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86)

"그런데 칼에게는 상관이 있나 봐. 칼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누나와 매형 사이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문제없이 좋았을 거야.

칼이 우리 엄마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 때문에 누나를 탓하는 건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마

음이 넓은 사람이야. 언제나 그랬다구."

"칼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제임스?"

"우리 누나만큼 좋아해. 그는……."

소년이 칼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가정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야. 누나와 매형 사이의 문제

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서 해결되어 다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

"그럴 거야, 제임스. 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제임스는 그제야 소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얘기 들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누나를 찾으러 함께 와 준 것도 고맙고."

"바보 같은 소리."

"우리 누나를 찾았을 때 난 아마 바보같이 보였을 거야. 하지만……."

그는 어린아이처럼 누나의 등에 매달려 있던 자신의 모습을 네다가 어떻게 생각했을까 몰라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네다는 제임스가 누나의 등에 매달려 울었다는 사실을 잊게 해줄 멋진 얘기를 꺼냈다

"너 그거 알아?"

"뭘?"

"난 오늘 일어난 일이 기뻐."

"기뻐?"

"응. 깜깜한 어둠 속에서 너 혼자 우리 집에 왔잖아."

"별로 멀지 않아."

제임스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혼자서 어두운 길을 가려면 멀게 생각되는 법이야."

"그래서 기쁘다는 거야?"

"한 번 와 봤으니까, 다음에도 혼자 올 수 있을 거 아냐."

"그래도 돼?"

"물론이야. 칼과 애나가 함께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어. 그럼 모레 만나, 제임스."

그러고 나서 소녀는 마차에 타고 칼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는 가족에게 달려갔다. 

요한슨 가족이 떠나자 칼은 커다란 손으로 제임스의 어깨를 감쌌다

"오늘 밤 넌 남자답게 일을 해냈어."

"네."

마음 속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제임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침묵 속에 가만히 서서 멀어져 가는 등불을 바라보다 칼이 덧붙였다. 

"네다는 참 귀여운 아이야, 그렇지?"

"그래요."

제임스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하고는 궂은 일을 자청하고 나섰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엔 제가 나가서 벨과 빌을 돌보고 오겠어요."

"얼마든지 나처럼 거기에 가서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것만 약속하면 말이다. 누나가 싫어

할 거야."

"걱정 마세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래요."

"빗장 끈을 밖으로 내놓아 두마."

"안녕히 주무세요, 칼."

"잘 자라, 친구."

애나는 칼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난로 가 앞에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눈을 비비고 나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칼."

"애나, 잠이 깼군."

침대 곁으로 다가오며 그가 말했다. 

"잠이 깬지 좨 되었어요. 밖에서 당신과 커스틴이 스웨덴어로 속삭이던 때부터니까. 무슨 얘

길 나뒀어요?"

"당신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뭐라고요?"

"모기 물린 데에 베이킹 파우더를 개서 붙여 주라고 하더군."

애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난 언제나 문제만 일으키는 골칫거리예요. 이번에는 요한슨 가족에게까지 폐를 끼쳤군요."

"그들은 좋은 사람이오. 신경쓰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하지만 난 신경이 쓰여요. 어쩔 수가 없다구요. 난 애초부터 여길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랬나 봐요."

그녀는 옆으로 누워 침대 곁에 서 있는 그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칼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편으로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다

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일으킨 마음의 상처가 아프게 벌어졌다.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진실을 알기 전의 행복했던 날들로 시간을 되

돌리고 싶었다. 아주 간절하게.

"그런 생각을 하기엔 너무 늦었소. 당신 얼굴은 아직도 재투성이오. 잠들기 전에 세수라도 

해두는 것이 좋겠소. 당신을 위해 물을 데워 두었소."

그녀는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칼이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일어나는 것을 도와 주었다. 남을

 대하듯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를 고수하는 그가 야속하기도 하고,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

다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그의 심사가 섭섭해서 애나는 설움이 복받쳤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어둠 속에서 얼굴과 손과 목을 씻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담요 가리개 뒤에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담요 

자락을 잡으며 그녀는 칼과 함께 담요를 펄럭이며 헛간으로 뛰어가던 날 밤을 떠올렸다. 

가리개 뒤쪽에서 나오니 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킹 파우더로 약을 만들었소. 가려운 데에 효과가 있을 거요."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거울을 안 봐도 피부는 울퉁불퉁 엉망이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엉망진창이네요."

"자, 이걸 발라요."

"고마워요, 칼"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서 약을 얼굴에 발랐다.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그럴게요."

애나가 누워야 자신도 누울 수 있었으므로 칼은 어색하게 서있었다. 

그녀가 얼굴과 목 등 모기 물린 자리에 모두 약을 발랐다. 하지만 효과가 있으려면 약이 말

라야 했다. 약이 마르기를 기다리던 그녀가 등 가운데로 손을 뻗쳤지만 닿지 않았다.

"칼, 여기저기 안 물린 곳이 없네요. 거기 등 좀 긁어 주세요."

그는 애나 뒤에 걸터앉아서 그녀의 등을 긁어 주었다. 

"정말 대단하게 물렸군, 꼬마 아가씨."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 그의 손이 멈칫했다. 

갑자기 그녀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호칭에서 느껴지는 친근함이 한순간 가려움을 날려 

 보냈다. 

하지만 다시 가렵기 시작했다

"칼, 등엔 당신이 좀 발라 줄래요?"

그는 애나의 어깻죽지를 쳐다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정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침내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컵을 이리 줘요."

그녀는 컵을 그에게 전해 주고, 잠옷 단추를 푼 다음 옷을 내렸다. 맨 등을 그에게 내민 그

녀는 옷을 모아 가슴을 가렸다. 둘 사이가 멀어지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그에게 맨살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애나는 자신의 등의 모습이 어떨까 상상하며, 사랑이 가득한 뜨거운 손길

로 자신을 애무하던 예전의 그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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