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86)

조심스럽게 애나가 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처음으로 그의 살결을 애무하는 순간이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애나의 손길에 칼은 타오르는 열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이 크게 

벌어지면서 얼굴 근육이 한껏 긴장되는 것을 애나는 손바닥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혀

가 훨씬 더 힘차게 그녀의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애나는 그의 혀의 움직임을 그의 얼굴

에 댄 손에서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애나는 남녀의 입맞춤이 즐거운 행위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이제야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새롭게 깨달은 진실에 녹아들었다. 칼과의 입맞춤에선 

더럽고 추한 느낌이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밀쳐 버리고 싶도록 강제적인 힘도, 살갗이 벗

겨질 것 같은 통증도, 굴욕적인 눈물도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과 오

래도록 참아 온 감정의 조심스러운 표출이 느껴졌다. 칼은 한 번에 한 걸음씩 신중한 몸짓으

로 그녀에게 다가서며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애나 역시 장미의 꽃이파리가 하나하나 벌어

지며 서서히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듯 그를 향해 조금씩 열리는 마음을 느꼈다. 

칼은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며 서서히 그녀의 가슴 위로 상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녀

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깜짝 놀라 몸을 웅크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애나는 그의 어깨

에 손을 얹고 살며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작열하는 햇빛 아래에서 눈에 익혔던 

그의 단단한 근육을 실제로 손으로 만지고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그녀의 뇌리 속에 담겨 

있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애나의 손길이 조심스러운 탐색을 시작하자 칼은 쓰러지듯 그녀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

는 조금 더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으므로, 자신의 가슴에 깔려 있던 그녀의 한 쪽 손을 

놓아 주었다. 애나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자 칼은 그 손을 잡아 자신

의 다른 쪽 어깨에 올려놓고는 다시 그녀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애나는 칼이 추운 겨울 동안 말동무 삼아 나나를 집 안으로 들여왔다고 설명하던 때의 표정

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염소의 부드러운 귓밥을 어루만지던 칼의 손길도 기억났다. 사람에게

도 그런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었다. 

수년간에 걸친 처절한 외로움이 피부에 스치는 애나의 손길에 의해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심장과 심장을 마주 대고 누워, 두 사람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인간의 몸짓 언어를 나누

었다. 따뜻한 신체 접촉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 온 애나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이토록 가까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좋기만 했다. 한편, 그녀의 마음 한 자락에서는 위험하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칼이 지금 이 행동을 절정의 순간으로 몰고가려 한

다면, 이 따스함은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애나는 그의 매끄러운 

등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오, 애나…… ."

칼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애나의 팔을 꼼짝

하지 못하도록 내리눌렀다. 

"당신이 내게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거요?"

거칠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선, 이미 그녀가 너무 많이 진도를 나갔다는 우려가 느껴졌다

. 하지만 갑작스런 칼의 움직임에 마른 옥수수잎이 큰 소리를 냈고, 뒤이어 제임스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칼의 머리가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다시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 것 같아요, 하지만…… ."

애나는 제임스가 적절한 때에 구원의 밧줄을 내려 준 것 같아 감사했다. 그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금까지의 친근한 접촉이 좋기는 했지만, 더 이상 진전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웠다

"칼, 난…… ."

그녀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봐 지금처럼 조심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애나에게는

 또 하나 새로운 감정이었다. 그녀는 칼에게 실망이나 상처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당신과 함께 지낸 지 아직 사흘밖에 되지 않았어요. 날이 갈수록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 가고, 또 더 가까워지고도 있지만…… 좀더 시간이 필요해요."

순간적으로 그는 후회할 행동을 저질렀다. 그녀를 힘껏 밀쳐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칼은 애

나를 진심으로 대했고, 그녀 또한 자신을 좋아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더 실망

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애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그

녀는 통증을 두려워하는 건지도 몰랐다.그렇다면 칼은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당신을 이렇게 밀쳐 내선 안 되는 건데 그랬소. 하지만 난…… 당신을 만지고 싶은 마음을 

참아 내는 것만큼이나 당신에게서 손을 떼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워."

"칼,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마세요. 나도 당신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 좋았어요. 당

신이 나를 만지고 키스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그 이상은…… . 난 그 전에 당신에 대해 저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다른 여자들이 남편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은…… . 이해해 줘요,

 칼."

애나는 자신의 의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물론, 그녀는 칼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귀중한 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미루고 싶었다. 칼이 그 엄청난 비밀을 알

아내는 순간, 이 모든 즐거움과 충만감이 끝나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 칼과의 사이에 좀더 구애의 기간을 갖고 싶었다. 그것은 애나가 순결한지 아닌지

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바람이었다. 

그녀는 한때 계급장과 수술을 매단 군인과의 결혼을 꿈꾸던 여자였다. 지금은 계급장과 수술

이 어떠한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았지만,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마음을 졸이는 이 기간을 좀더

 만끽하고 싶었다. 이미 결혼은 한 상태였지만,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사랑과 애정을 키워

 나가고 싶었다. 우스꽝스러운 바람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애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

로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아니, 모르겠소."

칼은 애나가 자신을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이 세상 무엇이라도 바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우선은…… 오늘 같은 날들을 좀더 보내고 싶어요. 당신을 놀리고, 웃음 짓고, 서로를 그윽

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만일 스웨덴에서 만났다면, 당

신은 나한테 머리 묶는 리본을 사 주었을 거라고 얘기했잖아요. 모든 여자들은 그런 걸 원해

요. 내 말 이해하겠어요?"

"이해할 것 같소.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그래야 하지?"

그의 목소리는 절실했다. 애나는 자신의 바람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하려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오, 며칠이면 될 거예요. 당신을 무턱대고 내 남편으로서 받아들이기 전에 연인으로 느끼고

 싶어요. 서로에 대해 좀더 기쁘게 알아 가며 연인이 될 수 있을 때까지만 기다리면 돼요."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좀더…… ."

칼은 적당한 낱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애정을 표현해 달라는 얘기예요."

"당신은 이상한 아가씨요, 애나. 얼굴도 보지 않고 내 아내가 되겠다고 결심해 놓고선, 이제

 와서 내게 구애를 하라니…… . 이렇게 골치 아픈 빨간 머리 아가씨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지?"

"그냘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애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할 만큼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알았소.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소. 조금 전처럼 진한 키스를…… 딱 한 번만 더…

… ."

인디언들의 통가 스콰우

애나는 바라던 대로 칼의 스스럼없는 애정 표현을 마음껏 경험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무뚝

뚝한 표정을 가장하면서도 칼은 노골적인 농담과 끈끈한 손길로 그녀를 홍당무처럼 빨갛게 

만들어놓곤 했다. 어떨 때는 제임스가 보고 있지나 않은지 재빨리 돌아보아야 할 만큼 당혹

스러울 정도였다. 은밀하게 내통하는 사람들처럼 가끔씩 칼과 애나는 눈을 맞추고 둘만의 미

소를 주고받았다. 

웃통을 벗어 던진 칼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목과 가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애나의 시선이 자신의 반들반들한 근육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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