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86)

'이번에도 처음처럼 아플까?'

'피가 나을 거야.'

'피가 안 나을 텐데, 어쩌면 좋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칼 린드스트롬 '

'제발 그가 의심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정오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적당히 부풀어오른 반죽을 다시 주물렀다. 칼이 반죽을 

뜯어서 덩어리로 만드는 방법을 애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직접 쇠를 달구어 만든 넓게 편

 무쇠판에 골고루 옥수수 가루를 뿌린 후 반죽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통나무

를 많이 베었으므로 이제부터는 서서히 목재로 다듬을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날 오후엔 

숲속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애나는 오랜만에 채소밭에서 잡초를 뽑기로 했다. 채소밭은 근래에 들어 전혀 손보지 않은 

듯 심각할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다. 

더구나 감자 씨눈도 말라 버리기 전에 심어야 했다. 가마 안에 지핀 장작불은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빵을 굽기에 적절한 온도로 내려가려면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한

다고 했다. 

칼은 새 집터에서 통나무를 다듬었고, 애나는 채소밭에서 잡초를 뽑았다. 그러나 사실 애나

는 잡초와 채소를 구분할 줄도 몰랐다. 그저 잡초처럼 무성하고 질긴 풀을 뽑아 냈는데, 그

것이 불행히도 칼이 아끼는 컴프리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애나는 열심히 일을 계속

했고, 감자 씨눈을 심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칼이 건너왔을 때에도 조금도 의심 없이 임

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밭이랑과 잡초 더미를 번갈아 쳐다보던 칼이 물었다. 

"컴프리는 어디 간 거요?"

"뭐라고요?"

"컴프리 말이오. 조금 전까지 여기 맨 끝줄에서 잘 자라고 있었는데…… ."

"키가 크고 이파리가 무성하고 아주 질긴 풀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소."

"그게…… 컴프리였어요?"

칼은 다시 한번 애나의 곁에 쌓여 있는 잡초더미를 살펴보았다. 애나가 축 늘어진 컴프리 줄

기를 들어 올렸다. 

"이 거 맞아요?"

"불행히도 그런 것 같소."

"오, 이런…… ."

다른 날 같았으면,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함께 웃어 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서로를 너

무나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행동이 껄끄러웠다. 애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칼도 뽑

혀진 컴프리를 쳐다보며 싱겁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엾은 식물을 집어 들며 말했다

"컴프리는 생명력이 아주 강해요. 그러니 지금 심어 주면 아마 다시 살아날 거요. 제자리에 

다시 심어 줍시다. 하지만 살려 내려면 물을 좀 축여야 하오."

"내가 가져 올게요."

애나가 재빨리 일어나 채소밭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넘어서 샘터로 달려갔다. 칼은 손에 든 

컴프리도 잊은 채 빨간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가는 그녀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양동이에 한 가득 물을 담아 가지고서 그녀가 돌아왔다. 칼은 웅덩이를 파고 그녀가 물을 웃

도록 비켜 섰다가 물구덩이에 컴프리를 한꺼번에 담그고는 발로 흙을 덮었다. 땅에 웅크리고

 앉아 식물의 뿌리가 곧게 심어지도록 보살피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애나는 양손으로 나무 

양동이를 들고 서 있었다.

통나무의 옆면을 평평하게 다듬는 작업은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만큼이나 고된 노동이었다. 

왜나 오랫동안 나무를 다듬고 있었던 그의 어깨와 등에 땀이 엷은 막을 이루며 반짝이고 있

었다. 뒷덜미의 머리카락도 땀에 젖어 곱슬거렸다. 일어선 그가 애나에게서 양동이를 받아 

들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더니,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이젠 돌아가서 내 일을 해야겠소."

그녀는 감자의 씨눈을 땅에 심는 대신에 그와 함께 목재를 다듬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는 이율 배반적 이게도 칼과 가까이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늘 따로따로 일

을 하게된 것은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태양이 강렬한 빛을 잃기 시작하면서 비둘기가 떼를 지어 움직였다. 기온도 약간 내려간 듯

했다. 샘터 움막의 지붕에는 참새들이 나란히 앉아서 저녁놀을 감상하고 있었다. 잠자리도 

감자꽃에서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졌고, 분주히 양배추 잎사귀를 오르던 애벌레도 배고픈 

새들의 저녁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일찌감치 나뭇잎 속으로 몸을 숨겼다. 

