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86)

"내일 내가 아주 근사하게 빵을 만들어 보이겠어요. 두고 보라구요!"

"내일 빵을 만드는 사람은 나요. 당신은 내가 만드는 걸 그냥 지켜보는 거지."

"그래요, 지켜볼 거예요. 하지만 이번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죄다 기억할 거예요. 이번 달

이 다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아마 새 난로를 사러 가야 할 거예요. 두고 보세요."

애나는 무쇠 난로 위에서 우아하게 요리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난로만 있다면 요

리도 더 이상 끔찍스러운 일이 아니라 즐거운 작업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칼?"

"음?"

"오븐도 없는데 어떻게 빵을 굽죠?"

"마당에 가마가 있는데, 보지 못했소?"

"네, 어디에 있는데요?"

"뒷마당에 쌓아 놓은 장작 더미 바로 옆에 있소."

"말린 진흙으로 덮인 봉긋한 부분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소."

"입구 같은 것도 없던데요?"

"빵 반죽을 안에 넣은 다음에 젖은 진흙으로 전체를 잘 봉해서 입구를 막아야 하니까."

"그럼, 나더러 앞으로 평생 빵을 만들 때마다 땅에 엎드려서 젖은 진흙으로 범벅을 하란 말

인가요?"

"그만 입다물고 가까이 오기나 해요. 난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고 내가 얘기 했잖소.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오. 지금 난 빵이니, 진흙이니, 난로니 하는 얘기엔 관심 없소."

애나는 고분고분 칼의 팔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남편이 시킨 대로 충실하게 입을 다물었다. 

칼이 키스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일부러 더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

시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열려고 애썼지만, 꼭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약속한 대로 하는 것뿐이에요. 결혼할 때 남편한테 복종하겠다고 서약했잖아요. 그래서 당

신이 시킨 대로 입다물고 있는 거죠."

"좋아, 그럼, 당신 남편이 명령하는데, 다시 열어요."

애나는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그것도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칼도 거짓말을 한다

빵을 만드는 과정은 애나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창하고 복잡했다. 그도 그럴 것이 2

주일 동안 먹을 수 있도록 열네 덩이의 빵 반죽을 한꺼번에 구웠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 밤 굴뚝에 올려놓았던 액체는 부글부글 끓어오른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칼은 말총으로 만든 미세한 여과기로 그 액체를 걸러 낸 다음 우묵하고 넓은 호두나

무 통에 쏟았다. 그리고는 물과 버터를 첨가한 뒤 엄청나게 많은 밀가루를 쏟아 부었다. 반

죽을 치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애나는 칼과 나란히 서서 일을 거들었다. 밀가루가 골고루 

섞이기도 전에 애나는 벌써부터 팔이 아팠다. 빵을 반죽하는 것이 무거운 도끼를 휘두르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것 같았다. 반죽 통엔 꼭 들어맞는 뚜껑이 갖추어져 있었다. 반죽이 끝

나자 칼은 뚜껑을 덮어서 벽난로 옆에 내려놓고는 적당히 부풀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젠 빵을 반죽하는 방법을 알겠소?"

"언제나 이렇게 많이 씩 만드나요?"

"자주 만드는 것보다는 이렇게 한꺼번에 만들어 두는 것이 더 편하니까. 팔이 아픈 모양이지

?"

"아니에요."

애나는 이 정도의 일로 그에게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가 싫어서 뻔한 거짓말을 했다. 

"다행이오. 그럼, 이젠 어제 내팽개쳐 두고 온 낙엽송을 해결하러 갑시다."

그날은 지금까지의 여느 날들과 달랐다. 애나와 칼은 전혀 농담을 주고받거나 웃음을 던지지

 않았다. 다정한 손길은커녕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가능하면 대화도 회피하는 눈치였다. 

이유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었다. 

칼은 평상시처럼 말고삐를 제임스에게 넘겨 주지 않고 직접 말을 몰았다. 자꾸만 애나를 향

해 움직이려는 시선을 붙잡아 두기엔 익숙한 말잔등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고 생각되었다. 어제처럼 아내와 나란히 걸어가며 스스럼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오늘따

라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줄곧 벨과 빌에게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

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애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맞추어 조율되고 있었다. 그는 굳이 돌아

보지 않고도 그녀가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느끼고 들을 수 있었다. 이슬에 젖어 촉촉한 아침

 풀밭을 걸어가는 소리, 꿩이 우는 소리에 흠칫 놀라 머리를 갸우뚱하는 모습, 그녀의 손에 

들린 바구니가 규칙적으로 엉덩이에 부딪히며내는 조그만 소리, 빠르게 지나가는 들짐승을 

뒤따르는 그녀의 호기심 어린 시선, 한 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통나무의 가지를 잘라 내

는 단아한 자세, 목이 말라 주전자를 들고 물을 마실때의 도드라진 입술, 물을 마시고 나서 

손등으로 쓰윽 입술을 훔치며 뒷덜미의 머리채를 들어올리는 모습, 갑작스레 돌변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불안한 듯 지켜보는 동생에게 걱정 말라며지어 보이는 무언의 미소까지 칼

은 그녀의 모든 몸짓을 그림처럼 그려 낼 수 있었다.

애나 역시 칼과 일체감을 느꼈다. 그녀의 몸 속으로 소리굽쇠하나가 뚫고 들어와 보름 전부

터 시작된 싱그러운 교향악에 맞추어 미세한 떨림을 전달하고 있는 듯했다. 

가볍게 알레그로로 시작되어 낙엽송 숲을 청아한 웃음 소리로 울렸던 연주는 이제 종반부로 

치달으면서 아다지오로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칼의 도끼질마저도 느리게 진행되는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오르내렸고,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초침처럼 어둠이 내리기를 재촉했다. 지

금 그와의 사이엔 거리가 있었지만, 애나는 아침에 빵을 구울 때처럼 그의 바로 곁에 나란히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전 내내 그녀는 한 번도 칼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의 모든 행동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벨의 등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부드러운 손짓, 옆으로 튀어 나온 나

뭇가지에 부딪히지 않도록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기던 그의 따스한 손, 맨 처음 도끼

를 휘두를 때 심호흡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던 단호한 시선,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오르내리

는 팔과 근육의 움직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그의 금발 머리, 쓰러지기 직전 부르르 

떠는 낙엽송을 올려다보는 만족스러운 표정, 미끄러지듯 손가락을 움직여 단추를 끄르고 단

숨에 셔츠를 벗는 모습, 다시 도끼를 손에 들고 바람을 가르며 나무에 내리찍는 모습 제임스

가 가리킨 대로 소리없이 움직여 장총을 집어 들었지만 정을 놓쳐 버린 후 짓던 계면쩍은 표

정 등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몇 번인가 칼은 애나의 시선을 붙들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녀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애나는 그

를 외면한 채 홀로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하루 종일, 두 사람의 생각은 평행선처럼 똑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애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칼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수영하러 가자고 하면 따라오려 나 몰라.'

'분명히 수영하러 가자고 할거야.'

'수염을 다시 깎아야겠어.'

'머리를 감아야지.'

'이틀이 왜 이렇게 긴 거야?'

'이틀이 왜 이렇게 짧지?'

그녀는 너무 연약해.'

'그는 너무 커, '

'나도 처음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될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에게 들키고 말 거야.'

'애나의 동생이 잠들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제임스, 제발 빨리 잠들어라!'

'내가 그녀의 잠옷을 벗겨 줘야 하는 걸까?'

'그가 내 옷을 벗겨 줄까?'

'그녀를 아프게 하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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