 바라던 물건들이 나왔다. 상쾌한 느낌을 주는 분홍색 체크 무늬 옷감과, 그에 어울리는 실 꾸러미, 그리고 카밀레 비누 한 장이었다. 비누를 코에 대 보니 상큼하고 여성스러운 꽃 향기가 났다. 체크 무의 옷감을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아 보니 옷감에서도 같은 향기가 났다. 그녀는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열린 문틈으로 새 통나무집을 바라보았다. 새로 사온 유리를 생각하며 그녀는 칼이 말한 '생필품'의 의미가 커튼의 재료를 말하는 것인지 생각에 잠겼다. 가끔 지나가는 너구리나 제비를 제외하면 이 외딴곳에서 누가 집안을 들여다본다고 창문에 커튼을 단담? 애나는 옷감을 사온 칼의 의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라 한참을 고심했다. 그녀는 옷감을 뭔가 사적인 용도로 쓰고 싶었다. 어젯밤 에릭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느냐고 묻는 그의 말투엔 분명 질투심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커스틴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가 난데없이 에릭을 질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향기 나는 비누는 부정할 수 없는 화해의 암시였다. 어쨌든 칼은 그녀에게 어쩌라는 것인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옷감을 안겨 주었다. 어쩌면 이것을 계기로 그녀와 칼 사이에 존재했던, 그리고 앞으로 있을지 모를 모든 불화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선물을 냉담하게 외면한 사람은 그녀였다. 그의 선물을 시큰둥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호의 자체를 무시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다시 화해의 손길을 내밀 때까지 그가 기다릴 수 있을까? 애나의 머리 속에 기발한 계획이 떠올랐다. 흥분된 마음으로 애나는 부드러운 체크 무의 옷감을 침대 위에 펼쳐 놓고 대충 길이를 재 보았다. 생각보다 넉넉했다. 커튼과 드레스를 모두 만들 수 있을까? 그녀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옷감이 넉넉하다면, 그녀는 걸어 다니는 커튼처럼 보일 것이다. 칼은 애나가 마당을 가로질러 새 통나무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새 난로를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다면 좋을 텐데...그는 새 난로를 그녀에게 선물하며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기대했다. 처음에 그녀는 무척이나 감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 정원에서의 그녀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그는 맨 처음 그가 마차에서 난로를 내릴 때 화 등잔만하게 커졌던 애나의 사랑스러운 갈색 눈을 기억했다. 하지만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녀의 목소리에선 냉기가 철철 흘러 넘쳤고, 자신의 선물이 아무런 마술도 부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손을 움직여 고기를 잘라내면서도 통나무집에 시선을 주며 애나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애나는 안에서 벽난로에 기대어져 있는 유리의 치수를 재고 있었다. 오두막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고기를 썰다 말고 고개를 쭉 내민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칼을 발견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살그머니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곧장 집안으로 들어와 커튼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칼과 제임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들어왔을 때, 분홍색 체크 무의 옷감은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창문 길이의 두 배가 되는 커튼을 잘라서 열심히 바느질을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다시 달콤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생필품 고마워요, 칼 멋진 커튼이 될 거예요.]
