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다른 때처럼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거나 볼을 찌르는 대신 그는 묵묵히 몸을 돌렸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남편을 쳐다보다 제임스와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는 애나를 뒤에 남겨 둔 채
그는 찬바람이 획획 부는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져 갔다.
제임스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회상해 보았다. 자칫하면 바바라의 비밀이 드러날
빌미가 될 만한 얘기를 털어놓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칼이 바바라의 실체를 알게 되더라도
그 때문에 자신들 남매를 비난할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칼은 너
무 선량해서 그런 마음을 품지 못한다. 하지만 제임스는 사울에 대한 얘기를 한 게 마음에
걸렸다. 칼이 사울을 질투하는 걸까?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누나는 사울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곧 칼의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제임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임스의 믿음과는 달리 칼의 불편한 심기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애나는 칼이 우울증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그 우울증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위로나 농담에 미소 조차 짓지 않았다. 그는 잠자리에서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그녀와 사랑 나누기를 거부했다. 어느 날 밤 돌연 마음을 바꾼 그가 느닷없이 그녀를 덮쳤다
. 하지만 사랑의 행위 내내 그의 손길과 행동은 말할 수 없이 포악했다. 애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이제 그녀는 감히 무슨 일인지 물어 볼 생각도하지 못했다. 그녀가 여러 번 물었지
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편 칼은 불면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며 고문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애나의 부정에 대한
증거가 하나하나 그의 마음에 쌓여갔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아무 말없이
홀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의심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하기에 이르렀
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맞아떨어졌다. 애나의 과거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사실들이었다.
칼은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엔 이미 불면과 근심의 그
림자가 역력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렵기도 했지만, 그는 진실을 알아야 했다.
애나는 여전히 제임스의 바지를 입고 빨래판에 옷을 올려놓고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칼은
그녀가 역마차를 타고 롱 프레리에 도착하던 날 입고 있던 드레스를 거의 잊고 있었다. 오
늘 아침, 애나가 마당에서 바쁘게 일하는 동안 나무 상자에 들어 있는 옷들을 살펴보고 나서
야 그는 또 한 가지 퍼즐 조각을 맞추었다.
칼은 일을 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그녀의 머리칼이 빨래를 문지를 때마다 함
께 물결쳤다. 그녀를 기다리던 몇 달 동안 그녀의 빨간 머리칼을 얼마나 간절하게 그렸던가.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물리치고 조용히 아내에게 다가갔다.
"애나, 사울이 누구요?"
그가 단도 직입으로 물었다. 그녀가 자지러질 듯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칼은 갑자기 굳어진
그녀의 어깨와 허공에 떠있는 그녀의 맥 빠진 손을 쳐다보았다.
애나는 거대하고 묵직한 주먹이 자신의 배를 강타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빨래판을
세게 그러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선을 빨래 통으로 떨구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사울이라뇨?"
예사로운 말투로 들리기를 바라며 그녀가 물었다
"그자가 누구요?"
"그 사람은…… 바바라의 친구였어요."
"제임스 말로는 그자가 당신에게 눈독을 들였다더군."
"제…… 제임스가 그래요?"
애나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떨구었다. 빨랫감을 문지르는 그녀의 손길이 거세졌다.
칼은 그녀 곁으로 다가서며 그녀의 팔꿈치를 낚아채 그녀의 얼굴이 보이도록 돌려 세웠다.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턱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시선이
칼의 셔츠 단추께로 떨어졌다. 그러나 집요한 그의 시선은 그녀를 꼼짝 못하게 옭아맸다.
"그자가 무슨 짓을 했소?"
깊이 상처 입은 칼의 목소리는 기이하게 울려 퍼졌다
"그 사람은 바바라의 친구예요, 내 친구가 아니란 말이에요."
"친구라면 어떤 친구였소?"
그의 손가락이 여린 그녀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냥 친구죠, 뭐."
그녀는 통증이 느껴지는 팔을 뿌리치고 다시 빨래판을 향했다.
칼이 앞으로 몸을 숙이며 자신을 쳐다보도록 종용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시선을 내리깔
고 무서운 힘으로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 어머니하고 함께 있고 싶을 땐 당신과 제임스를 멀리 내보내는 그런 친구였단 말이오?
그녀는 오랜 지병처럼 또다시 뱃속의 통증이 시작되는 것을 느꼈다.
"제임스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그래, 제임스가 그렇게 말했소!"
바보같은 제임스!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애나는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느라 입술 안쪽
을 이로 물었다.
"당신이 사울을 두려워 했다고도 하더군. 그자를 보기만 해도 겁을 냈다고 말이오."
"그래요! 난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어요!"
그녀는 미친 듯이 옷감을 문지르고 있었다. 칼의 질문이 불러일으킨 악몽 같은 기억에 치가
떨렸다.
"그렇게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남자와 함께 있으려고 제임스를 멋진 마차에 태워 보냈소?
무슨 이유로?"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제발, 도와 줘, 제임
스. 누군가 이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하지만 칼은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강철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그가 계속했다.
"전에는 말이 있는 헛간 근처에도 못 오게 하던 열세 살짜리 소년에게, 그 부자놈이 빨간 가
죽으로 장식한 말과 근사한 이륜마차를 넘겨준 이유가 무엇인지 내게 설명해 보시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럼 그 소년의 누나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일 텐데
도 그 마차를 타볼 기회를 마다한 이유를 설명해 보시지 ."
"제발, 칼"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번엔 칼이 억지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애나, 부자놈들은 어떤 경우에도 가난한 재봉사나 그 고아 딸에게 구애하지 않소."
"그는 나에게 구애한 게 아니에요!"
애나는 눈을 뜨고 노려보는 듯한 그의 시선을 받았다. 칼의 표정에서 그녀는 그가 자신만큼
이나 그 일에 대해서 구역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체념한 듯 말했다.
"나 역시 그자가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했다고 생각하진 않소. 당신들이 바바라라고 부르는
그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가 그랬을 리가 없지. 당신은 다른 아이들처럼 왜 어머니라
고 부르지 않았소?"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단순히 재단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오? 그놈의 사울인지 뭔지 하는 작자에게 자식이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싶었기 때문이오? 손님들이 알고 나면 사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
애나의 눈이 다시 감겼다. 그녀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칼 린드스트롬의 정직한 얼굴을 마
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어머니는 정말로 재단사였소? 아니면 그것도 거짓말이오?"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임스의 여행 경비와 새옷을 살 돈이 어디에서 난 거요?"
그녀의 뺨은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위에서는 경련이 일었다. 그대로 땅에 쓰러질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칼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움켜잡았다.
"내 앞에서 입기 싫어하는 저 옷들은 도대체 뭐요?"
애나의 감겨진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있는 칼의 손가락을 적셨다. 가
장 믿고 싶지 않고 가장 두려워하던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의 질문들은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미 대답을 들었으므로 다시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