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86)

"이제 나를 도와서 짐을 내려 주겠니? 아니면 누나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까?"

"제가 돕겠어요."

"밀가루 부대를 들 수 있겠어?"

"두고 보세요!"

그들은 밀가루 부대 사이사이에 조심스럽게 세워 놓은 유리를 내렸다. 소중하게 유리를 들어

올리며 칼이 말했다. 

"모두 다섯 장을 샀어. 문 양쪽으로 두 개를 달고, 나머지 벽마다 하나씩 달 생각이다. 그러

면 우리 땅을 사방에서 다 내다볼 수가 있잖니."

통나무집에 유리를 두고 나온 칼이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감자를 캤나 보더구나."

"네. 누나랑 제가 캤어요."

"그런데 누나는 어디에 있지?"

가슴이 유난히 콩닥거리는 것을 느끼며 칼이 물었다. 

"저녁 식사 준비 중이에요."

칼은 뭐라고 할말이 없어서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 마차 짐칸으로 뛰어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이 자루 내리는 걸 좀 도와 줘 . 이건 금세 먹어야하니까 작은 집으로 가져가야

 해."

제임스는 아래에서 자루를 잡아당기다 자루 뒤에 숨겨진 기다란 나무 상자를 보았다. 상자에

는 '뉴 헤이번 무기 회사'라고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두 번째 자루를 치우자 '코네티컷 주,

 노르위치'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자루를 들던 제임스의 손이 멈추더니 시선이 상자에

 꽂혔다. 칼을 올려다보는 제임스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남자는 자기만의 총이 있어야 하는 거야."

칼이 간단하게 말했다

"자기만의 총이라구요?"

"왜, 네 생각은 다르니?"

"아…… 아뇨."

제임스는 상자를 만져 보고 싶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시선을 이러저리 

옮겼다. 

"사용하는 사람의 몸에 맞도록 손으로 깎은 호두나무로 개머리판을 만든 제품이야. 네 나이 

또래의 소년을 위한 소형 장총이지."

"정말이에요, 칼? 정말로 제 거예요?"

"좋은 사냥꾼이 되는 법만 빼면 이제 더 이상 네게 가르칠 것이 없어. 이제 새로운 수업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겨울이 오고있거든."

제임스는 냉큼 총 상자를 품에 안고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마당을 가로질러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 칼이 내 총을 사왔어! 내 거야! 내 거라구!"

칼은 오두막의 문가로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애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밀

가루 부대를 어깨에 젊어지고 제임스가 사라져 들어간 문쪽을 향했다. 

제임스는 미친 듯이 칼이 자신의 총을 사다 주었다는 얘기를 큰소리로 반복했다. 애나는 동

생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거봐, 제임스. 내 말이 맞았지?"

그녀는 숨어서 칼과 제임스가 화해하는 과정을 모두 다 지켜보았다. 그들이 나눈 얘기는 굳

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훤한 대낮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는 그녀의 

가슴은 감동으로 터질 것 같았다. 

애나는 넓은 어깨로 햇빛을 가리며 문으로 들어오는 칼을 보았다. 이상한 느낌이 그녀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지금 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 건장한 체격

에 금발을 한 북유럽의 신이 천상의 선물을 짊어지고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갑작

스럽게 수줍은 생각이 그녀를 압도했다. 마음 같아선 그의 넓은 가슴에 뛰어들어 강인한 포

옹을 받고 싶었다. 

"안녕, 애나."

그가 조용하게 인사했다. 

칼은 자신이 이토록 애나를 그리워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막상 그녀를 대하고 있으려니 지난

 사홀 간의 공허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녀 역시 무척이나 긴장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듯했

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인사를 받았다. 

"안녕, 칼."

그는 언제까지 저렇게 문가에 서 있을 작정일까?

"드디어 집에 왔군요."

기껏 생각하고 한 말이 겨우 이게 뭐람.

"그렇소, 집에 왔소."

"제임스에게 총을 사주었다고요?"

"그렇소. 사내라면 자신만의 총이 있어야 하오. 그래서 최고의 제품으로 사왔소. 그런데 뚜

껑을 열어 볼 생각도 하지 않는군, 제임스, 연장실에 가서 장도리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상자

를 뜯어봐라."

"예, 알겠습니다!"

제임스는 칼을 문에 내동댕이치다시피 밀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난로 위에는 뭔가 음식이 끓고 있었다. 애나가 몸을 돌려 냄비 안을 휘저었다. 칼은 그제야 

들고 있는 밀가루 부대가 무겁게 느껴져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까운 그의 존재에 애나는 맥박이 빨라졌다. 바쁜 척 냄비 안을 젓던 그녀가 뚜껑을 덮고 

나서 말했다

"밖에 나가서 부대 밑에 깔 장작을 집어와야겠어요."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소."

"하지만 벌레들이 몰려들 거예요."

그녀가 문쪽을 향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까진 없소."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와 부드러운 말투에 그녀는 고집을 버리고 제자리에 섰다. 그녀가 돌아

서서 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색한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래 전 어

느 날의 장면을 연상시켰다. 

"마차에 아직 물건이 좀 남았는데 당신이 도와 주면 좋겠소."

칼은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 쪽을 미안한 듯 쳐다보았다. 

"아마 1분도 안 걸릴 거요."

애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획 몸을 틀어 밖으로 나갔다. 뒤에 남은 칼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나를 두려워하는 건가? 내가 가까이 갈 때마다 겁먹은 다람쥐처럼 도망칠 만큼 내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일까? 그녀를 괴롭힐 생각으로 내가 정말로 커스틴에게 도망쳤다고 여기는 

걸까? 그녀를 따라나간 칼이 마차에 오르려 하자 그녀는 멀찌감치 비켜섰다. 그는 마차 의자

 뒤편에서 꾸러미 하나를 꺼내와서는 그녀의 풍성한 머릿결을 내려다보며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당신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좀 샀소."

그는 애나가 눈을 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가 꾸러미

를 건네 주었다

"이 게 뭐예요?"

"생필품이오."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기쁨을 숨기지 않고 있을 그녀의 

표정을 마음 속으로 상상했다. 

애나는 너무 기뻐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선물을 준 적이 없었다. 칼 

역시 그것이 '선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새집의 부여에서 쓸 양념이나 그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촉감이 부드러웠다. 가운데가 접혀 있고 안에는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칼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시커멓고 무거운 쇳덩어리를 꺼내는 바람에 그녀는 생각에서 벗어

났다. 칼이 그 커다란 쇳덩이를 들고 통나무집으로 사라졌다. 칼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분

명 무쇠난로의 일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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