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86)

"오, 제임스. 고맙다, 우리 아가."

애나는 동생이 콧물을 줄줄 흘리며 누나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보스턴 거리를 아장아장 걷던 

때부터 부르던 애칭을 부르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제임스는 누나에게서 아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자신이다 큰 남자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타고 있는 장작불을 쳐다보며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

었다. 

"누나, 그가 돌아올까?"

"물론 돌아오지. 여긴 그의 집이야."

"그런데 총도 가져가지 않았어. 우리를 위해서 두고 간 거야."

"오, 바보 같은 생각 마. 소나무 숲 속에 있는 살쾡이를 걱정하는 거라면, 올라프가 함께 있

잖니. 올라프가 분명히 총을 가져갈 거야."

"나한테 바보 같다고 하지만, 누나도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걸?"

"칼은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주의 깊은 사람이야. 내 말 믿어, 제임스. 살쾡이 따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니까,"

하지만 애나는 침대에 누워서 진하게 송진 냄새를 풍기는 소나무 숲과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를 살쾡이를 오랫동안 상상했다. 칼을 대신하여 숲을 살피는 것처럼 그녀는 상상 속의 

소나무 냄새를 조심스럽게 맡았다. 텅 빈 그의 베개는 반듯한 모양으로 그녀 곁에 놓여 있었

다 .애나는 베개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꾹 눌렀다. 칼이 방금 일어나서 나간 것처럼 보이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가 자신의 부정한 과거를 알고 난 이후 몇천 번도 

넘게 그랬던 것처럼 애나는 소리를 죽여 흐느끼면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칼. 미안해요. 나를 용서하세요."

오늘 밤엔 그녀의 바람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제발 그녀에게 가지 말고 내게 돌아와 줘요, 칼."

애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칼이 말의 갈기를 움켜쥐고 우는 꿈을 꾸다 깨었다. 그녀는 자

신을 고문하는 것처럼 또다시 마음속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녀는 깊은 잠에 빠졌다가 어느 한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앉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순간 제임스의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깼어? 밖에 누군가가 있어! 들어 봐!"

바짝 긴장하고 앉은 그녀는 문 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무문을 거칠게 긁

는 소리가 들렸다. 통째로 문짝을 삼키는 소리 같았다. 

"제임스, 이리 와!"

그녀가 간절하게 속삭였다 동생의 체온을 느끼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싶었다. 

"총을 가져 와야겠어. 칼이 말한 것처럼 내가 움직여야 해."

제임스가 바닥에 놓인 양동인지 그릇인지 모를 물건을 발로 차는 소리도 들리고 아까 칼이 

내팽개치고 떠난 총알 주머니를 들어 올리는 소리도 들렸다. 

"제임스, 총엔 이미 장전되어 있어! 칼은 언제나 총알을 넣어둔단 말이야. 오늘 곰을 쏘지 

않았으니까 아직도 총알이 장전되어 있을 거야!"

"나도 알아, 하지만 한 발 더 쏘아야 할 경우를 위해서 준비해두는 거야."

"오, 제임스. 너 정말 총을 쏠 생각이니?"

"모르겠어, 누나. 하지만 준비는 해야지. 칼이 그랬어."

문 밖에선 사람이 뭔가 육중한 물건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일까, 제임스?"

"아니야. 쉿!"

숨을 죽인 침묵 속에서 그녀는 문 밖의 빗장이 덜그덕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제임스, 빗장 끈이 안으로 잘 당겨져 있니?"

새로운 공포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만일 끈이 밖으로 나가 있다면 누군지 모를 침입자는 그 

끈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거운 빗장이 손쉽게 들어올려질 것이고, 그

들은 꼼짝없이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가 살금살금 문 쪽으로 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애나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생이 위험한 상대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팔다

리가 저려 왔다. 

"안에 있어."

제임스는 가만히 속삭인 후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위안이 된 그녀는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너에게로 갈 거야. 총을 이쪽으로 겨누지 마."

"걱정 마. 총구는 이미 문쪽에 대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잖아. 뭘 어쩌려고 그래?"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어. 혹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면 미리 알 수 있을 거야."

"문을…… 부순다고? 얼마나 큰 짐승일까?"

"내 생각엔 곰인 것 같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전엔 이 근처에 곰이 나타난 적이 없잖아. 그런데 왜 지금 나타난 

거지?"

"나도 몰라. 하지만 소리로 봐서 제법 큰 놈인 것 같아."

"쉬! 들어 봐, 이제 가려나 봐."

그들은 쿵쿵 마룻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틀림없는 곰의 을음소리를 들었다 와장창 질그

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졌다. 

"저놈이 샘터엘 들어갔어, 누나. 안에 들어가서 우리가 저장해놓은 음식을 먹고 있을 거야!"

"다 먹으라고 내버려둬 . 무슨 상관이야? 적어도 우릴 잡아먹지는 않을 거 아냐!"

"누나, 난 나가서 그놈을 쏘아야겠어."

"세상에, 무슨 소리야! 원하는 게 무엇이든 가져가라고 해. 하지만 넌 나가면 안 돼."

"칼이 그러는데 곰은 한 번 먹이가 있는 곳을 알면 분명히 다음 번에도 나타난다고 했어. 내

가 지금 쏘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또 올 거야."

"제임스, 제발 나가지 마. 오늘 총을 빨리 집지 않았다고 칼이 난리를 쳤던 건 잊어버려 .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구. 나한테 화가 나서 그런 거라니까."

"아냐, 나가야 해. 오늘 칼이 한 행동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밖에 있는 건 곰이 틀림없어. 

나중에 우리가 집안에 안전하게 있지 못할 때 또 나타나면 어떻게 해?"

밖에선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안 돼, 제임스. 가지마. 너무 어두워서 곰이 어디에 있는지도 보이지 않을 거야."

"달빛이 있는데, 뭐 ."

"아냐, 없어,"

"그럼 횃불을 만들자. 누나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칼이 만들어둔 횃불이 있어. 재가 든 양동

이 옆 구석에 세워 두었어, 얼른 가서 불을 붙여 가지고 와. 그리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누난 문을 열고 나가서, 내 바로 앞으로 횃불을 들이밀고 따라와. 그래야 곰이 누나를 보지

 못할 테니까. 첫 번째 총알을 발사하자마자 누난 횃불을 버리고 집으로 뛰는 거야, 알겠지?

"싫어, 안 해! 너도 나가지 말고. 난 그런 일은 하지 않겠어. 여기에 안전하게 그냥 있자구.

"누나가 싫다면 나 혼자서라도 나갈 저야."

아직도 아기인 줄만 알았던 그녀의 동생이 의젓하게 말했다. 

재임스의 목소리로 보아 단호한 결심이 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아, 횃불을 가져올게. 하지만 제임스, 첫 발에 곰을 놓치고 나면 너도 나와 함께 도망쳐

야 돼!"

애나가 부싯돌을 켜서 횃불을 밝혔다. 두 남매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서로의 얼굴을 가만

히 쳐다보았다. 

"우린 할 수 있어, 누나. 우리에겐 총이 있잖아."

"조…… 조심 해, 제임스. 총을 쏘자마자 도망치겠다고 약속해, 어서."

"알았어, 약속할게. 하지만 누나……."

"왜?"

"우린 도망칠 필요가 없을 거야. 그것도 약속할 수 있어."

애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묵직한 빗장에 연결된 끈을 들어올렸다. 될 수 있는 대로 소

리가 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삐그덕 소리가 났다. 가만히 문을 연 그녀는 밖으로 횃

불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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