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86)

그들은 식탁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벽난로에서 이글거리는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반

만 비추었기 때문에 나머지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는 서로에 대해서 

차차 알아 가야 할 두 사람의 미래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애나가 먼저눈길을 떨구었다. 

"아무래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차츰 좋아지겠죠."

칼은 그녀에게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신도 피곤하겠지?"

애나는 소스라치듯 놀라 제임스를 돌아보고 나서, 우물쭈물 대답했다. 

"네, 약간요."

"물이 다 데워진 것 같소."

멍청한 놈 같으니라구 당연히 물은 데워졌겠지. 차를 우려낼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잖아.

칼은 또다시 낭패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검은 솥을 쳐다보

았다. 

"하지만, 집에서 만든 양잿물 비누밖에 없소."

"아, 괜…… 괜찮아요."

그러나 그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애나 역시 의자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대야는 밖에 있는 벤치 위에 있어요. 더운물을 거기에다 옮겨주겠소."

"고마워요."

칼은 둥근 손잡이가 달린 솥을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밖으로 나갔을 때, 칼은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세수를 하고 대충 몸을 씻었다. 원래부터 목욕하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 하기는 했지만, 오랜

 여행으로 인해 찌든 먼지를 닦아 내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그녀는 마당 쪽을 살펴보았지

만, 어둠 속에 날아다니는 개똥벌레만 보일 뿐이었다. 헛간 쪽에서 희미하게 말 울음 소리가

 나더니 금세 사위가 조용해졌다. 

집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 애나는 나무 상자에서 잠옷을 꺼내 입었다. 어색하게 선 채로,

 그녀는 바닥에서 자고 있는 제임스와 침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침대

로 다가가 물소 모피를 들춘 뒤 한 쪽 다리를 올려놓았다. 침대에서 나는 와사삭 소리에 그

녀는 움찔했다. 

세상에나, 이 소리는 또 뭐람!

그렇다고 달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마른 잎이 사각거리

는 소리를 무시하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문이 열리고, 칼이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에 빗장을 질렀다 스위트 클로버의 꽃 묶음은 어제 

아침에 그가 놓아 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침대 곁으로 다가온 칼이 마른 꽃 뭉치를 집어 

들었다. 

"이건 스위트 클로버요."

어눌하게 그가 말했다. 

"냄새가 좋네요."

"미네소타에서 제일 향기가 좋은 꽃이오."

말을 마치고, 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 애나, 순전히 당신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놓아 둔 것뿐이었소. 하지만 아무래도 잘못 생

각한 것 같아. 어쩌면…… . 당신을 겁먹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소."

그가 손에 든 꽃 묶음을 내려다보았다. 

"아,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몸은 물소 가죽 이불 아래에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칼은 몸을 돌려 난롯가로 다가가더니 화덕 안으로 스위트 클로버를 던졌다. 애나는, 한 순간

 방을 환하게 밝히며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검은 그림자뿐인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

으려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는 양손을 허리에 짚고 서서 묵묵히 불길을 들여다보고 있었

다. 조금 뒤, 그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공연히 석탄을 뒤적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할 일

도 없었고, 침대 말고는 달리 갈 곳도 없었다. 그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고는 벽

난로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애나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소리 없

이 옷을 벗은 후 침대의 빈 공간으로 들어갔다. 마른 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그의 몸무게로 인해 침대가 한 쪽으로 기울었다. 애나는 그에게로 굴러가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힘을 주어야 했다. 

두 사람은, 천장을 길게 가로지르는 통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란히 누워 있었다. 마침내 칼이 

애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의 옆모습을 관찰하며 낮게 속삭였다. 

"아직 불빛이 있을 때 나를 봐요, 애나."

문득 공포의 그날 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칼의 말에 따랐다. 칼 

린드스르롬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를 썼지만, 자꾸만 사울 맥기버와의 참담했던 기억

이 떠올라 수치심에 몸이 떨려 왔다. 

칼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이 이렇게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소. 처음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모두 잊기로 합시다. 앞으로 당신과 내가 함께 잘해 나갈 수 있을 거요."

애나는 밀려드는 두려움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불편했으므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칼은 자신의 심정을 애나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애나의 손을 살며시 잡아 두근

거리는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그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깜짝 놀랐다. 

"당신은 너무 어려요, 애나. 열일곱이란 나이는…… 아무래도 나한테는 어린 소녀처럼 느껴

지니…… ."

"열일곱이면 어른이에요."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칼은 그녀가 자신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정말로 이해하는지 의아스러웠다. 

애나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단지 아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남편에게 그런 식으로 대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신부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칼의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 악몽과도 같았던 그날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공포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적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애나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 나갔다. 

"열일곱 살에 결혼한 친구도 많아요."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친구랄 것도 없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단정치 못한 여자들은 대개 

열일곱은커녕 서른, 마흔이 되도록 결혼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애나, 스웨덴에서는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기도 전에 결혼하기로 합의하는 일 같은 건 있을 

수도 없소. 우리가 스웨덴에 살고있다면, 아마 난 마을 어딘가에서 당신을 처음 만나게 되겠

지, 난 아마 당신에게 머리를 묶는 실크 리본 따위를 선물할 거요. 그러면 당신은 그 선물을

 받을 것인지 다시 돌려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거요. 당신이 미소를 지으며 리본을 받아 허리

띠에 매단 자그마한 주머니에 집어넣으면, 그때야 난 우리 부모님에게 당신을 데려가 인사를

 시킬 수가 있소. 난 스칸에서 우리 형님들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가씨에게 데이트를 신청

하는 내 모습을 언제나 상상해 왔소."

칼은,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진 애나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애나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침대에서의 남자는 무조건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다고 배워

 왔다. 그러나 지금 곁에 누워 있는 남자는 예외인 것 같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칼의 심장은 자신과 똑같이 불안한 듯 두근거리고 있었고, 그의 행동에선 수줍음과 머뭇거

림이 느껴졌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비슷한 상상을 했었어요."

이상스레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녀가 털어놓았다. 

"그랬을 거요, 소녀라면 누구나 그럴 테니까. 난 단정하게 땋아 내린 금발 머리 위에 풀먹인

 하얀 주름 모자를 쓰고 자수가 놓인 앞치마를 두른 아가씨와 성 요한 축제일에 결혼하는 꿈

을 꿔왔소. 물론 그곳엔 나의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자리해서 즐겁게 웃으며 춤을 추곤 했지."

그의 목소리가 꿈을 꾸는 듯 아련한 그리움에 잠겼다. 

애나 역시 목마른 듯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어린 시절 훔쳐 보았던 춤과 웃음은

 행복한 가정의 표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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