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커튼이라니? 사방에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 하지만 칼은 그 옷감은 드레스를 만들 거라는 말을 애나에게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창문 커튼으로 잘려진 옷감을 보며 또다시 그를 실망 시켰다고 자책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무거운 마음으로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겨울까지 계속해서 동생의 바지를 빌려 입은 애나를 지켜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눈이 내리기 전에 시간을 내어 읍내엘 한번 더 다녀오는 것이 좋을까? 칼과 제임스가 나가자마자 애나는 새로 만들 드레스의 본으로 쓰기 위해 갈갈이 잘라 놓은 헌 드레스 조각을 꺼냈다. 그녀는 옷감에 본을 대고 커스틴의 드레스처럼 목선은 높이고 소매는 헐렁하게 하고, 활동하기 좋도록 전체적으로 넉넉하게 드레스의 그림을 그렸다. 그날 오후 애나는 새 드레스 재단을 마쳤다. 그날부터. 애나는 새 드레스 옷감은 아래쪽에 감추고 칼이 들어오면 커튼을 바느질하는 척했다. 칼과 제임스는 곰과 사슴의 고기뿐 아니라 가죽도 손질했다. 칼은 제임스에게 일정한 두께로 비계와 근육을 잘라내고 가죽 뜨는 법과 나무에 걸쳐 팽팽하게 만드는 법을 보여 주었다. 칼은 날카로운 연장으로 가죽을 벗기면서 모피에 구멍을 내거나 모 근이 나타날 만큼 얇게 자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냄새가 고약하고 힘겨운 작업이었다. 무두질이 끝난 가죽을 냄새가 빠지도록 양잿물에 담그는 일까지 끝냈을 때, 칼과 제임스는 땀과 고약한 악취를 씻어내기 위해 어서 연못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애나는 함께 수영하러 가자고 칼과 제임스가 제의했지만 남아서 저녁을 준비해 놓겠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칼은 또다시 실망 감을 느끼며 , 어떻게 해야 예전처럼 즐거운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는 애나에게 옷감 속에 들어 있던 비누에 대해서 묻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목욕을 강요하는 느낌을 받을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서 칼은 카밀레 비누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애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선 희미하게 양잿물 비누 냄새가 났다. 새로 사온 향기 나는 비누 대신 그렇게도 싫어하는 수 제 비눗물을 아직도 쓰는 이유는 그에 대한 항변인 것 같았다. 다음 날에도 칼은 애나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뭐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일부러 그를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그 이유도 칼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칼은 벽을 도려내고 창문을 끼우기 시작했다. 유리크기와 창틀에 맞추어 정확하게 벽을 잘라내는 일은 퍽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너무 크게 자르면 기온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창틀이 일그러지기 쉬웠다. 첫 번째 창을 잘라낸 그는 집 근처의 침목이 깔린 오솔길에서 창틀로 쓸 어린 포플러 나무를 골랐다.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한 가을 날씨였지만 낮에는 태양이 제법 뜨거웠다. 칼은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도끼를 숯 돌에 갈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든 그는 애나가 샘터에서 나와 바가지를 들고 자신을 향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도끼 날을 갈며 도대체 그녀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그녀는 일부러 그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가끔은 그녀에게서 아주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전날 밤 침대에 들었을 때 먼저 등을 돌리고 돌아누운 사람은 애나 였다. 그는 애나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그녀는, 지긋지긋한 바지를 입고 물을 한 바가지 가득 담아 가지고 그에게로 오고 있었다. 칼은 시커먼 제임스의 바지를 입은 애나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 가까이 다가온 애나가 바가지를 내밀었다.
[자요, 칼. 햇빛이 뜨거워 당신이 목마를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그녀는 천진한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땀방울이 구슬처럼 맺힌 그의 이마를 쳐다보았다.
[고맙소, 애나 정말 목이 말랐소.]
그가 바가지를 들고 물을 마시며 말했다.
[커튼은 잘 되가오?]
칼이 바가지를 다시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네.]
그녀는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바가지 손잡이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빙빙 돌리며 대답했다.
[창문 만드는 일은 어때요?]
[잘 되고 있소.]
그는 웬 지 모르게 흘러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애나는 창틀 재목으로 잘라놓은 포플러 나무와 도끼를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포플러 나무로 창틀을 만들고 있소.]
그녀는 주변을 살피다 근처의 바위더미를 보더니 다시 물었다.
[잠깐 구경해도 돼요?]
그는 이게 또 무슨 심사일까 궁금하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날이 양쪽으로 나있는 조그만 손도끼로 나무를 다듬었다. 그녀는 굴뚝을 쌓고 남은 돌무더기 위에 앉아서 칼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순진한 표정으로 오도카니 바위에 올라 앉아있는 그녀를 의식하며 일하는 것은 몹시 불편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는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그는 표시해 놓은 대로 포플러 나무를 자르고는 애나를 쳐다보았다.
[포플러 나무는 아주 잘 쪼개져요. 가지가 자란 부분에 있는 옹이만 피하면 아주 평평한 판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 명심하면 되오.]
애나는 바위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한쪽 다리를 흔들었다.
[난 제임스가 아니에요, 칼. 판자 만드는 방법 같은 건 배울 필요가 없다고요. 난 그냥 당신이 일하는 걸 구경하러 왔을 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정말이오?]
칼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발을 흔들며 도발적인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그래요. 당신은 못 만드는 게 없네요. 난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무 다루는 걸 구경하는 게 좋아요. 어떨 때는 당신이 나무를 애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해요.]
