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86)

당신이 오기 전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

큼 괴롭단 말이오,"

애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을 물었다. 

"이젠 내가 떠나 주기를 바라나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소. 난 당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겠다고 맹세

했소. 그리고 그 맹세는 애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오. 당신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그 맹

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렇지만 지금은 당신을 소중하게 여길 수도 없

소. 난 갈갈이 찢겨 버렸단 말이오, 애나."

그녀의 이름이 처음으로 다정하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음을 길게 발음하는 그의 부름

은 예전처럼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당신이라는 사람이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런 일이 벌어

질 거라고 예상했어요."

"왜 편지에 미리 쓰지 않았소? 그랬더라면 난……."

"용서했을 거라는 말인가요?"

그들은 동시에 용서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힘겹고 멀게 느껴진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했을 거요. 그래도 모르겠소? 미리 알았다면 말이오……."

"아뇨, 당신은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당신은 그 정도로 마음이 넓지 못해요. 내가 창녀

의 딸이고, 돌봐야 할 어린 동생이 있다는 얘기를 편지에 적어 보냈다면 당신이 기꺼이 우리

를 데려왔을까요?"

그녀의 얘기를 듣고 나니, 칼은 자신의 반응이 어땠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칼, 이젠 우리가 살았던 보스턴에 대해서 당신에게 모두 얘기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난 듣고 싶지 않소. 이미 보스턴에 대해서라면 지긋지긋하게 들었소. 또다시 듣고 싶지 않

소."

"당신이 지긋지긋하다면, 내 심정은 어떨지 상상해 보세요."

"그렇다면 얘기하지 않으면 되잖소!"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우리 어머니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내가 실망한 사람은 당신이지 당신 어머니가 아니오, 애나. 당신이라고."

"하지만 어머니와도 얼마간 상관이 있어요. 나를 이해하려면 어머니에 대해서 알아야 해요."

그가 침묵을 지키자 애나는 그것을 수긍으로 받아들이고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얘기를 

시작했다. 

"어머닌 우리를 돌볼 시간이 없었어요. 우린 어머니가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실수로 태어

난 자식이었죠. 그녀의 직업에선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실수였어요. 그래서 그 사실을 언제나

 우리에게 상기시켰죠. 어머닌 우리를 새끼들이라고 불렀어요. '귀찮은 우리 새끼들은 어딜 

간 거야?'하고 말이죠. 그래서 모두들 우리를 '바바라의 새끼들'이라고 서슴없이 부르기 시

작했어요.

우린 감히 입 밖에 내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임스와 내가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짐

작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다르다는 얘기죠. 하지만 우린 상관하지 않았어요. 의지할 사람

은 우리 둘밖에 없다는 걸 진작부터 알게 되었죠.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써 주지 않으니까 

살아 남으려면 우리 스스로 버터야 했어요.

당신의 짐작이 맞아요, 칼. 그녀는 우리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어요. 손님들이 들으

면 안 된다는 것이었죠. 될 수 있는 대로 젊게 보여야 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테니까요

. 가끔 우리가 깜빡 잊고 엄마라고 부르면 호되게 야단을 쳤어요. 마지막으로 야단을 맞은 

건 아마 내가 열 살이나 열한 살쯤이었을 때예요. 그곳에 있는 여자들이 내 머리에 깃털을 

꽃아 주었는데 난 자랑하고 싶어서 그녀에게 달려갔죠.

그때 처음, 그 사람…… 사울을 만났어요. 내가 엄마를 부르며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남

자는 그녀와 함께 있었어요. 난 너무나 흥분해서 바바라라고 부르는 것을 잊어버렸죠. 내가 

그 남자 앞에서 엄마라고 부르자, 그녀는 화가 나서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를 묶어 놓았

어요. 그 사건으로 바바라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녀에게 자식이 두 정이나 있다

는 사실을 알고도 손님이 줄지 않았거든요.

그때부터 사울은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어요. 내가 자랄 때까지 지켜보며 기다렸다는 사실

을 난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알았어요. 그때부터 난 그를 피하기 시작했죠. 어린 여자애에게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남자들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 당신은 절대로 알 수 없

을 거예요.

