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86)

매일 밤 애나는 부드러운 그의 애무가 그리워 한숨 지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과 날카

로운 신경을 진정시키며 따뜻한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손은 차갑기만 했다. 그

녀는 몸을 움츠리며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꾸짖었다. 

애나의 등에는 콩알 크기 만한 자국이 무성했다. 가운데는 하얗게 독이 올랐고 가장자리는 

발그스름하게 부푼 게 칼이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그가 차가운 반죽을 처음으로 바르기 시작

하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몸서리를 쳤다. 

"미안하오."

그녀의 벗은 등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오래 전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그는 잠옷에 살며

시 가려진 우묵한 그림자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주어진 일에만 열중했다. 눈에 보

이는 부분에 모두 약을 바르고 난 그는 애나의 머리채를 옆으로 밀치고 그 아래에 숨은 물린

 자국에도 약을 발랐다. 그는 배와 가슴이 이상하게 비틀리는 느낌을 참고 있었다. 

애나는 뒤로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채를 들고 나머지 부분을 드러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자신의 유혹적인 자세를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할까 상상했다. 애나는 자신의 생

각이 부끄러워 잠옷을 그러잡은 손에 더욱더 힘을 주며 가슴을 눌렀다. 

얼마 전만 해도 그의 관능적인 손길이 지나던 가슴이었다. 

목덜미에 난 그녀의 머리카락은 유난히 가늘고 곱슬곱슬했다. 애나는 언제나 머리를 내려뜨

리고 있었으므로 예전엔 알지 못했다.

"다 바르기는 했는데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겠소."

애나는 머리를 올리고 앉아 자신의 엉덩이 부근에 그의 허벅지가 닿는 것을 느끼며, 지금 칼

도 자신처럼 들끓는 감정을 경험하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아주 에로틱하고 숨 막히고 가슴 

떨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머리를 내렸다. 애나는 자신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여기에도 몇 군데 더 있어요. 컵을 이리 주세요."

그는 아무 말없이 그녀에게 컵을 건넸다 그녀와 손가락이 닿는 것을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는 애나가 잠옷을 허리까지 내리고 턱을 떨군 채 가슴과 배에 약을 바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굳이 앞모습을 보지 않아도 애나의 몸을 기억할 수 있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귀여운 빨간 머리 아가씨, 애나에게 열심히 편지를 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

다. 그녀를 만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애나가 저렇게 유혹적인 포즈

로 머리를 들어올리고 있을 때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맨살을 어루만졌을까 하는 생각

으로 자신을 괴롭혔다. 

그는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탐스러운 머리칼이 덮인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애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턱을 들어올리며 그의 손에 기댔다. 

그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몸을 돌리고 그의 팔에 안겨 용서를 빌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애나, 우린 얘기할 게 많소."

목이 메이는 듯 그가 속삭였다. 

"나도 이렇게는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눈물을 머금으며 그녀가 간신히 말했다. 

"나도 그렇소."

"그런데 당신은 왜 이러는 거죠?"

그녀는 울음을 참느라 숨을 죽이며,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난 잊을 수가 없소, 애나."

그가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잊고 싶지가 않은 거겠죠. 당신이 계속해서 기억해야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을 테

니까요. 그래야만 내가 과거에 잘못한 일을 항상 기억하게 만들 수 있겠죠."

그녀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내 행동이 그렇게 보이오?"

"그렇게 밖엔 생각되지 않아요."

한참 동안 장작불이 탁탁 튀기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나를 비난하는 거요?"

그의 질문에 애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에 잡힌 목덜미와 머리카락이 불타

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아니에요."

"내가 사실을 짐작하고도 그냥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소?"

"아뇨."

"난 그 생각을 내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무던히 노력했소. 하지만 지워 지지가 않소. 

깨어 있는 순간순간마다 그 장면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고 나를 괴롭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오."

"난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르겠소. 난 그런 것을 알 만큼 당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소."

"나도 잊지 못해요, 칼. 잊을 수가 없다구요. 그 일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무

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오."

"그래서 당신은 영원히 그 일로 나를 고문할 작정인가요?"

"당신은 내 아내요, 애나 내 아내라구! 난 당신이 깨끗한 여인이라 생각하고 데려왔소. 나보

다 먼저 거쳐 간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남자의 마음이 어떤지 알기나 하오?"

그가 애나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모멸감과 수치심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을 그 정도로 형편없는 여자

로 생각해 왔다. 

"남자들이 아니에요, 칼. 단 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화가 치밀었다

"단 한 사람이었다고? 지금 내게 단 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거요? 단 한 번의 번갯불로 내가

 쓰러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소? 그날 내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당신이 알아? 난 번개에

 맞은 느낌이었소. 내 몸뚱아리만 살아 있을 뿐이지 난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소. 난 완전히 

불타서 간신히 뿌리만 남은 고목과도 같아."

자신의 격렬한 감정과 싸우느라 그가 돌연 손을 뗐다. 

"칼, 당신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어요. 난……."

"내가 알게 될 거라곤 생각 못했소? 이제 와서 당신이 설명할 필요는 없소. 첫날밤 헛간에서

 내가 당신의 순결을 의심도 하지 않았을 때 당신이 얼마나 나를 바보라고 생각했을지 잘 알

고 있으니……, 풋내기였지. 서툴기 짝이 없는 풋내기 말이오. 난 그날 밤 우리가 본능으로 

서로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소."

애나는 참담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말을 믿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그랬어요."

"더 이상 내게 거짓말하지 마시오. 난 당신이 한 다른 거짓말들은 모두 용서했소. 하지만 이

번만은 용서하기가 쉽지 않군. 결국 용서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소."

"칼, 당신은 이해 못해요."

그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떨렸다. 

"그래 난 이해 못하오, 애나. 나는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것을 팔아 치우는 행위

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오. 난 수없이 반문해 봤소. 왜 애나가 그런 짓을 했을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그랬더라면 오히려 용서하기가 

쉬웠을 거요. 하지만 단순히 돈을 위해서 그 짓을 했다는 건……."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패배감에 젖어 다시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몹시 거칠었다. 

"그자는 당신에게 돈을 주었겠지, 안 그런가?"

그녀는 고개만 끄덕거린 뒤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그의 말투엔 혐오감이 역력했다. 

"당신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칼."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당신이 한 행동이지, 내 자신이 아니오."

그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는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회한의 피를 흐르게 만들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며 기다렸는데……. 나의 귀여운 빨간 머리 아가씨, 애나를 생

각하며 새로 지을 통나무집과 앞으로 다시는 외롭지 않을 인생을 생각하며 얼마나 행복해 했

는데……. 지금 내가 느끼는 처절한 외로움을 당신이 어떻게 알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