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86)

"바지라고? 그래, 바지라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여자요."

"칼, 치마는 이곳 생활에 적당하지 않아요. 어제만 해도 그래요. 숲속으로 반도 못 가서 무

릎까지 다 젖어 버렸다구요. 게다가 툭하면 나뭇가지에 걸려서 넘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으로 온 마당을 다 쓸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일하는 데도 

방해가 되고 해서, 제임스의 바지를 입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보세요! 잘 맞잖아요."

애나는 빙그르르 한 바퀴 몸을 돌렸다. 

"그렇군. 하지만 난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스웨덴에서는 숙녀라면 절대로 바지

를 입지 않아요."

"스웨덴에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집을 지을 때 여자들의 일손이 필요하지 않겠죠, 안 그래요?

"그건 그렇소. 하지만 애나, 난 어디서도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소

."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난 이슬에 젖어서 칙칙 감기는 치마를 다시 입을 생각은 없어요. 더구

나 당신하고 제임스 말고는 볼 사람도 없잖아요."

칼은 더 이상 논리적으로 반박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도 애나의 드레스가 일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바지라니…… .

"보스턴에서도 바지를 입고 말괄량이처럼 뛰어다녔소?"

애나는 그를 잔뜩 흘겨보다가 획 고개를 돌렸다. 시트와 이불이 엉망인 채로 놓여 있는 침대

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바삐 움직여 침대를 정리하며 쏘아붙였다. 

"물론, 그곳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그래, 그랬을 게 뻔하오. 그렇다면 팬케이크 만드는 일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군."

그려는 손바닥이 위로 가게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이것 보세요, 난 이렇게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 일을 좋아하게 될지는 장담할

 수가 없군요."

식탁 앞에 서서 팬케이크 반죽을 하고 있는 덩치 큰 사내의 엉거주춤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

니, 애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계속해서 그를 놀려댔다. 재료의 양에서부터 조리법을 설명하는

 요리수업 내내 그녀는 칼을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우선 밀가루를 두 주먹 푼 다음에…… ."

"누구 손으로요? 당신 손요, 제 손요?"

"손가락으로 소금을 조금 집어서 밀가루에 넣어요."

"조금요? 아무래도 당신 손가락을 빌려야겠네요. 당신 손과 내 손은 워낙 차이가 나잖아요."

"베이킹 파우더를 적당히 넣어야 하오. 음…… 헤이즐넛 하나정도면 되겠군."

"어쩌나? 난 헤이즐넛을 본 적이 없는걸요?"

애나의 짓궂은 물음에 칼은 어떻게 생겼는지 곧 보여 주겠노라고 대답하고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요리에 몰두했다. 

"버터는 호두 두 개 정도 크기로 넣으면 될 거요."

"호두라면, 드디어 내가 알아들을 만한 게 나왔군요. 당신 설명 중에서 처음으로 쓸 만한 표

현이었어요."

"불행히도 계란은 없소. 닭이 없으니 계란이 없을 수밖에."

그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계란이 없다니요?"

애나는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요. 계란 없이는 당신 손에 박힌 굳은살처럼 뻣뻣한 팬케이크가 될 거라

구요!"

칼은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애나의 귀여운 얼굴에 키스하고싶은 충동을 참느라 갖은 애를

 써야 했다. 그는 조만간 초원에서 야생 뇌조를 잡아다가 알을 구해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다음 차례는 염소의 젖이었다. 

"반죽이 적당하게 퍼질 만큼 충분히 넣어야 하오."

애나는 가짜이서 보아야겠다며 머리를 들이밀어 염소 젖을 붓는 그의 시야를 가렸다. 칼은 

하는 수 없이 짐작으로 젖을 넣고 반죽을 마무리했다. 

계란이 들어가지 않은 팬케이크는 예상 밖으로 훌륭했다. 노릇하게 구워 낸 팬케이크에 투명

한 갈색 시럽을 뿌리고 나자보기에도 아주 그럴듯했다. 칼은 단풍나무에서 채취한 당밀로 올

봄에 직접 만든 시럽이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곧 그 방법을 애나에게도 가르쳐 주겠다는

 얘기와 함께.

