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86)

그렇지만 칼이 날카로운 비수를 하나 더 치켜들 듯 또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과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던 날 밤……."

하지만 스스로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진실을 추궁하는 그의 목소리가 사그러들었다. 

그는 애나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려, 제임스가 벨의 발굽을 손질하고 있는 헛간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칼이 들이닥치자 제임스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자신감 어린 표정에는 칭찬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칼은 칭찬 대신 냉정하게 물었다. 

"너에게서 진실을 들어야겠다."

제임스는 말의 날씬한 다리를 한 손으로 잡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의 어머니가 정말로 재단사였니?"

줄을 잡고 있는 제임스의 손에 힘이 빠지고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아뇨."

속삭이듯 제임스가 대답했다. 

"그럼 넌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고 있었니?"

총에 장전된 총알이 불을 뿜듯 치명적인 질문이 터져 나왔다. 

제임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벨의 발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

다시 한 번 속삭이는 소년의 시선이 칼의 신발 부분으로 떨구어졌다. 

칼은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착하디 착한 열세 살 짜리 소년에게 어떻게 자신의 어

머니와 누나를 창녀로 인정하도록 강요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소년은 불성실한 어머니가 하

지 못한 사람과 보살핌을 대신 쏟아 준 누나에게 대단한 애정을 품고 있는데 .

칼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좋다, 제임스. 발굽을 아주 훌륭하게 다듬었구나. 여기서 보아도 표면의 각도가 얼마나 정

확한지 알 수 있구나 일이 끝나면 벨에게 꼴을 먹여 줘라. 그렇게 오랫동안 얌전히 있어 주

었으니 상을 줘야겠지."

"네."

웅얼웅얼 대답한 제임스의 눈길은 아직도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애나는 처참한 기분으로 그날을 마무리했다. 처음엔 의도적으로 칼의 시선을 피하다가 나중

엔 그의 눈길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그는 애나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좁은 오두막 

안에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그녀와 옷깃도 닿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애나

는 이토록 극심하게 그를 실망시킨 자기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황혼이 내리기 시작할 무렴 애나의 절망감은 극에 달했다. 이제 겨우 칼의 아내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고 인정을 받아가며 의미를 찾던 그녀의 인생이 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그날 밤 칼은 옥수수잎 소리도 별로 내지 않고 가만히 침대에 들었다. 똑바로 누웠던 그가 

몸을 움직여 팔베개를 하기까지 영원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팔꿈치가 애나의

 머리칼에 닿자 그는 아주 미세한 접촉이라도 피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팔을 치웠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곁에 누워 숨을 죽이며 참고 있던 그녀는 누구든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

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어 그를 향해 돌아누운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손길이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즉각 애나의 손을 밀쳐 버리고 등을 

돌리고 누웠다. 충격을 받은 애나는 그의 등뒤에서 눈물을 흘렸다. 

오, 하느님. 제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칼, 나를 봐요.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 설명할게요. 

당신의 강인한 팔로 나를 안아 줘요. 나를 용서해요, 제발. 내 사랑, 예전으로 돌아가요.

하지만 그의 거부는 완연했다. 차디찬 그의 태도는 그날 밤뿐이 아니었고, 그 이후로 밤낮 

없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으므로, 체념한 듯 스스로를 탓하며 고통을 겪었다. 낮 시간도 고문이었지만 밤이 돌아오면 

더 견디기가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열정이 더더

욱 간절했지만, 스스럼없던 친근감과 뜨거운 열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제임스는 매형과 누나가 야밤의 산책을 그만둔 지 여러 날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잠자리에 든 지 한참 뒤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밖으로 나

간 사람은 칼 혼자뿐이었고, 홀로 침대에 남아 있던 누나는 몸을 뒤척이며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 자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자책감에 제임스는 자신이 뭔가 해결책을 마

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가서 칼에게 그들의 어머니가 한 행동이 자신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변명한다면,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누나가 얼마나 싫어했는지 칼에게 설명하고,

 제임스에게 더 나은 인생을 살게 해주겠다고 누나가 맹세한 사실을 알려 준다면 혹시 칼의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제임스는 바지를 걸쳐 입고 마당을 지나 헛간으로 향했다. 안에는 그가 오후에 묶어 놓은 대

로 말들이 고삐에 묶여 있었다. 분명히 칼은 말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제임스는 문가에서도 말의 목덜미 부분에서 있는 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소리없이 풀밭을 걸어가자 빌의 곁에 서 있는 커다란 남자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

다. 환한 달빛이 빌의 이마와 칼의 머리칼을 비추어 반사시켰다. 제임스는 칼이 두 손으로 

헝클어진 갈기(말·사자 따위의 목덜미에 난 긴 털)를 잡고 빌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

는 것을 보았다. 

제임스가 칼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순간 밤의 정적을 뚫고 칼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 제임스는 남자가 우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남자가 울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소년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눈물을 홀린 유일한 사내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데 지금 그의 앞에서 칼이 울고 있었다 그가 이제는 누나보다 더 애정을 품게 된 칼이, 빌의

 갈기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고 안타깝게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칼의 울음소리는 제임스가 미네소타에 와서 처음으로 소유하게 된 유일한 가정에 대한 안정

감과 아늑함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두려움에 젖은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두막으로 돌

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목구멍에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

다. 칼이 집 안으로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는 안도의 눈물이 또다시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

는 울지 않았다 울어서는 안되었다. 이 집안에서 한사람이라도 울지 않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사랑스런 스웨덴 아가씨

애나와 제임스는 벌어진 통나무 틈새를 메우는 작업에 매달렸다. 개울가에서 진흙을 퍼다가 

초원에서 베다 말린 건초와 섞은 다음 통나무 사이의 빈 공간을 막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손

에 흙을 묻힐 수밖에 없었으므로 초원의 선물이라는 지독한 피부병은 좀처럼 나을 기미를 보

이지 않았다. 칼은 혼자서 지붕을 엮었다. 

대들보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가느다란 버드나무 줄기를 연결

한 다음 그 사이사이에 작은 통나무로 길게 뼈대를 만들었다. 

칼이 사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 이후, 낮 동안의 단조롭고 힘겨운 노독을 풀어 줄 가벼운 

농담이나 침대에서의 포근한 접촉은 더 이상 없었다. 누나와 매형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챈 제임스는 칼과 애나 만큼이나 피곤하고 긴장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칼과 애나가 또다시 가벼운 웃음과 속삭임을 나누기를, 은밀하게 사각거리는 침대 소리

가 들려 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그의 바람은 허사로 돌아갔다. 

매일 밤 칼은 애나 곁에 눕자마자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는 곧바로 잠이 드는 척했다. 그러면

 애나는 복받치는 설움을 간신히 참으며 칼의 호흡이 고르게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

전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생각되면 그제야 터져 나오는 흐느낌과 눈물을 허락했다. 하루

도 빠짐없이 밤마다 흘리는 눈물은 그녀의 베개를 흥건히 적셨다. 고통스러운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감추느라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흐느끼는 그녀의 등뒤에서 칼은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었다. 

그의 팔과 가슴은 허전함을 채울 길이 없었지만, 상처받은 스웨덴 인의 자존심은 고집스럽게

 굳어 있었다. 

새집에 문이 달릴 자리를 잘라내는 날은 칼의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애나와 제임스를 데리

고 처음으로 새집에, 문을 통해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날은 말할 수 없이 경사스러운 날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눈가에 검은 그늘을 드리운 애나는 의기 소침했고 지쳐 있었다.

 제임스는 말수가 눈에 띄게 적어졌고,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

부절못했다. 칼은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사람처럼 아주 예절 바르게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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