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86)

"그 사람에게 전갈을 보냈더니, 빨간색 이륜 마차를 타고 돈을 과시하면서 왔어요. 하지만 

난 죽고 싶을 만큼 그 사람이 싫었어요. 그날도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칼은 그녀가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 하라니까……."

그가 애나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의 팔이 애나의 턱에 닿았다. 칼은 가슴 깊이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우러나왔고, 고통스럽게 털어놓는 그녀의 고백을 듣고 싶지 않아 그녀의 등을

 자신의 가슴에 와락 껴안았다. 

"그가 제임스와 내가 살았던 유일한 그 집에 방 하나를 달라며 돈을 내고는 나를 데리고 들

어갔어요. 난 그런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죠.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어요

. 난 혹시라도 운이 좋으면 마지막 순간에 기적이 일어나서 나를 구해주지 않을까 상상했지

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는 몸집이 크고 뚱뚱했어요. 끈적끈적 땀이 밴 손으로 나

를 잡고는 처녀와 함께 한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얼마를 줄 것인지 게걸스럽게 

떠들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애나, 그만. 제발 그만 해! 왜 계속하는 거요?"

"당신도 알아야 하니까요. 내가 허락한 일이기는 하지만 좋아서 한 짓은 아니었어요. 내가 

그 짓을 얼마나 죽고 싶을 만큼 싫어했는지 당신도 알아야 해요!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혐오

스러웠다는 걸 당신이 알아야 해요. 일이 끝났을 때 난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난 그가 준 

돈을 집어들고 동생과 함께 당신에게로 왔어요.

이곳에 도착했을 때 당신은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처럼 보였어요. 난 또다시 공포스럽고 끔찍

한 일을 어떻게 견딜까 고민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전혀 달랐어요, 칼. 당신과 나눈 사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어요. 난 그날 나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당신에

게서 처음으로 배우게 된 거라구요. 내 말 믿어 줘요. 당신은 내게서 두려움을 없애 주었고,

 그 일이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 줬어요. 일이 끝났을 때,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너무나 안도했어요."

그들은 한참 동안을 침묵 속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칼의 팔은 아직도 애나의 가슴 위로 둘

러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머리 속에는 불쾌한 추억이 너무도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애나는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 나간 느낌이었다. 오두막이나 채소밭에서 고된 노동을 했을 때

처럼 나른했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어 칼의 단단한 팔뚝에 입술을 댔다. 그의 살결에 입술을

 대고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가.

마침내 터져 나온 그의 목소리는 낮고 피곤한 기미가 역력했다. 

"애나, 당신을 이젠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소. 하지만 당신도 나를 이해해야 해. 난 부모님

의 밑에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그 신념대로 살아왔소. 당신의 성장 과정과는 

많이 다를 거요. 내가 살던 곳에서는 당신의 어머니가 살아 남기 위해서했던 그런 행동도 용

납하지 않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것도 지금의 당신 나이보다 많았

을 때요. 지금 난 제임스와 당신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도 순식간에 알게되었소. 

그 모든 사실에 익숙해지려면 아직도 시간이 필요해. 당신에 대한 내 마음 속의 싸움을 정리

하다 보면 뭔가 해답이 나오리라 생각하오. 내게 시간을 줘요, 애나."

칼은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애나가 지금 막 그려 낸

 그림은 너무도 선연하고 상처가 깊었다. 그 그림은 칼의 상처를 또다시 헤집었고, 치유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제임스는 당신이 선량한 사람이니까, 모든 걸 한꺼번에 솔직히 털어놓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 하지만 제임스는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그앤 착한 아이요. 당신이 그애를 데리고 온 날부터 난 그애가 있는 걸 한순간도 후회한 적

이 없소."

"당신이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하겠어요. 아직은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열심히 배울거예요."

그 순간 애나는 스웨덴 사람인 데다가 집안 일에 관한 한 못하는 것이 없고 금발을 단정하게

 땋아 내린 아름다운 커스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순결한 아가씨

였다. 

