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86)

그는 곁눈으로 애나를 훔쳐 보았다. 

얼마나 큰 집이 될지 그녀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정도면 큰 거예요?"

애나도 그를 따라 낙엽송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대부분의 집들은 기껏해야 3, 4미터밖에 되지 않소. 집의 높이는 목재에 달렸다고 할 수 있

지 쓸 만한 낙엽송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가 중요한 거요."

칼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에겐 재목이 충분하오."

나무 밑등 쪽으로 시선을 내린 애나는 칼의 눈길과 마주쳤다. 

뭔지 모를 따뜻하고 정감 어린 느낌이 그녀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물론 흡족해요."

칼은 갑작스럽게 제임스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사람처럼 소년 쪽을 돌아보았다. 

"그만큼 일도 많을 거야. 자, 이젠 나무를 쓰러뜨리는 방법을 보여 주마."

그는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낙엽송 한 그루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나무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크기를 재고 쓰러뜨릴 방향을 정한 뒤, 위쪽에 난 잔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뜸을 들

인 뒤에 그가 말했다. 

"그래, 이게 좋겠다. 지름이 정확하게 30센티미터 정도는 될 거야. 기억해 둬라, 제임스. 재

목의 크기가 같으면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는 걸 말야. 그리고 나무를 자르기 전에 먼저 바람

의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해."

제임스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 대꾸했다. 

"바람이 하나도 없는데요."

좋아! 그렇게 확인하라는 말이야. 바람이 불면 그 방향에 맞추어서 도끼를 휘둘러야 한다."

애나는 나무를 베는 방법에 대한 기초 지식을 끈기 있게 설명하는 칼의 얘기를 건성으로 듣

고 있었다. 그녀는 나무 베기보다는 동생을 완전히 사로잡은 칼의 영향력에 더 호기심이 일

었다. 

제임스는 스승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빠짐없이 새겨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칼의 행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 제임스가 뭐라고 질문을 하자, 칼은 장화로 바닥에 깔린 낙엽을 쓸어 작은 공

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두툼한 가지 하나를 꺾어 들더니 무릎을 굽히고 앉아 흙바닥에 그

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덩치 큰 사내의 몸짓을 그대로 흉내내어 구부린 무릎에 한 쪽 팔꿈치를 기대고 앉은 제임스

를 바라보며 애나는 미소를 지었다. 

널찍한 칼의 등과 비교되어 동생의 가냘픈 뒷모습은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바닥에 그린 

그림은 베어낼 나무 어디에 도끼 자국을 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칼의 설

명이 이어졌다. 맨 처음 도끼질은 나무를 쓰러뜨릴 방향과 반대되는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 .

애나의 관심은 바닥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었다. 상체를 구부리고 앉아 열심히 설명하느라 칼

의 셔츠가 허리춤에서 빠져 나와 맨살이 조금 드러나 있었다. 쭈그리고 앉는 바람에 유난히 

근육이 두드러진 허벅지와 대조적으로 허리와 엉덩이는 보기 좋게 날씬했다. 

그가 흘긋 돌아보았다. 애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낙엽송을 쳐다보는 척했다. 

제임스는 쐐기 모양의 도끼 자국을 어느 곳에 얼마나 깊게 만들어야 하느냐고 물어서 가르치

는 이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칼은 소년을 보며 싱긋 웃은 다음 애나에게도 미소를 보냈다. 

"난 여기 오기 전에 스웨덴에서부터 나무들을 많이 베어 보았기 때문에 아는 거야. 그런 것

을 알려면 실습이 많이 필요하지,"

지칠 줄 모르는 제임스의 질문에 그는 한 번도 대답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애나는 그 점

이 놀랍고도 흐뭇했다. 상냥한 목소리뿐 아니라 얼굴에 나타난 표정에서도 그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애나가 글을 안다고 해도, 저런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는 편이 아이들에게도 

더 좋을 것이다. 그녀는 매사에 참을성이 부족했다. 칼이 흙바닥에 그린 엉성한 그림을 열심

히 들여다보며 그의 설명을 귀담아 듣고 있는 제임스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하게 빛이 났다. 

