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86)

그의 오두막으로 이어지는 좁은 오솔길에 접어들자 칼은 마차의 속도를 늦추려고 했지만 빌

과 벨은 고집을 부리며 말을 듣지 않았다. 갑자기 트인 공간과 침목을 깔아 놓은 오솔길, 그

리고 아름다운 통나무집의 한구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애나와 제임스가 직접 참여한 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벽에 얌전하게 기댄 감자 주머니들도 보였다. 채소밭 옆의 풀밭에는 

고리 버들로 짠 바구니에 포도가 말려져 있었다. 판잣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하지만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마당을 다시 한 번 살펴보던 그는 샘터 움막이 사라진 것

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샘물가에는 예전처럼 양동이가 두 개 놓여 있고 반쯤 씻다 만 순

무가 담겨 있었다. 샘물이 솟아나오는 부분에도 전처럼 단지가 파묻혀 있었지만 나무로 지어

 놓은 움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낯선 냄새가 풍겨와 여러 번 코를 킁킁거리던 

칼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곰 냄새라고 판단했다. 말들도 그 냄새를 맡았는지 고

개를 흔들며 갈기를 휘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집에 다 왔어 너희들도 보면 알잖니."

통나무집 가까이에 마차를 세우는 동안에도 제임스와 애나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꿈 속에서

도 그리던 통나무집은 아무 변함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꿈처

럼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일은 이제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소년과 애나가 자신이 도착

하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을 텐데도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불길하게 여겨졌

다. 그는 고삐를 브레이크에 걸고 나서 떨리는 팔다리를 진정시키며 마차에서 내렸다. 

"너희들은 내가 짐을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려라."

말들은 어서 마구를 벗고 헛간에 가서 쉬고 싶다고 주인에게 힝힝거렸다. 

칼은 판잣집 쪽을 쳐다보았다. 제임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문 앞에 서서 그를 보고 있

었다. 칼은 소년을 발견한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자신을 보면서도 인사를 건네거나 달려오

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소년을 보니 죄책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침내 그는 먼저 손

을 올리고 말없이 인사를 보냈다. 제임스도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흔들어 주었다. 

"마차에서 짐 내리는 걸 좀 도와 주면 좋겠는데……."

칼이 외쳤다. 

제임스가 대꾸없이 조용히 그에게로 건너왔다. 마당을 차며 걸어오는 소년의 몸짓엔 마지못

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차 뒤로 와서 선 제임스는 가만히 칼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색해진 칼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져갔던 밀가루를 모두 빻아 왔다."

"잘됐군요."

제임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소년의 말투에는 예전처럼 열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올 겨울엔 밀가루가 아주 넉넉할 거야."

칼은 오래 전에 소년을 먹여 살려야 할 군식구라고 비난하던 때가 생각났다. 어떻게 그런 말

을 할 수 있었을까?

"잘됐네요."

"통나무집에 달 유리도 구해 왔지."

제임스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나도 보면 알아요.'하는 표정이었다. 

"여긴 그 동안 별일 없었니?"

칼은 오두막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

조금 간격을 두었다가 제임스가 다시 말했다. 

"우린 칼이 어제 올 줄 알았어요."

"밀가루를 빻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어. 방앗간이 성수기라 차례를 기다려야 했거든."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저렇게 화가 난 표정일까?'

"아, 그랬군요."

덩치 커다란 사내와 말라깽이 소년은 마주 보고 서서 가슴 속에 가득 찬 후회와 사랑의 얘기

를 꺼내고 싶었지만 누구도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자, 어쨌든 짐을 내려야지 ."

"네."

칼은 짐칸의 가리개를 내리기 위해 마차에 다가갔지만 그의 손은 받침대에 올려진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자신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처럼 마차의 뒷부분을 짚은 그가 슬며시 눈을 감았

다. 소년은 칼의 팔꿈치 곁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 미안하다, 제임스."

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드높은 가을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뭉게구름

이 바람결에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저도요, 칼."

제임스의 목소리가 변성기를 벗어난 것처럼 처음으로 굵직하게 울렸다. 

"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았어. 다 내 잘못이었지 모두 다!"

"아니에요. 제가 총을 빨리 잡았어야 했어요."

"총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었어."

"아니, 상관 있었어요. 저한테 가장 처음에 가르쳐 준 내용이었잖아요. 총을 다를 땐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재빨리 행동해야 한다구요."

"그날은 내가 잘못했다. 난 화가 났었어. 누나와의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니까 괜히 너에게 

화풀이를 한 거야."

"그래도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아. 정말 미안하다."

"이젠 됐어요. 더 이상 신경쓰지 마세요. 그래서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잖아요. 꼭 필요한 

부분이었어요."

"나도 배운 것이 있어."

칼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년의 커다랗고 진실한 초록색 눈동자를 쳐다보며, 자신에게 마지

막으로 손을 흔들어 주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네가 보고 싶었다, 제임스. 지난 사흘 동안 네가 보고 싶어서 혼났어."

제임스가 눈을 깜박이자 눈물 한 방울이 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소년은 아직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우리도…… 칼이 보고 싶었어요."

칼은 부서져라 움켜잡고 있던 판자를 놓고 소년을 가슴에 와락 끌어안았다. 제임스도 칼의 

몸을 안았다. 칼은 소년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누나 말이 옳아. 넌 내가 가르쳐 준 모든 것을 훌륭하게 해냈어. 어느 남자도 

너처럼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을 거야."

제임스는 칼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해서 마음을 괴롭히던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우린 칼이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어제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

어요. 총도 가져가지 않았잖아요. 자꾸만 살쾡이 생각이 났어요."

칼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올라프와 함께 갔다는 걸 알잖아."

그는 제임스를 안고 살며시 흔들어 주며 소년의 조그만 심장소리를 가슴으로 느꼈다.

"우리에겐 총이 있었어. 그리고 이렇게 없는 것이 없는 훌륭한 집을 두고 돌아오지 않을 사

람이 어디 있겠니?"

"다시는 떠나지 말아요, 칼. 전 겁이 났어요. 전……."

커다란 사내의 가슴에 몸을 맡긴 제임스는 말과 담배 냄새가 뒤섞인 그의 체취를 맡으며 안

정감을 느꼈고,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사랑해요, 칼."

소년은 뒤로 물러나서 쑥스럽게 땅을 내려다보며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칼은 제임스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도록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누구에겐가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남자는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 안 돼. 반드시 상대의 얼

굴을 쳐다봐야 해. 나도 널 사랑한다. 그 점을 절대로 잊지마."

마침내 두 남자는 함께 미소를 지었다. 칼 역시 소매로 자신의 눈을 훔치고 나서 마차로 돌

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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