그날 아침, 애나는 마구 준비를 위해 마구간으로 나가는 남자들과 행동을 함께 할 수가 없었

다. 부엌에 남아, 욕지기가 날 만큼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노란색 양잿물로 접시와 염소 젖

이 담겼던 양동이를 닦아야 했기 때문이다. 투덜투덜 설거지를 하면서 애나는 남자들이 왜 

아내를 필요로 하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고달픈 바깥일과 이토록 귀찮은 부엌일을 어느 남자가 모두 감수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두막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그녀의 기분은 말끔하게 개었다. 그녀는 바깥 세상의 탁

 트인 분위기며,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싱그러운 바람, 말들이 내뿜는 숨소리와 발굽 소리,

 이 모든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제임스는 오늘도 혼자 힘으로 말에게 마구를 씌워 매형의 칭찬을 받았는지 싱글벙글이었다. 

칼은 무거운 도끼를 어깨에 멘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필의 말과 세 사람은 한 가족

처럼 정답게 낙엽송이 있는 숲을 향해 걸어갔다. 

숲속에서 그들은 뇌조 한 쌍을 발견했다. 인기척에 놀라 거대한 날개를 펴고 푸드득 날아오

르는 새 한 마리를 칼은 단 한 방에 쏘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공포에 질려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있는 애나를 발견하고, 껄껄 웃었다.

"바지까지 입은 용감한 소년이 그깟 새 한 마리에 그렇게 놀라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그까짓 새 한 마리라구요? 날갯짓하는 소리가 태풍처럼 요란했단 말이에요!"

"다음에 또 그런 소리를 들으면 새가 날아가는구나, 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놀란 생쥐마냥 

숨을 필요는 없소."

한 방에 새를 쏘아 떨어뜨린 칼의 노련한 솜씨와 침착성에 애나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그

는 순식간에 새의 배를 갈라 내장을 도려냈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그는 깃털을 모조리 뽑아

 깨끗하게 손질을 끝냈고, 제임스는 그의 곁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

다. 애나는 질겁을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계속해서 외면했다. 

칼은 아생 벼를 수확해서 땅속에 저장해 놓은 곳을 애나에게 보여 주며 자랑스러움에 얼굴을

 빛냈다. 지난가을, 북쪽에 있는 그의 땅에서 자란 벼를 베어다가 탈곡해 놓았던 것이다. 

그는 끓는 물에 쌀을 넣으며 맛있는 저녁 식사가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쌀이 익자 뇌조의 뱃속에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쌀을 채워 넣은 뒤, 물에 적신 질경이 잎으

로 잘 싸서 벽난로 석탄 더미 안에 파묻었다. 깨끗이 씻은 고구마도 역시 질경이 잎으로 싼 

뒤에 함께 파묻었다. 

그는 익은 고구마를 꺼내 단풍 당밀 시럽을 발라 양념하는 법을 두 사람에게 가르쳤다. 새고

기가 익는 동안 수영을 하고 돌아온 그들은 입에서 살살 녹는 저녁 식사를 즐겼다. 

그날 저녁, 애나는 전날보다 덜 피곤했으므로 차가운 물에 들어가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

다. 애나가 옷을 벗는 동안, 칼과 제임스는 가슴팍까지 물이 차는 곳에 서서 사방으로 돌멩

이를 던져 보며 다이빙을 할 수 있을 만큼 필은 곳을 물색했다. 애나는 두 남자가 골똘히 물

 속을 살피는 틈을 타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에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녀는 칼의 

뒤쪽으로 가서 그의 발목을 세게 걷어찼다. 칼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잠시 동안 허우적거

리던 칼은 펄쩍 뛰어 일어서며 보이지 않는 뭔가를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 소용돌이처럼 솟

아오른 모래 때문에 그의 주변 물빛이 흐려졌다. 

"어머, 칼, 이제 보니 겁쟁이로군요. 작은 물고기의 몸짓에 그토록 겁을 집어먹다니!"

그러나 칼의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곧 심상치 않은 전쟁 놀이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가 상체를 수그렸다. 악어처럼 가늘게 뜬 눈 만 물 밖으로 내민 그가 무시무시하게 그녀를 

향해 돌진해 왔다. 애나는 두 팔을 앞으로 내밀며 뒷걸음질쳤다. 

"칼, 그러지 말아요. 난…… 그냥 장난친 것뿐인데, 오, 칼!"

그녀는 그를 향해 물을 끼얹으며 웃음 짓다가 비명을 지른 뒤 도망치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소리를 질렀다. 

"빨랑 잡아서 혼내 줘요!"

"제임스, 이 나쁜 놈! 난 네 누나잖아! 내 편을 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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