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86)

애나는 통나무에서 쳐낸 나뭇가지를 모으느라 허리를 구부릴때마다 일부러 바지를 입은 엉덩

이를 칼에게로 향했다. 그러면 칼은 못 본 척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녀와 부딪치곤 했다. 그

러다가 계면쩍어지면 모자를 벗고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거나 태양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정말 무자비하게도 더운 날씨군,"

"그렇네요."

통나무가 쓰러질 때까지 그늘에서 쉬고 있던 애나는 별로 덥지 않았지만, 그에게 맞장구를 

쳐 주며 목덜미를 덮은 머리채를 들어 올렸다 매번 그녀에게 모자를 양보하는 칼이 안쓰러워

서, 그녀는 자투리 천으로 챙이 넓은 보닛을 만들어 썼다.

두 사람의 은밀한 장난은 연못에서 수영을 하는 동안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수영을 가르

치는 선생과 학생의 입장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 속에서 서로의 몸을 

스칠 수 있었다. 

눈을 찌를 듯이 햇빛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들은 좀처럼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며칠 후, 세 사람은 조용한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비 때문에 숲속 작업은 무리였으므로 그

들은 모처럼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칼은 여느 때처럼 파이프 담배를 피

워 물었다. 소리없이 내리는 가랑비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더니, 밖으로 나가 

쇠스랑으로 땅을 파고 지렁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곧 낚싯대를 찾아 들고 제임스와 함께 농

어를 잡으러 나가 버렸다. 

애나는 샘터에 가서 채소를 씻으며, 자신을 홀로 남겨 둔 두 남자에게 화를 냈다. 그러다가 

울분을 참지 못해 씻고 있던 콩을 그릇에 냅다 팽개쳐 버렸다. 

두 남자는 신나게 농어 낚시를 하러 갔는데, 이렇게 콩이나 씻으며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어

야 하다니!

어두컴컴하던 주위가 갑자기 더 어두워졌다. 문득 고개를 든 애나는 비명을 질렀다. 샘터 움

막의 문가에 인디언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며벌떡 일어서는 애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는 콩을 쳐다보았다. 인디언들은 모두 윤기가 자

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뒤로 땋아 내리고, 가장자리에 수술이 달린 사슴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문에서 제일 가까이 서 있던 사내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는애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환하

게 미소 지었다. 그들은 애나가 어서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애나는 공포감을 억누르며 밖으로 나갔다. 

"여우 머리털."

'환한 미소'가 말했다

촉촉한 가랑비를 맞으며 애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서있었다. 인디언들이 일제히 그녀

의 머리칼을 쳐다보았다.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오두

막 안으로 도망을 쳐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집 안으로 따라 들어오면 어쩌지?

"내 이름은 애나예요, 애나 린드스트롬."

이름을 밝히면서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에 깜짝 놀랐다. 

'환한 미소'가 옆 친구에게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어린 사슴처럼 가냘픈 몸매에 얼

굴만 물소처럼 우락부락한 사람이었다. 

"여우 머리털."

'환한 미소'가 다시 중얼거리더니, 이번에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물소 얼굴'이 싱긋 웃었다. 흉측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그의 치아는 눈부시게 하얗고 치열도

 가지런했다. 

"여우 머리털하고 하얀 머리털이 결혼했으니 스컹크 새끼처럼 줄무늬가 있는 아기가 태어날 

거다."

그의 말에 인디언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윌 원하는 거죠? 내 머리를 가지고 놀리러 왔다면 당장 돌아가라구요! 그리고 남편을 만나

러 왔다면 다음에 오세요. 그는 지금 집에 없어요."

애나는 속으로 무척이나 떨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남의 집에 와서 천연덕

스럽게 자신을 놀리고 있는 인디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통카 스콰우다!"

'물소 얼굴'이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원하는 게 뭐냐니까요?"

곱지 않은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물었다. 

"통카 스콰우라구? 스콰우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다른 인디언이 '물소 얼굴'에게 물

었다. 

그들은 애나가 입고 있는 바지를 손가락질하며 싱글거리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

어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 애

나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영어로 얘기해요! 이 근처를 얼씬거리려면 영어를 쓰란 말이에요! 영어 할 줄 알잖아요!"

"진짜 통카 스콰우다!"

한 사내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외쳤다.

그들은 다시 한 번 그녀의 바지를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이렇게 무례하게 굴지만 않았다면 집 안에 들어가서 칼을 기다리도록 했을 거예요.

 하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웃을 생각이라면, 당장 사라져 주세요!"

애나는 획 돌아서서 오두막으로 향했고, 인디언들도 조용히 그녀를 따라왔다. 문 앞에 이르

자 그녀는 용감하게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 안에 들어가고 싶으면 내 바지 얘기는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정 놀리고 싶으면, 

속으로나 생각하란 말이에요!"

그러나 인디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왔

다. 그리고는 조용한 동작으로 벽난로 앞 바닥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애나는 인디언들을 어

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난감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행동으로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

는 아주 분주하게 점심 준비를 서둘렀다. 어쩌면 그녀를 쳐다보는 데 질력이 나서 가 버릴지

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점심 식사로 다진 고기를 넣은 파이를 만들기로 결심한 애나는 진땀을 흘리며 요리에 매달렸

다. 오븐이 없으니, 다리가 달린 프라이팬을 벽난로에 올려놓고 파이를 구워야 했다. 그녀는

 언젠가 칼이 가르쳐 준 재료와 방법을 떠올리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인디언들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인디언들의 눈에 바쁘게 보이면 그만이었다

무관심한 척하면 가 버리겠지, 뭐.

그러나 그들은 애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지켜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다가 가끔씩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애나는 나무 항아리에 다진 고기와 호박, 식초를 넣고 섞은 뒤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깨끗한 숟가락을 찾느라 잠깐 몸을 틀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코가 비버처럼 생

긴 인디언이 손가락을 항아리에 집어 넣으려는 광경을 붙잡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애나는

 나무 숟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냅다 내리쳤다. 

"저리 치워요! 예의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죠? 무례하게 내 집에 쳐들어와서는 등뒤에서 더

러운 손으로 내 음식에 손을 대다니! 당장 저리 가서 앉아요. 이따가 요리가 다 되면 줄지도

 모르니까! 그때까지는 내 일에 방해하지 말아요!"

손을 얻어맞은 인디언은 머쓱하게 제자리로 돌아갔고, 나머지인디언들은 배를 잡고 깔깔댔다

. 앉아서 계속 손가락을 쓰다듬고있는 '비버 코'를 제외한 나머지 인디언들은 몸을 앞뒤로 

흔들며끝도 없이 '통카 스콰우'를 외쳐 댔다. 

"조용히 해요! 당신들도 저 사람과 다를 게 없어요.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 이렇게 쳐들어왔

잖아요!"

애나는 숟가락을 휘두르며 인디언들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다시 요리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다섯 명의 인디언들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을

 하려니 몹시 불편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애나의 으름장에 조용해졌다. 자신의 수법이 

먹혀 들어가자, 그녀는 계속해서 고자세를 유지했다. 마음속의 두려움을 잠재을 수 있는 방

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