칼이 애나를 데려오지 않고 단 몇 달만 더 기다렸더라면 그는 바라던 대로 완벽한 아가씨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으리라.

그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열심히 노력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벌써 많은 것을 배웠잖소. 제임스만큼 열심

인 당신을 내가 왜 모르겠소."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

대답 대신 칼은 그녀의 팔을 한 번 세게 잡았다 놓고, 팔을 풀었다. 

"이제 그만 자는 게 좋겠소. 오늘은 정말로 긴 하루였소."

"알겠어요."

그녀가 순순히 대답했다

"이제 그만 누워서 자도록 해요."

그는 이불을 들추어 그녀가 침대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왔다. 

칼은 지난 며칠 동안 갑옷처럼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들었지만 오늘은 옷을 벗고 나서 침대

에 등을 대고 누워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애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면에 시달렸다. 모기에 물린 자국이 가려워서 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싸움

그 다음 날부터, 애나와 칼 사이에 완전히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안정

을 되찾았다. 보스턴 생활에 대해서 솔직 담백하게 고백하고 나자 애나는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덜어 버린 느낌이었고, 끔찍했던 기억도 서서히 지워질 채비를 차리기 시작했다. 하지

만 칼은 그녀가 한 얘기를 되씹어 보고, 받아들일 시간을 달라고 했으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애나와 제임스를 데리고 낚시를 갔다.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세

 사람은 칼의 예상대로 그럭저럭 유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애나가 모기에 물린 자국 

때문에 괴로워한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유달리 심한 가려움증은 전원생활에 익숙지 못한 동

부인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칼이 그녀를 달랬다. 전혀 면역이 되지 않은 도시인들에

겐 시골의 모기가 뿜은 독소가 굉장히 오래 가고 증세도 심했다. 시골 생활에 적응할수록 모

기에도 면역이 생긴다는 칼의 말도 애나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점심 때가 되자 그녀의 

피부는 옴이 오른 것처럼 지독하게 부풀었다. 베이킹 파우더로 만든 반죽을 붙였지만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오후가 되자 그녀의 피부는 하도 긁어 대어 껍질이 벗어지기 시작했다. 마

침내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는지 칼은 '두 개의 뿔'의 아내에게 무슨 특효약이 없는지 알아보

겠다고 인디언 마을로 떠났다. 

칼은 인디언 옥수수를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그는 옥수수 껌질을 벗겨 알갱이를 일일이 딴 

다음 맷돌에 갈고, 헛간에서 삽을 꺼내와 깨끗하게 물로 닦아냈다. 삽에 옥수수 가루를 담은

 그는 이글거리는 석탄 위에 올려놓았다. 가루가 톡톡 튀기 시작하자 그는 차가운 인두로 뜨

거운 옥수수를 눌러 고소한 냄새가 나는 기름을 짰다. 기름이 식자 그는 애나에게 발라 보라

며 가져왔다. 

하지만 칼은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등에 기름을 발라주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부탁을 하면서 애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등에 손이 닿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셔츠를 들어올리고 서서 그에게 등을 내밀자, 칼이 상처

에 기름을 바르며 얘기했다. 

"'두 개의 뿔'의 아내가 통카 여인에게 전하라더군. 다음에 블루베리를 따러갈 때엔 인디언 

담배를 물에 담가두었다가 그 물로 세수를 하면 모기들이 달려들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고 가

라고 말이오."

"통카 여인은 이제 다시 블루베리를 따러가지 않을 테니 그릴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지 그랬

어요?"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애나는 마음에도 없는 가시 돋친 말을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칼에게 인디언 마을까지 가서 옥수수를 가져와 기름을 만들어 주어 고맙다고 얘기했

다. 애나는 그가 별것 아니었다고 말하며 가볍게 키스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인디언들은 모르는 것이 없소. 그럼, 잘자요, 애나."

그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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