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과일 파이를 두 접시나 해치우자, 케이트린은 깔깔 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파이를 좋아하나 봐요, 칼?"
그들은 린드스트롬 씨 대신에 벌써부터 칼이란 이름을 부르고있었다.
"파이는 우리 커스틴이 만든 거예요. 요리엔 일가견이 있는 아이죠."
케이트린이 자랑스레 얘기하자 애나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칼은 커스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하게 솜씨를 칭찬한 다음 요리를 다시 음미했다.
오랜만에 맛본 진미에 대한 보답으로 칼은 서슴지 않고 요한슨네 가족에게 그날 수확한 홉을
선물했다. 그는 바구니를 통째로 케이트린에게 건네 주었다.
식사가 끝나자 요한슨의 세 여인은 설거지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애나가 돕겠다며 따라나서
자, 그들은 펄쩍 뛰며 사양했다. 오늘 그들은 어디까지나 손님이므로 가만히 앉아서 얘기나
하라는 것이었다. 내일부터 당장 집 짓는 일을 돕겠다는 칼의 제의를 그들은 당연하게 받아
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일 일이고, 오늘은 잔칫날이라고 했다. 그들은 '스웨덴에서처럼 이
웃끼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칼이 요한슨네 통나무집을 짓도록 돕고 나
면, 다음 번엔 그들이 칼과 애나의 새집에 마루를 깔고 지붕을 얹고 다락 올리는 일을 도와
주겠다고 얘기했다. 칼과 애나와 제임스는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집 짓는걸 도우러 오겠다
고 약속하며 작별을 고했다. 케이트린은 오래도록 제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다 칼에게 스웨덴
어로 소리를 지른 뒤 활짝 웃었다.
"뭐라는 말씀이에요?"
애나가 물었다.
"내일 올 때 아침은 먹지 말고 오라는군. 내일 아침엔 스웨덴에서 가져온 크랜베리로 진짜
스웨덴식 팬케이크를 만들 예정이라면서……."
칼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은 애나에게 묘한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제임스가 한술
더 거들었다.
"이야, 신난다! 오늘 먹은 블루베리 파이만큼이나 맛있겠죠? 정말 맛이 끝내 줬어요, 그렇죠
?"
"바로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맛이었어."
"그렇게 맛있는 블루베리를 어디에서 구했을까요?"
제임스가 물었다.
"이 근처에 아주 많단다. 우리 땅에도 북서쪽으로 가면 굉장히 많아. 요즘엔 집을 짓느라 너
무 바빠서 가보지 못했는데 아마 지금쯤 잘 익었을 거다."
"우리 누나도 블루베리로 그렇게 맛있는 파이를 만들 수 있을까요?"
"우유로 만든 생크림이 없으면 비슷한 맛을 내기가 힘들 거다.
그동안 하도 염소 젖만 먹고 지냈더니, 진짜 우유가 얼마나 달콤한지 잊고 있었어 ."
"나나가 그 얘길 들으면 속상해서 가출하겠어요."
제임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나나가 영리한 염소이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닐걸,"
"내일 정말로 올 거예요?"
제임스는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려졌다.
"그럼, 물론이지. 스웨덴에서처럼 한마음이 되어서 협동하는 거야. 우리가 도와 주면 요한슨
네 사람들은 2, 3일이면 집을 완성할 수 있을 거다"
"2, 3일 만에요!"
제임스는 믿기지가 않았다.
"장정이 여섯 명에 마차가 두 대나 있잖아. 이스트가 부풀 듯 집이 지어질 테니 두고 봐라."
"너무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곳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좋아요. 아, 빨리
크랜베리를 맛보고 싶어요!"
"너도 좋아할 거야. 스웨덴에서 먹었던 것과 똑같을 테니까."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애나는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크랜베리로 만든 팬케이크가 얼마나
맛있든 간에 그녀는 절대로 좋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칼은 예외적으로 애나에게 말을걸었다. 침묵과 한숨 속에서 잠
드는 일이 지긋지긋해진 애나는 너무도 기뻤다.
"이웃이 생겨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오. 다시 스웨덴어를 쓸 수 있어서 더더욱 좋았소."
"네, 아주 좋은 사람들 같아요."
"난 아침 일찍 그들을 도우러 갈 생각이오. 당신도 함께 가겠소?"
