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86)

칼은 유난히 커스틴에게 자주 눈길을 주었다. 지금까지 그는 요한슨 가족과 그녀를 별도로 

떼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애나의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듣고 나니 새삼스럽게 그

녀가 눈에 들어왔다. 커스틴은 엄청난 식욕으로 음식을 더 꺼내 오게 만든 동생의 머리털을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금발이 영롱하게 불빛에 빛났다. 칼은 

애나의 비난대로 자신이 커스틴의 여성스러움에 끌린 적이 있었는지 반문했다. 

그에게 옆모습을 보인 채로, 음식이 담긴 나무 그릇을 가져와 식탁에 올려놓는 그녀의 풍만

한 가슴이 불빛에 확연히 보였다. 고개를 돌리던 커스틴과 시선이 마주친 칼은 고개를 숙이

고 다시 음식 먹는 데 열중했다. 

식사가 끝나자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며 사내들끼리의 느긋하고 편안한 시간을 즐겼다. 향긋

한 담배 연기가 오두막을 희미하게 채우는 동안 여자들은 설거지를 하고 싸리채로 만든 비로

 바닥을 쓸었다 말소리가 뜸해졌다. 케이트린과 커스틴, 네다는 동시에 앞치마를 벗었다. 하

루를 마감하는 늦은 밤이면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도 저들처럼 앞치마를 풀고 잠자리에 들 준

비를 했다. 커스틴의 앞치마처럼 그들의 앞치마도 언제나 깨끗하고 풀이 빳빳하게 먹여 있었

다. 

"아빠, 칼이 담배 연기에 완전히 절었겠어요. 제가 함께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좀 마시게 할

래요."

칼은 소스라치게 놀라 커스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단둘이 있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

도 없었다. 새삼스럽게 그녀의 존재와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 지금, 그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나가요, 칼. 새로 만든 거위 우리를 보여 드릴게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말하며 어깨에 숄을 걸치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칼도 따라나가는 수밖

에 없었다. 

그는 속으로 낭패감을 느끼며 그녀의 뒤를 따라 새로 만들었다는 짐승 우리로 걸어갔다. 밤

하늘이 군청색으로 서늘하게 일렁거렸다. 

"애나는 좀 어때요?"

커스틴이 거두 절미하고 말을 꺼냈다. 

"애나? 오, 애나는 그냥 잘 있소."

"애나는 그냥·잘 있다구요? 칼, 당신의 집은 여기에서 마차로 30분도 걸리지 않아요. 겨우 

30분을 벌겠다고 이렇게 늦은 저녁에 우리 집에 올 필요는 없었죠."

"그건 그렇소."

그가 솔직히 인정했다. 

"그림 제 생각이 옳았군요. 애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별로 잘 있지 못할 거예요."

커스틴이 조용하게 얘기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위들이 잠자리를 준비하느라 통통한 가슴을 지푸라기에 비비는 소

리가 평화롭게 들려 왔다. 거위는 한 쌍이었다. 칼은 거위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날갯깃 속

에 서로의 부리를 집어넣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 물어 볼 게 있어요."

커스틴이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물어 봐요."

칼은 거위 구경에 심취해 있었다. 

"날 좋아하세요?"

칼은 목 언저리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커스틴을 똑바로 쳐다보았을 때 그

의 얼굴은 이미 홍당무가 되었다. 

"아, 그렇소. 물론 당신을 좋아하오."

그는 달리 더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럼 다른 식으로 질문을 해야겠군요."

그녀는 안절부절못해 초점을 잃고 있는 칼의 눈을 침착하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날 사랑하나요?"

칼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대담한 여인과 이렇게 난처한 대화를 나누기는 처음이

었다 그는 커스틴의 감정을 상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커스틴이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활짝 폈다. 

"됐어요, 당신의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당신 자신 에게도 확실하게 답을 한 셈

이고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녀는 옆으로 돌아서서 담장에 팔을 올렸다. 

"내가 너무 무례했다면 용서하세요, 칼 하지만 확실히 해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오늘

 밤 식탁에서 당신은 날 전과 다른 눈으로 쳐다봤어요. 여잔 그런 걸 육감으로 알아차리죠. 

하지만 그것은 당신과 나사이에 뭔가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과 애나 사이에 문제가 생

겼기 때문이라고 짐작했어요."

"그 때문에 화가 났다면…… 미안하오, 커스틴."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칼. 난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어요. 상황이 달랐다면 난 당신의 시

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난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그 얘기를 꺼낸 것

이 아니에요. 당신과 애나 사이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얘기를 좀 해 보세요."

"우린 심하게 말다툼을 했소."

"그런 것 같았어요. 미안해요, 칼. 내가 너무 잘난 척을 하죠? 하지만 애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난 당신들 사이에서 이런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애나가 나한테 질투심을 

느낀다는 걸 알았거든요. 여자들은 그런 감정에 느낌이 아주 빨라요. 머지않아 당신과 애나 

사이에 한 번쯤은 그 문제가 대두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오늘 밤 당신이 들어왔을 때, 난 

'아, 그 일이 벌어졌구나' 하고 느꼈죠. 드디어 애나가 칼에게 뭐라고 했구나, 하고요. 내 

말이 맞죠?"

"그렇소."

그는 또다시 거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고집스러운 스웨덴 사람답게 집을 박차고 나와서 이리로 온 건가요?"

커스틴이 그를 고집스러운 스웨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았다. 그녀 또한 스웨덴 사람

이므로. 칼은 그의 마음을 집어내듯 표현한 커스틴의 말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는 한숨을

 쉬고나서 대답했다. 

"난 지금 애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요. 조금 떨어져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소."

"당신이 옳은 생각만 한다면 얼마든지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조금 전에 우리 집안에서 당

신이 했던 생각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난 내 얼굴에 그토록 생각이 드러나는지 몰랐소. 미안해요, 커스틴. 내가 잘못했소.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내 머리 속에 심어 준 사람은 바로 애나요."

갑자기 그가 말을 멈추더니 당황해서 변명을 시작했다. 

"내가 말을 서투르게 한 것 같소.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오. 커스틴, 하지만……

."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요, 칼. 이해해요. 애나에 대해서나 얘기해 보세요."

"애나와 내가 싸운 이유는……."

칼의 말꼬리가 홑어졌다. 

"나에게 다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애나가 뭔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눈치 했

으니까요. 당신이 그녀를 데리고 우리에게 처음 왔을 때부터 확연히 보였어요. 하지만 칼, 

그녀의 시각에서 한 번 우리를 보세요, 그날 우리 모두가 흥분해서 열심히 스웨덴어로 떠들

고 있을 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 우리가 한 얘기는 모두 그리운 고향과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얘기뿐이지만 그녀는 매우 

난감했을 거예요. 우리가 영어로 얘기했다면 그녀도 다 이해하고 넘어 갔겠지만, 그녀는 분

명히 소외감을 느꼈을 거예요. 그러다가 당신 집에 우리가 간 날, 난 애나에 대해서 좀더 많

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집안일이며 농장일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눈에 환히 보였어요. 엄마와 내가 그녀의 부엌에서 일하고 있

을 때, 애나는 자신도 우리들처럼 척척 능숙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눈치였어요. 잘은 

몰라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 온 가사일에 대해서 그녀는 별로 경험이 없는 것 같더군요.

"애나는 우리와 매우 다른 환경에서 자랐소."

"그런 줄 짐작했어요. 그녀가 입은 옷도 그렇고 말이에요."

"그녀는 보스턴에서 살았는데, 우리들처럼 다정한 어머니를 갖지 못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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