그 즈음에 바바라는 그런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 두려워하는 병에 걸렸어요. 그녀의 병세는 

매우 빨리 악화되었어요. 유일한 재산인 외모도, 기력도, 손님도 순식간에 잃어버렸죠. 그녀

가죽고난 후에도, 그녀의 친구들은――그 사람들을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임스와 내가 그곳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했어요. 물론 잠잘 때뿐이었지만. 하지만 손님들

로 방이 꽉 찰 때는 우리를 내보냈어요. 그래서 성 마가 성당을 알게 되었어요. 달리 갈 곳

이 없었거든요. 거기에선 적어도 우리를 손가락질하거나 내쫓진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너

무 자주 찾아가니까 나중엔 성당에서도 받아 주지 않더군요.

우린 일자리를 찾아보았어요. 정말이에요, 칼. 난 그 여자들의 옷을 손질했어요. 그래서 재

단일과 바느질을 조금 배우게 된 거예요. 여자들은 내게 조금씩 대가를 지불했는데 넉넉하진

 않았어요.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재단사라고 말한 건 그나마 아는 것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에요.

내 드레스에 대한 당신 짐작도 맞아요. 그래요, 그 여자들에게 물려받은 옷이에요. 입을 옷

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난 그 옷들을 받았어요. 내가 왜 제임스의 바지를 자꾸만 입는지

 당신도 이젠 그 이유를 알겠죠.

제임스와 나는 정말로 이를 악물고 허리띠를 졸라했어요. 그러다 제임스가 소매치기를 시작

했고, 시장에서 음식도 홈쳐왔어요.

우리 형편을 잘 아는 그곳 여자들은 내게 함께 일을 하자고 조르기 시작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임스가 신문에서 당신의 광고를 본 거예요.

우리 인생에 처음으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죠. 당신이 정말로 답장을 

보냈을 때 제임스와 나는 우리에게도 뭔가 신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 남매는 내가 당신의 아내 자격에 전혀 못 미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 마음에 들도록 얘기를 지어내기로 했어요. 당신에게 오고 나면 사실이 밝혀지더

라도 너무 늦어서 돌려보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당연히 난 당신에게 동생 얘기를 꺼내는 것이 두려웠어요. 우리가 도착한 날, 당신이 한 말

이 있어요. 귀중한 음식과 옷을 축내는 군식구일 뿐이라고 말했죠. 내 생각도 바로 그랬어요

. 게다가 당신은 제임스가 부부 생활에 방해가 될 거라고 내게 암시했어요. 내가 살던 곳에

서 남자들은 모두가 은밀한 사생활을 원했어요. 제임스와 나는 제대로 걷기도 전에 그 사실

을 알았죠. 남자들이 오면 우리는 집을 나가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난 그애를 버려 두고 올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제임스를 데리고 오게 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당신이

 나의 여행 경비만을 보냈다는 점이었어요. 그애의 여비를 구할 길이 없었어요. 열세 살짜리

 사내아이는 옥수숫대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얼마 안 되는 옷가지도 금세 입을 수가 없

게 되었죠. 나는 그곳 여자들에게 물려받은 옷으로 근근이 지낼 수 있었지만 제임스에게 옷

을 물려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곳을 떠나려면 동생에게도 신발과 바지, 셔츠, 그리고

 여비가 필요했어요. 떠날 날짜가 다가와도 우린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죠. 그 사람은……."

애나는 말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람은 아주 부자였어요. 사울 말이에요. 그는 바바라가 죽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우리

를 주시했는데, 그 이유가 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애나는 잠옷을 내리고 가슴 앞에서 모아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옷을 올리고 단추를

 채웠다. 

칼은 그녀의 등뒤에서 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그의 손가락이 움푹 팬 그녀의 쇄골에

 닿았다. 

"애나, 그만 해요."

하지만 그녀는 얘기를 끝내야 했다. 칼이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면 그가 용서할 것이 

무엇인지 사연을 속속들이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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