칼도 도끼질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가지런히 쌓아놓은 목재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

라보았다 마침, 애나가 채소밭을 지나 샘터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지?"

"네, 저도 피곤한 것 같아요."

"진흙을 파러 함께 가지 못할 정도로 피곤해?"

"어딘데요?"

"샛강을 따라 조금만 가면 돼. 가마를 봉하려면 깨끗한 진흙이 필요하거든."

"가고 말고요."

"좋아, 누나한테도 가고 싶은지 물어 봐라. 가고 싶으면 샘터에서 빈 양동이를 가져 오라고 

해."

제임스는 직접 물아 봐도 될 텐데 굳이 자신을 시키는 칼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늘

 하루 종일 누나와 매형은 뭔가 어긋난 사람들처럼 어색하게 굴었다. 아무튼 제임스는 누나

에게 소리를 질렀다. 

"누나, 우린 진흙을 파러 갈 건데, 함께 가고 싶은지 매형이 물어 보래 !"

애나는 샘터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뒤로 돌아섰다. 칼은 제임스의 바로 뒤에 서서 그녀를 쳐

다보고 있었다

"가겠다고 전해 줘!"

"그럼, 양동이를 가져 오래."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양동이를 꺼내 왔다. 

애나는 양동이를, 제임스는 삽을, 칼은 장총을 들고서 길을 떠났다. 칼이 앞장서며 설명했다

"지금은 꿩들이 모이를 먹을 시간이야. 샛강을 끼고 있는 방죽에 자란 야생 곡식들이 그놈들

이 좋아하는 먹이지. 갑자기 날아오를지도 모르니까 당신들은 내 뒤로 따라오는 것이 좋겠어

."

칼과 애나는 그날 아침에 가만히 앉아 있던 사냥감을 놓쳤던 일을 동시에 떠올렸다. 

그들은 샛강으로 이어진 좁은 오솔길을 따라 무성한 나뭇가지를 헤치며 한 줄로 걸어갔다. 

길 한가운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꿩이 아니라 게으른 두더지 한 마리였다. 느릿

느릿 땅을 파던 두더지는 구경꾼이 있는 줄도 모르고 꿈지럭거리다가,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이상한 울음 소리를 내며 몸을 동그랗게 말더니 머리를 앞발 사이로 숨겼다. 

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땅주인의 보금자리를 해치지 않도록 길을 비켜 갔다. 드디어 좁은 

길이 끝나고,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강가에 두텁게 덮인 샛노란 진흙이 나타났다. 미세한 진

흙 입자 위에는 수도 없는 짐승들의 발자욱들이 찍혀 있었다. 흥미가 동한 제임스는 쪼그리

고 앉아서 각기 다른 발자국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무슨 동물인지를 물었다. 칼은 끈기 있게 

소년의 끝도 없는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너구리, 스컹크, 들쥐, 수달, 고슴도치 등의 발

자국이었다 토끼나 햄스터의 발자국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런 짐승들은 이른 새벽 풀잎에 

맺힌 이슬만으로도 충분히 수분을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칼이 덧붙였다. 마침내 제임스

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양동이 가득 진흙을 담아 가지고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숲의 잔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마당에 도착했을 때, 가마는 마침 적당하게 달구어져 있었다. 칼은 이글거리는 숯을 

모두 파내고 뜨거워진 벽돌만 남겨 두었다. 빵 반죽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철판에 올려놓은 

다음, 그는 재빨리 진흙으로 가마의 입구를 봉했다. 그리고는 물을 뿌리며 봉긋한 둔덕의 표

면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진흙을 문지르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노란 진흙

물이 흘러 넘쳤다.

애나는 그가 열심히 작업하는 광경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말의 등허리를 쓸던 그의 커

다란 손과 어둠 속에서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생각났다. 그의 어

깨 너머로 진흙에 파묻힌 손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묘한 느낌이 짜릿하게 전신으로 퍼져 나

갔다. 그의 관자놀이에 흐르던 땀방울의 짭짜름한 맛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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