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86)

이윽고 풀 죽은 목소리로 소년이 물었다. 

"오, 제임스. 너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 칼과 나 사이의 문제라구. 해결할 일이 좀 

있어서 그래."

애나는 부드럽고 염려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아까 칼은 나한테 화가 났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제임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나한테 화를 낸 거야."

애나는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칼의 화난 뒷모습을 떠올렸다. 멀어져 가는 그

의 뒷모습에 대고 그녀는 사과를 하고 싶었다. 심한 말을 해서 그를 화나게 만드는 대신 사

랑과 존경을 바쳐야 했다. 

"무엇 때문에?"

"너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할 수는 없어. 어서 저녁이나 먹자."

남매는 제대로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에게 가족이라는 단란함과 아

늑함을 알게 해 준 그의 존재와 빈자리에 대해서 그리움과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바라가 했던 일 때문에 화가 난 거지?"

"어느 정도는 그래."

"칼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제임스는 혼란스러운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칼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어. 우리엄마가 어떻다는 것 때문에 우리

를 나쁘게 생각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애나는 식탁 너머로 동생의 손을 잡았다. 

"오, 제임스. 네 생각이 맞아. 정말이야. 그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니야. 다 나 때문이야. 여

기에 온 뒤로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잖아. 요리도 못하고 옷도 엉망이고 

머리도 산발이고. 난 아내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어. 바바라는 내게 그

런 일들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지. 난 하느라고 하는데도 결과는 매번 엉망이잖아."

그녀는 다시 모닥불을 바라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았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녀가 칼

을 위해 한 행동들은 하나도 올바르게 끝나 주질 않았다.

"블루베리만 해도 그래. 난 그에게 정말로 블루베리를 따다 주고 싶었어. 그랬는데 결과는 

길을 잃어버려서 숲을 샅샅이 뒤지게 만들었고, 집까지 안고 오게 만들었고, 모기 물린 자국

에 약이나 발라 달라고 하는 꼴사나운 짓을 연출했어."

"하지만 그건 누나 잘못이 아니잖아. 그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야."

제임스가 열심히 위로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정말 나한테 화가 난 건 단순히 그것 때문이 아닐 거야. 나에 대해서 너무너무 실망

을 했겠지. 우리가 편지에 썼던 게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엔 실망감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내 보니까 안 되었던 거야. 그가 원하는 아내와 난 너무나 거리가 머

니까."

"하지만 처음엔 재미있게 잘 지냈잖아. 처음 하는 일이라 시간이 걸린다고 누나한테도 위로

했는걸, 뭐."

"그건 요한슨 가족이 이사오기 전의 일이지, 커스틴이 오고 나서부터는 우리 집에 있는 것보

다 그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했어."

"그건 아니야, 누나. 정말로 아니야."

"커스틴은 무엇이든 할 수 있잖니. 블루베리 파이도 맛있게 만들고 나처럼 빼빼 마르지도 않

고, 금발에다 머리도 예쁘게 땋았고 스웨덴어도 할 줄 알아."

제임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생각 때문에 누나가 그렇게 발끈한 거야? 아이, 참. 그렇지 않아. 누나 없이 우리끼리

 그 집에 갔을 때 칼은 그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그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지

만 칼은 안 된다고 그랬단 말이야.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그랬어?"

애나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 그랬다니까."

그녀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거 봐. 처음으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서 근사한 저녁을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난 따뜻한 음식은커녕 숲 속에서 늑대들에 둘러싸여 울부짖고 있었어. 그날 저

녁에 그는 저녁도 먹지 못했다는 얘기야."

자신의 쓰디쓴 실패를 떠올리니 또다시 울고 싶었다. 

"칼은 저녁 식사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어. 난 알아. 우리가 집에 왔는데 누나가 없으니까 

칼은 몹시 걱정했어. 겉으로는 아닌척했지만 난 알 수가 있었다구. 누나를 찾느라고 통나무

집이랑 헛간이랑 다 뛰어다녔단 말이야. 누나는 나타나지 않고 날은 자꾸 어두워지고, 난 그

러다 칼이 또 우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

"또 울다니?"

애나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동생의 말을 끊었다. 

"어, 아니야."

제임스는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떨구며, 바지에 떨어져 말라붙은 그레이비 소스를 

문질렀다. 

"칼이 우는 걸 전에도 봤다는 말이니?"

"신경쓰지 마, 누나."

그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더 세게 얼룩을 문질렀다. 

"언제?"

그녀가 다그치자 제임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칼은 내가 자기를 본 줄도 몰라. 그러니까 나도 누나한테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아."

"제임스, 나한테 얘기해야 돼. 칼하고 나 사이에는 복잡하게 얽힌 사연이 많아. 서로에 대해

서 잘 모르면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니? 어쩌다 서로를 울게 만들었는지를 알게 되

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제임스는 아직도 미진한 표정이었지만, 잠깐 생각하는 눈치더니 누나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헛간에서 일하고 있는 나한테 와서 바바라가 재단사였는지 단도 직입으로 물어 보던 날 바

로 그날 밤이었어. 칼이 물었을때 난 아니라고 대답했어. 그랬더니 처음에는 바바라가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 보려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나한테 벨의 발굽 청소를 잘했다고 칭찬해 주

고는 나가 버렸어. 누나, 난 얘기 안 했어, 정말이야. 그날 밤 늦게 침대에 누워 있다가 칼

이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어. 난 누나가 얼마나 바바라의 직업을 싫어했는지, 그리고 나

 때문에 누나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했다는 걸 칼에게 내 입으로 설명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를 따라 나갔는데 얘기할 기회를 잡지 못했어. 칼은 헛간에 서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울기 시작했어. 빌의 갈기를 붙들고 얼굴을 파묻은 채우는 소리가 들렸어. 그래서……

."

조그맣게 속삭이던 제임스의 목소리는 불씨가 꺼지듯 잦아들었다. 소년은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괜시리 문질렀다. 

"난 남자가 우는 걸 처음 봤어, 누나. 남자들도 우는지 몰랐다구. 내가 보았다는 말 칼에게 

하면 안 돼, 알겠지?"

"그래, 안 해. 약속할게."

애나는 동생의 손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칼은 분명히 커스틴보다 누나를 더 좋아해. 안 그렇다면 왜 누나 때문에 울었겠어?"

"글쎄, 모르겠다."

그녀는 잠시 동안 상념에 잠겼다

"어쨌든 커스틴은 아주 예뻐. 게다가 칼이 원하는 대로 몸에 살집도 있고."

"누나도 예뻐. 칼이 누나랑 커스틴을 비교한다면, 그건 칼이 잘못하는 거야!"

애나는 지금까지 동생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동생이 칼

을 하도 따르고 숭배하는 것 같아서 누나에 대한 애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막다른 곳에 이르자 동생은 누나를 위해서 언제든지 칼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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