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86)

힘차게 걸어가는 가냘픈 소년의 어깨에서 주변의 초록빛 숲으로 눈길을 옮기는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살아온 길과 앞으로 살아갈 목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신중한 얼굴이었다. 

그의 표정은 애나에게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의 고요한 평화를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아버

지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밀이 칼에게 폭로되는 순간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도 알 수 없었지만, 애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녀는 

든든한 남편과 함께 태양이 비치는 푸르른 숲속에서 일하며, 싱그러운 나무 향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햇살에 탄 얼굴

세 사람은 오후 내내 나무를 베고, 가지를 치고,말에 매달아 운반하는 일을 거듭하며 한 몸

처럼 융화되었다. 그들의 어깨 위로 태양이 이글거렸다. 칼은 땀에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일을 계속했다. 

애나는 칼의 금빛 머리칼과 햇볕에 그은 상체의 매끄러운 피부, 날씬한 엉덩이와 탄력 있어 

보이는 팔뚝의 근육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거의 춤에 가까운 유연한 동작을 보여

 주고 있었다. 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어깨와 팔의 근육이 꿈틀거렸고, 불끈 솟아오른 

핏줄이 튕겨져 나올 것처럼 두드러졌다. 그녀는 칼의 뒤에 서서, 잔뜩 긴장되었다가 도끼가 

나무에 찍히는 순간 이완되는 그의 어깨 근육을 감상했다. 

제법 두툼한 가지를 치거나 흐트러진 나무 부스러기를 치울 때면, 그는 도끼에 체중을 싣고 

허리를 구부렸다. 애나는 건강한 목덜미에서부터 길게 홈이 패인 그의 등을 따라 허리까지 

시선을 옮겼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는지 칼은 가끔씩 아무런 예고도 없이 뒤를 돌아보며 애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의 널찍한 가슴에서 삼각형을 이루며 반짝이는 금빛 털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 그녀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마다 칼은 다정하게 물어왔다. 

"지쳤소, 애나?"

"덥지 않소? 물을 마셔요."

매번 그의 물음에 도리질을 하며 애나는 멀리 침목이 깔린 오솔길로 시선을 옮겼다.

나무가 땅에 떨어질 때마다 칼과 제임스는 그 순간의 짜릿한 흥분을 함께 즐겼다. 미소를 머

금은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동안 만나고 나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나란히 서서 가지를 쳤

다. 그런 다음, 제임스가 말을 몰고 와서 통나무를 운반했다. 

가지 치기를 하다 말고 칼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 얼굴이 타겠소. 자, 내 모자를 써요."

그는 손때가 묻고 자신의 체취가 담긴 모자를 벗어서 애나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애나는 묵

묵히 일에 열중하려고 노력했다. 

"저도 예전에 밀짚모자가 하나 있었어요. 아는 아주머니가 쓰던 것을 물려준 것이었죠. 하지

만 아주 낡아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어요."

그녀는 다른 가지 하나를 꺾은 다음 덧붙였다. 

"그 모자의 챙 둘레에는 분홍색 리본이 둘러져 있었죠."

"미네소타에서 분홍색 리본이 달린 모자를 구하는 건 힘들 거요."

"상관없어요. 햇빛엔 곧 익숙해질 텐데요, 뭘."

애나는 쳐낸 잔가지를 모아서 장작으로 쓸 수 있도록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칼은 땀에 젖어 얼룩진 그녀의 겨드랑이를 보며 말했다. 

"제법 깊은 개울이 있소. 일이 끝나고 나면 그곳에 가서 땀을 식힐 수 있을 거요."

"얼마나 깊은데요?"

애나는 '땀을 식힌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물었다. 

무엇을 입는담?

"당신 키를 조금 넘길 거요."

"전 수영 못해요."

"내가 가르쳐 주겠소."

"물이 차갑나요?"

"샘물만큼은 아니오."

"아! 당연히 그래야죠!"

"그럼, 같이 가 보겠소?"

그녀는 가지를 쳐내던 동작을 멈추고 칼을 올려다보았다. 

"생각해 볼게요."

"당신, 정말로 목욕하는 것을 싫어하오?"

당황한 그녀는 다시 손도끼로 나뭇가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렇게 자주 목욕할 필요가 없었어요. 제 말은 아무도 우리에게 씻으라 마라 시킨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당신 어머니가 그런 얘기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애나의 손놀림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우리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셨으니까요."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애나와 제임스가 마지막으로 언덕을 내려왔을 무렵엔, 이미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길게 늘어

졌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에도 도통 힘이 없었다 그들은, 말을 몰고 조금도 피곤한 기색 없

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칼의 뒤에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지칠 대로 지쳐 보이는 두 신참을 쳐다보며 칼은 싱긋 웃었다. 

"집으로 들어가요. 절대로 불을 피울 생각은 하지 말고. 나도 말을 풀어 주고 나서 곧바로 

들어가겠소."

그는 두사람이 얼마나 고된 일과를 보냈는지, 얼마나 지쳐 있을지 알고 있었다.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하는 것은 모두 칼이 도맡아 했다. 그는 제임스에게 제대로 불을 피

우는 요령을 가르쳐 준 뒤, 애나에게는 스튜 요리법을 설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무

관심한 표정으로 그의 강의를 들었고, 간간이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사슴고기와 순무, 양파

가 벽난로 안에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칼은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져 있는 두 사람을 보

며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었다. 

"잠이 깨도록 무슨 수를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맛있는 스튜를 나 혼자서 다 먹어치우게 생

겼군. 혼자서 하는 식사는 이제 신물이 난단 말이오. 자, 자, 일어나요!"

그는 애나와 제임스를 흔들었다. 

"수영하러 갈 시간이야."

칼이 갈아입을 옷과 수건 대용으로 쓸 천 조각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전혀 호응하

는 기미가 없었다. 

"어서 일어나라니까. 수건을 준비해 가지고 나를 따라와요."

"칼, 당신은 자비심도 없는 고집쟁이예요!"

애나는 친근감이 넘치는 불평을 해댔다. 칼 역시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그래요, 잘 봤소. 그리고 당신은 곰팡내 나는 고집불통이지."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제임스에게 괜스레 쏘아붙이며 칼을 따라 나설 수밖

에 도리가 없었다. 

개울가의 둑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인디언과 짐승들이 오랫동안 드나들어 생긴 좁은 통행로

가 나타났다. 군데군데 놓인 바위사이로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은 제법 폭이 넓

었다. 

징검다리처럼 놓인 바위는 발을 적시지 않고 개울을 건널 때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칼은 비

버들이 나뭇가지로 둑을 만들어 제법 깊은 연못이 형성된 곳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무성하게

 자란 고사리와 양치류 식물들이 무릎을 스쳤고, 푹신한 이끼가 발 밑에 느껴졌다. 개울가에

는 보라색 제비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고, 키가 큰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서로 엉켜서 가지

를 물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애나는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이 끔찍하게 싫었다. 신기한 종족을 쳐다보듯 그녀가 칼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매일 이곳에 오나요?"

그는 벌써 셔츠를 벗고 있었다. 

"여름에는 매일 와요. 겨울에는 할 수 없이 스웨덴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면대에서 몸을

 씻지만."

"스웨덴에선 목욕에 대해 무슨 미신 같은 걸 믿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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