칼이 도끼 자루를 짚고 일어섰다. 일어서는 동작 하나까지도 우아했다. 그의 손끝엔 도끼가 

몸의 일부분처럼 들려 있었다. 대단히 크고 무거운 도끼였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재는 그

의 손놀림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도끼 자루를 자처럼 이용해서 거리를 재는 그의 팔뚝 안쪽

에서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가 첫 번째 도끼질은 허리 높이 정도에서 완벽하게 수평으

로 휘둘러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천천히 시범을 보였다. 칼이 도끼를 높이 들어올리자 셔

츠 아래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애나는 균형 잡힌 남자의 몸에서 얼마만큼의 힘이 솟

아나올지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문득 칼이 도끼 자루로 저만치 뒤쪽을 가리켰다. 

"이젠 누나를 데리고 저리로 가 있어. 나무가 쓰러질 땐, 대단히 위험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는 수도 있으니까. 쓰러진 통나무는 생각보다 빨리 튕겨 나가거나 구르거든. 옆에 

있다가는 꼼짝없이 일을 당하게 되지."

그가 파란 눈동자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으므로,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고 제임스를 따

라 움직였다. 

두 사람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고 나자, 칼이 목소리를 높였다. 

"숙달된 나무꾼은 나무가 정확하게 어디로 떨어질지 알아야해. 스웨덴에서는 예상되는 자리

에 나뭇가지를 올려놓고 얼마나 정확하게 맞추는지 내기를 하지."

그는 짓궂은 소년처럼 미소를 지으며 도끼로 저 멀리 땅위로 솟아오른 뿌리를 가리켰다. 

"저기 참나무 뿌리 보이지? 이 나무가 떨어지면서 저 뿌리를 반으로 갈라 놓을 테니 두고 봐

."

칼이 다시 낙엽송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도끼질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애나는 마법에 사로잡

힌 것 같았다. 그는 나무의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찍었다.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그의

 율동은 매번 정확하고 틀림이 없었다. 도끼가 나무의 좌우에 내리꽂힐 때마다 나무 부스러

기가 공중으로 높이 튀어 올랐다. 도끼질의 규칙적인 리듬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고, 나무 

등치를 향한 그의 시선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도끼날 의 울음소리와 나

무에 가해지는 충격이 듣기 좋은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들렸다. 

쐐기 모양이 양쪽으로 점차 깊어지면서 나무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애나와 제임스는 나

무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떨림은 애나의 뱃속에서도 시작되었다, 남자와 도끼와 나무가 한 

몸이 되어 연출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애나는 심장이 졸아드는 긴장감을 맛보았고, 자신도 모

르게 두 손으로 배를 힘껏 움켜 쥐고 있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자 나무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더니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칼은 도끼를 들어 나무를 한 번 힘껏 밀고 난 다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턱을 치켜 들

고, 몰아지경에 빠져 구경하고 있는 두 사람을 돌아다보았다. 애나는 배를 움켜 잡고 있었고

, 소년은 두 손을 머리 위로 깍지 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굉음을 내며 나무가 땅에 떨어

져 참나무 뿌리를 산산조각 냈다. 

놀란 말들이 힝힝거리는 소리를 멈추자 사방이 고요에 휩싸였다. 뽀얗게 피어오른 먼지를 비

추는 햇살 사이로, 애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자신을 바라보는 칼을 마주보았다. 그는 누군

가 다른 사람이 베어 쓰러뜨린 나무를 구경하듯 조금도 지친 표정 없이 느긋하게 서 있었다 

한 손에 도끼 자루를 쥐고 어깨에 뽀얀나무 먼지를 얹은 그의 모습은 평화롭기까지 했다. 달

콤하고 싱그럽고 생명력 넘치는 낙엽송 냄새가 그윽하게 퍼져 나갔다. 

뻐근한 감동이 애나의 가슴에 피어올랐다.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완전한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칼 린드스트롬은 그녀의 표정에 스치는 환희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나무가 지면에

 닿으며 멀리 떨어진 참나무의 뿌리 등걸을 으스러뜨리는 순간, 그가 느낀 충일한 만족감을 

애나 역시 느꼈던 것이다. 

제임스가 제일 먼저 최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애는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칼에게로 달려갔

다. 

"우와! 정말 대단해요! 난 언제 그렇게 할 수 있죠?"

칼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도끼 자루로 소년의 배를 꾹 찔렀다. 

"기지도 못하면서 날고 싶은 게로구나 우선은 곁가지들을 잘라내는 걸 도와줘야겠다. 나무를

 다듬은 뒤 공격을 해야 하거든."

"공격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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