애나의 마음은 다시 우울해졌다. 그의 말은 예전과 달랐다. '애나,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준
비를 해요.'라든지 '애나, 우린 내일 일찍 떠나야 하오.'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는 '당신도
함께 가겠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 한쪽에서는, 당신이 나 혼자 가서 잘난
친구들과 마음껏 당신네 나라말로 웃고 떠들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홀로 집에 남겨지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고, 벌써부터 동포 가족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보이는 칼을 자신의 눈 밖에서 그들과 함께 보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더더욱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물론 가겠어요. 스웨덴식 팬케이크와 크랜베리를 맛볼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죠"
칼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빈정거리는 투를 감지했지만, 요리라는 화제가 나오면 언제나 신경
을 곤두세우는 애나의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여겼다.
다시 한 번, 애나는 요한슨네 팬케이크가 아무리 훌륭하고 맛있더라도 절대로 칭찬하거나 맛
있게 먹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잠을 청했다.
전날 밤의 굳은 다짐에도 불구하고 요한슨 가족과 함께 한 아침식사는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는 점을 애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란과 우유를 적당히 넣고 진짜 버터로 구운 팬
케이크는 입에서 살살 녹았고, 크랜베리는 케이트린의 뛰어난 요리 솜씨에 힘입어 팬케이크
와 완벽한 맛의 조화를 이루었다. 스웨덴 사람들에 대한 애나의 불타는 질투심과는 별도로
그녀는 요한슨 가족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진정 쾌활하고 다정 다감한사람들
이었다. 다방면으로 솜씨 좋은 아가씨, 커스틴은 그야말로 매력 덩어리였다.
스웨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잘 웃는 점이라는 사실을 애나는 처음 알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웃음을 잃지 않았다. 스스럼없는 농담과 장난도 자연스러웠다. 중년 부부 사이에도 은
근하고 다정한 접촉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오갔다. 오누이 사이의 친근감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제임스가 곁에 있을 때면 괜시리 얼굴을 붉히는 네다는 계속해서 오빠와 언니들의
놀림감이었지만, 수줍은 소녀 역시 농담으로 맞받아 쳤다
금발의 거인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다. 칼이 도끼를 휘두르며 일하는 모습에
반했던 애나는, 다섯 명의 건장한 사내가 한꺼번에 나무를 베고 목재를 다듬고 운반하는 모
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올라프와 에릭, 레이프, 찰스, 칼은 환상의 팀이었다. 통나무집
을 짓는 이틀 동안 애나는 한숨도 쉬지 않고 놀라운 에너지로 일하는 스웨덴 사람들의 근면
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일사천리로 나무를 베고, 마구에 달아 운반하고, 목재로 다듬고, 쐐기 모양으로 끝을
잘라서 벽을 쌓았다. 어떨 때에는 통나무를 두 칸씩 쌓기도 했다. 칼이 굉장히 뛰어난 지붕
기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애나에게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그는 얇고 납작하게 잘라
놓은 삼목을 망치와 끌로 능숙하게 두들겨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하게 지붕 널을 이었
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 리에프의 솜씨도 칼과 비등했다. 지붕에 올라간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에는 그림처럼 가지런한 지붕 널이 자태를 뽐냈다.
에릭은 바닥에 나무를 깔았다. 향긋한 소나무를 재단하듯 잘라 마루를 만들었는데, 평평하게
다듬은 마룻바닥은 여러 해에 걸쳐서 대패질을 한 것처럼 매끄러웠다.
가장인 올라프는 가장 중요한 벽난로와 문의 위치를 정하고 그 부분을 세심하게 톱질했다.
제임스에게는 돌덩이를 운반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네다가 함께 그를 돕자 제임스는 힘든 줄
도 모르고 무거운 바위를 들어올렀다.
애나는 커스틴과 함께 진흙을 개었고, 케이트린은 식사 준비와 일꾼들에게 간간이 마실 물을
날라다 주는 일을 맡았다.
첫날의 일과가 끝나자 찰스는 조그만 바이올린을 꺼내와 연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주황
색 황혼이 깃든 숲을 배경으로 흥겹게 춤을 추었다. 올라프와 케이트린이 손을 마주 잡고 경
쾌하게 스텝을 밟았다. 커스틴과 네다도 오빠들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었다. 머뭇거리던 제
임스도 서툴게나마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