칼은 새로 자른 판자가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아 갑자기 손을 뗐다. 애나는 가볍게 웃으며 좀더 편한 자세로 바위에 기댔다. 팔꿈치를 등뒤의 돌덩이에 기대자 그녀의 가슴이 유혹하듯 앞으로 튀어나왔다.
[당신의 어깨는 지칠 줄도 모르나요?]
[그렇게 보이오?]
[당신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지칠 줄 모르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 의아해요.]
그녀는 목덜미에 드리워진 머리채를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장난을 했다.
[남자라면 주어진 일을 해야만 하오.]
칼은 만들고 있는 송판에 집중하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절대로 불평하지 않잖아요.]
[불평한다고 좋아질 것도 없잖소? 여러 시간이 걸리는 일을 불평한다고 빨리 끝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녀는 칼의 근육이 육감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을 줄곤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불만이 없는 것 같아요.]
칼은 포플러 나무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고 기를 썼지만 자꾸만 거슬리는 느낌이 그의 일을 방해했다. 애나는 기어가는 벌레를 쇠꼬챙이로 살금살금 찌르며 노는 아이처럼 그를 자극시키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벌레처럼 안간힘을 썼지만, 이번엔 정말로 그녀의 의도가 분명한 화해의 몸짓이라고 여겨졌다. 그녀는 뒤로 깊숙이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평가하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도끼를 들고 움직이는 모습은 춤을 추는 것 같아요. 당신이 일하는 모습을 처음 보던 날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당신의 동작은 모두가 부드럽고 우아하죠.]
칼은 대답이 궁했다
[그건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비법이오. 나도 그렇게 하라고 제임스에게 가르치고 있고.]
그는 자신의 얼굴이 또다시 벌겋게 달아올랐음을 느꼈다. 그는 유혹적인 관찰자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도끼질을 계속했다. 이윽고 그녀가 한숨을 쉬고는 주먹을 쥐고 팔을 양 옆으로 주욱 펼치더니 육감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어머!]
기지개를 펴다 옆의 바위 하나를 발로 찬 그녀가 계면쩍게 후후 웃었다. 흔들거리던 돌덩이가 굴러 내리며 다른 바위까지 함께 무너뜨렸다. 애나는 일어서서 한쪽 무릎에 두 손을 짚고 가슴을 내밀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 이제 그만 내려가 보는 게...]
[움직이지 마, 애나!]
칼이 날카롭게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굴러 떨어진 바위덩어리 근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뚫어져라 한 곳을 바라보며 바로 옆에 놓인 도끼를 집어 들었다. 햇빛에 몸을 드러낸 방울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바위 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돌이 구르는 바람에 갑자기 노출된 것이다. 그제야 햇빛을 감지한 뱀이 순식간에 똬리를 틀고 세모난 대가리를 빳빳이 들어올리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칼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쳐다본 애나는 방울뱀이 단단한 꼬리를 흔들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샛노란 뱀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애나는 손발이 마비되고 뱃속이 졸아드는 느낌이었다. 그 다음 일은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나서 애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칼이 도끼를 집었고 다음 순간 방울뱀은 두 조각이 나서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애나는 진한 갈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징그러운 생물이 두 조각이 난 채 꿈틀거리는 광경을 보고 눈도 떼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뱀이 완전히 숨을 거두기 전에 칼이 달려와 애나를 끌어안고 바위더미에서 잡아당겼다.
[애나. 오, 맙소사. 애나.]
그는 애나의 뒷머리를 손으로 안고 머리채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그녀는 덜덜 몸을 떨며 흐느꼈다.
[괜찮아, 애나. 내가 죽였소.]
[도끼요, 칼.]
그녀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도끼로 죽였소, 울지 말아요, 애나.]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로운 애나의 비명 소리에 놀란 제임스가 언덕을 올라왔다.
[칼, 무슨 일이에요?]
[방울뱀이 있었어. 하지만 이젠 괜찮아. 내가 죽였다.]
[누난 괜찮아요?]
제임스는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응, 괜찮아.]
칼은 아직도 포옹을 풀지 않았다. 애나는 자신을 달래려는 칼의 품 안에 안겨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칼의 도끼에 대해 중얼거렸다. 칼은 그녀를 목재가 쌓인 곳으로 데려가 앉혔지만 그녀는 아직도 공포에 질려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당신의 도끼가...]
그녀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