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86)

제임스는 칼을 돕겠다며 집 밖으로 달려나갔다. 식탁 의자로 옮겨 앉은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양손을 끼고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줄기째로 말려져 헝겊 주머니에 담긴 꽃묶음으로 시

선을 옮겼다.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애나는 작은 감동과 전율을 동시에 느꼈었다. 

그녀는 칼을 생각했다. 맨 처음 그녀의 거짓말이 탄로 났을 때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불쾌감, 그 이후의 이해와 용서, 이따금씩 느껴지는 머뭇거림,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 같은 

그의 친절함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애나는 꽃을 꺾으러 다니고,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오두

막을 정돈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스스럼없이 '우리 애나'라고 말하던 그의 다정한 말투

에 그녀는 소름이 돋았었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 팔을 문질렀다. 그리고 향기나는 스위트 클

로버를 찾아 헤매는 칼의 모습을 상상하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 남자는 함부로 아내를 침대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에게 했던 환영의 말도 이제 생각하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는 모

든 것이 이제 그녀의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었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한 지참금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서슴없이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가져 온 지참금은 오로

지 속임수뿐이었다.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칼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애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누워,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비밀이 탄로 나는 순간을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칼 린드스트롬은 절대로 순결을 잃은 아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물통을 어깨에 메고 들어와 문 근처의 바닥에 내려놓고는 돌아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애나, 당신 떨고 있군. 어서 불을 피워야겠소, 여름에도 집 안은 언제나 이렇게 선선해요. 

진흙 때문일 거요. 밖이 더 따뜻한데 나가 있지 그러오?"

"칼?"

애나는 머뭇머뭇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이 획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니,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난로는 없나요?"

"난로가 필요한 적이 없었소. 이 벽난로 하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난방과 요리는 물

론이고, 약초 말릴 때, 물을 데울때, 비누를 만들거나 왁스를 녹일 때에도 아주 그만이오. 

난로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모리셋네 가게에서 팔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비싸거든."

애나는 앞이 캄캄했다. 서툴게나마 흉내라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요리는, 이렇게 무지

막지한 벽난로에 걸린 무쇠 솥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동부에서처럼 난로에 그럴듯한 프라이팬

이나 냄비를 올려놓았을 때나 가능했다. 

칼은 한동안 그녀를 관찰했다. 

그는 벽난로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길고 지루한 겨울 밤에도 벽난로에서 이글거리는 불길

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땅에서 베어낸 나무로 생겨난 

불길이라고 생각하면 흐뭇하기까지 했다. 

애나가 도착하는 첫날밤에 대해서도 그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장작을 많이 넣어서 불길을 높이고 벽난로 앞에 물소 가죽을.깐 다음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

히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는 참으로 황홀했었다. 집이라면 당연히 벽난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 그의 생각이었다. 사랑이 가득한 집이라면 더욱더 그랬다.

"그럼, 당신은 난로가 필요하단 말이오?"

애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하나 있으면 좋겠네요."

"통나무집을 짓고 나면 생각해 보겠소."

그녀가 미소를 짓자 칼은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자, 난 장작을 가져 올 테니 당신은 불쏘시개로 쓸 나무 부스러기들을 모아 봐요."

그는 애나에게 버들고리로 짠 바구니를 건네주며 밖으로 이끌었다. 

제임스가 마당 저편에서 소리를 질렀다

"헤이, 칼, 저쪽 밭에 있는 것들이 단 뭐예요?"

"여러 가지가 조금씩 있어."

칼이 마주 소리쳤다. 그는 소년이 자신을 칼이라고 부르는 게 듣기 좋았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요?"

제임스가 다시 물었다. 

"그건 다 순무야."

"모조리요?"

"음, 모조리 다. 하지만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지 마. 누나가 도망쳐 버리겠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곁눈으로 슬쩍 애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애나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서 진심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완두콩이랑 강낭콩도 있는 것 같아요."

제임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쪽 끝에는 수박도 있지. 너 수박 좋아하니?"

"수박이라구요? 정말요?"

팔을 휘저으며 제임스는 채소밭의 끝 쪽으로 달려갔다. 

"누나, 들었어? 수박도 있대!"

칼은 껄껄 웃으며, 신나게 달려가는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저 앤 별것 아닌 것에도 흥미를 느끼나 보오."

"네, 제임스는 이곳이 당신만큼이나 마음에 들고 행복한가 봐요."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나무 부스러기를 

골라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집 안으로 돌아온 칼은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벽난로 앞에 앉았다. 애나는 속살이 흰 장작을

 가운데가 비도록 조심스럽게 쌓아 올리는 그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장작 쌓기가 끝나자 그

는 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바구니를 건네주는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래도록 교

차했다. 그는 재를 양동이에 담고 재 밑에 숨어 있던 석탄 덩어리를 꺼내 귀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옆으로 밀어 둔 다음, 두 손으로 톱밥을 퍼서 가지런히 펼쳐 놓았다. 

애나는 그가 몸을 수그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유심히 내려다보며, 그가 움직일 때

마다 팽팽하게 솟았다가 내려앉는 근육의 율동을 감상했다. 

"촛불을 건네줘요."

애나가 촛대를 전했다. 두 사람은 교묘하게 손이 닿는 것을 피했다. 

그는 다시 벽난로를 향해 쭈그리고 앉아서 신중하게 불을 붙였다. 꼼짝도 하지 않고, 피어오

르기 시작한 불길을 바라보다가 톱밥을 좀더 뿌렸다.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그는 마치 생각에 잠긴 동상 같았다. 불빛에 비친 그의 금발 머리가 불길처럼 찬란했다. 

"당신의 소지품을 나무 상자에 넣도록 해요."

이윽고 그가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별로 많지 않아요."

"그렇게 해요. 공간은 충분하니까. 그 안에 넣어 두면 습기가차지 않소. 제임스의 물건도 함

께 넣어 둬요."

그는 등뒤로 그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상자의 뚜껑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

가 났다. 불길은 이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애나를 향해 돌아섰다. 

"샘터를 보러 가겠소? 아주 근사한 샘이오. 근처엔 맛있는 양갓냉이(샐러드용으로 많이 쓰임

)도 많소."

바보 같은 녀석, 멍청한 얘기만 하고 있군.

칼은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샘터 얘기를 꺼낸 것은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

다. 직접적으로 목욕 얘기를 꺼냈다간 애나가 무슨 오해를 할지 몰라 애꿎은 양갓냉이를 끌

어들였던 것이다. 첫날밤의 준비를 위해 깨끗하게 목욕할 것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았다. 

"양갓냉이는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무슨 맛이죠?"

옷 정리도 거의 끝났으므로 애나는 남편과의 대화에 집중해야했다. 

"글쎄…… 그냥 양갓냉이 맛이오. 약간은 케일 맛과 비슷하기도 하고, 샐러리 맛도 조금 나

…… . 하지만 특유의 맛이 있어요. 다른 채소보다 훨씬 달콤하지."

멋쩍은 표정으로 설명을 늘어놓던 칼이 석탄 덩어리를 집어 들더니, 밖으로 향하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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