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86)

"매일 내가 물을 줄 거예요."

애나가 말했다. 

칼은 고개를 들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진지한 눈빛으로 그에게 약속하듯 다짐하는 애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 

"집으로 가져가는 동안 마르지 않게 이끼로 뿌리를 싸는 것이 좋소."

그는 애나의 간절한 눈빛과 마음을 무시한 채 이끼를 찾아 저 만큼 걸어가 버렸다

제임스가 바구니를 마차에 두고 돌아왔다. 

"다 팠어?"

"응, 칼이 도와 줬어,"

"매형이 심었을 때도 안 자랐다는 데 누나가 한다고 되겠어?"

제임스의 무심한 발언에 애나는 울고 싶었다. 동생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제임스가 칼에게 보이는 애정과 신뢰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비참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동생이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제임스는 부쩍 칼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예전처럼 어

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기분을 북돋아 주거나 위로하는 법이 드물었다. 

칼이 이끼를 걷어 가지고 돌아와 덩굴의 뿌리를 감쌌다. 그가 일어서며 어린 덩굴을 건네 주

자, 그녀는 소중하게 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어떻게든 살려내고 말 생각이었다. 

집을 향해 반쯤 돌아왔을 때 칼이 갑자기 말을 세웠다. 

"지붕 널은 삼목으로 만들기로 작정했소. 여기는 내 땅이 아니지만 아직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 나무를 베어도 괜찮을 거요. 한 그루만 베어도 지붕 전체를 씌울 수 있으니까, 금세

 베어가지고 갑시다."

애나에겐 모든 침엽수가 다 똑같아 보였다. 하지만 칼이 나무를 베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그

 차이를 냄새로 맡을 수 있었다. 

삼목의 향기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진하고 그윽했다. 그녀는 참으로 오랜만에 도끼를 휘두

르는 칼의 아름다운 육체를 감상했다. 둘 사이가 벌어지고 난 다음부터 그녀는 칼이 나무를 

베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단숨에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듯이 그와의 사이에 막강하

게 버티고 서 있는 높은 담장을 허물어뜨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는 황홀한 광경에 빠져들

었다. 

갑자기 칼의 도끼질이 느려졌다. 나무를 베는 도중에 도끼의 규칙적인 리듬이 깨지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두 번 연거푸 나무를 찍고 메아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가 도끼질을 멈추었는데도 메아리가 아련하게 그칠 줄 모르고 울려퍼졌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분명 북쪽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무를 베고 있는 

소리였다. 

애나와 제임스도 확실히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너도 들리지?"

칼이 물었다. 

"도끼 소리 같아요."

"그렇지? 도끼질 소리가 맞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니?"

"이웃이 생긴 걸까요?"

제임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갔다. 

"그래, 운이 좋다면 이웃이 생긴 거겠지."

칼이 확신에 찬 소리로 말했다. 

근래에 들어서 처음으로 보는 진정한 미소가 칼의 얼굴을 환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는 도끼

를 들고 뭔가 신호를 보내는 사람처럼 천천히 나무를 찍다 마지막엔 움직임을 멈추었다. 

메아리가 울려 퍼지다 곧 아련하게 사라졌다 세 사람은 호흡을 가다듬고, 칼이 보낸 신호를 

듣고 있을지도 모를 그 누군가를 상상하며 귀를 기울였다. 

칼이 다시 도끼질을 시작했다. 이번엔 칼의 도끼질 사이사이로 메아리가 아닌 다른 도끼 소

리가 장단을 맞추듯 들려 왔다. 두 나무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숲 속의 남자들만이 아는 

언어로 서로에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장단을 주고받았다. 

칼이 먼저 신호를 보냈다. 

퍽,퍽!

저쪽에서 곧바로 대답이 보내졌다. 

쿵, 쿵!

퍽!

쿵!

무언의 대화가 타악기 연주처럼 계속되었고, 칼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가 뒤로 물러

나 삼목 숲 저편을 주의깊게 바라보았을 때, 애나는 장엄한 광경을 처음으로 목격하는 사람

처럼 흥분으로 조바심을 쳤다. 

칼의 열기가 그녀에게도 전해졌다. 멀리서 거대한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숲의 정적이 그들의

 귓가를 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만났다. 향긋한 숲의 고요 속에서 환하게 미

소짓는 애나의 얼굴을 보자 그도 미소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 속에서 다른 나무꾼의 도끼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 소리를 들었나 봐요!"

제임스가 외쳤다. 

"바구니를 가져와서 내가 이 삼목을 베는 동안 나무 부스러기를 모아라. 삼목의 부스러기는 

벌레를 쫓는 데 아주 그만이야. 상자에 넣어 두면 좀벌레가 모두 도망가 버릴 거다. 어서 서

둘러!"

애나는 칼 린드스트롬이 이토록 서두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덩달아 그녀의 마음도 조

급했다. 

재빨리 나무 부스러기를 모으는 그녀에게 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나무 조각을 한 번 빨아 봐요."

그녀는 그의 말대로 했다. 제임스도 그녀를 따랐다. 

"맛이 달아요!"

놀란 얼굴로 그녀가 소리쳤다. 

"그렇소, 아주 달지."

그러나 칼의 머리 속에는 멀리서 들려 오는 다른 사람의 도끼소리보다 더 달콤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잡목가지에 가려져 그들이 지나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제법 멀리까지 뚫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에서 

보니그 길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마차를 몰자 도끼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

고, 그들은 자석에 이끌리는 쇳조각처럼 소리가 인도하는 대로 점점 더 다가갔다.

드디어 낙엽송 숲 한 가운데로 닦여진 길에 중년의 건장한 남자가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

다. 그들의 마차가 다가가자 남자는 칼인 도끼질을 멈추었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도끼를 땅

에 짚고 기대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는 칼의 모자와 거의 똑같게 생긴 작은 중절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애나를 발견하자 모자를 벗어 들고 마차로 걸어왔다. 

칼은 바람처럼 마차에서 내려 벌써부터 한 손을 내민 채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당신의 도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요! 나도 들었소."

두 사람은 커다란 손을 마주잡고 반갑게 악수를 했다. 

'스웨덴 사람이다!'

칼이 생각했다. 

'스웨덴 사람이 틀림없어!'

올라프 요한슨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 칼 린드스트롬이라고 합니다."

"난 올라프 요한슨이오."

"전 이 길을 따라 5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습니다."

"난 이 길로 몇백미터만 가면 되는 곳에 살고 있소."

애나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스웨덴 동포를 찾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감격

스러워 하는 두 남자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무꾼 특유의 커다란 손

을 똑같이 허공에 휘저으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다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모습

은 애나에게도 행복한 느낌을 일으켰다. 칼이 얼마나 고향 사람을 그리워했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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