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86)

제임스의 질문에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칼은 홉이 이스트를 만들 때 필요한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매년 여름이면, 1년 동안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홉을 수확해 두어야 한다고 했다. 

"이곳에선 여름 내내 야생 홉을 딸 수가 있단다. 하지만, 아직은 일러서 덜 여물었을 거야. 

마침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지나는 길에 한 번 살펴보자구. 언제쯤 따러 오면 되나 봐 두는 

거지."

칼은 지금까지 지나온 곳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길에 마차를 세웠다. 

"어딘지 어떻게 알죠?"

애나가 물었다. 

그가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칼자국을 만들어 두었소. 홉은 참나무 숲 근방에 많이 자라는 특성이 있지."

나무 껄질이 하얗게 벗겨진 곳에, 길 안쪽을 가리키는 화살표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길에서

는 보이지 않지만, 야생 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을 칼이 발견하고 표시를 해둔 곳이었

다. 그는 덤불 사이로 두 사람을 안내하며 총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지나가

기 수월하도록 이따금씩 늘어진 나뭇가지를 들어 올려 주었고, 뿌리가 높이 솟은 양딱총나무

 아래를 지날 때는 애나의 치맛자락이 걸리지는 않는지 곁에 서서 지켜보았다. 

분홍색 꽃이 발밑에 떨어져 있고, 꽃이 떨어진 부분에는 연두색의 작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리고 손으로 나무 뿌리를 짚으며 낮게 드리워진 가지를 피해 옆으로 고

개를 돌리다가 그의 파란 눈과 부딪칠 것처럼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조심해요."

애나는 고개를 돌렸다. 염려와 걱정이 담긴 간단한 말 한마디에 그녀의 가슴이 감동으로 물

결쳤다. 지금까지 그녀의 안전과 불편을 진심으로 염려해 준 사람이 과연 있었던가. 그녀는 

괜스레 계면쩍어져서 말을 걸었다. 

"이게 무슨 나무죠?"

"양딱총나무요."

"뭐에 쓰는 나문데요?"

"별로 쓸모는 없소."

그는 애나의 뒤를 따라 걸으며 대답했다. 

"가을에 열매가 열리긴 하지만, 너무 써서 먹지는 못해요. 달콤한 열매들이 널려 있는데 쓰

디쓴 열매를 먹을 필요는 없지."

"어떤 게 있는데요?"

"아주 많아요. 산딸기, 나무딸기, 검은딸기, 구즈베리, 체리, 포도, 블루베리 등등. 내가 제

일 좋아하는 건 블루베리요. 난 야생과일이 이렇게 많은 땅을 본 적이 없소. 여기선 블루베

리가 자두만하게 자라지. 아, 그러고 보니 야생 자두도 있군."

드디어 홉이 자라는 곳에 당도했다. 양딱총나무의 낮은 가지에 덩굴을 엮으며 포도송이 모양

의 이파리들이 폭포처럼 달려 있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열매를 바라보며, 칼은 흐뭇하게 미

소 지었다. 

"올 여름엔 홉이 풍년이겠군. 우리 애나가 싫어하는 순무를 먹지 않아도 되겠는걸."

칼의 마음속에선 이미 익숙해져 있던 호칭이 대책없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애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칼은 황급히 홉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시치미를 떼었다. 그러다가 크고 잘생긴 잎 하나를 따

며 말했다. 

"이걸 잘 봐 둬요. 이렇게 생긴 잎을 보면 그 장소를 잘 기억해두고. 그러면 홉을 따러 이렇

게 멀리까지 나오지 않아도 될 테니까. 어쩌면, 우리 집 근처에서도 찾아낼 수 있을 거요."

우리 집!

애나는, 낯설면서도 가슴 설레게 하는 그 단어를 생각하며 칼을 홈쳐 보았다. 하얀 셔츠의 

깃 사이로 목 언저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수줍은 듯 눈길을 내리깐 채 이파리를 만

지작거리고 있었다. 애나는 불쑥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잠깐 

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칼이 멋쩍은 듯 그녀에게 이파리를 건넸다. 애나는 그의 해맑은

 눈동자를 한동안 마주 보다가 살그머니 시선을 내리깔고 나뭇잎을 어루만졌다. 

칼은 주근깨가 소르르 뿌려진 그녀의 콧등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속눈썹이 눈망울에 그늘

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서서 자신의 판자집과, 환영의 표시로 준

비해놓은 스위트 클로버 주머니를 떠올렸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는 비참한 마음으로 후회했다. 그 당시에는 기발하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은 멍청하고 속보이는 짓인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떠나는 게 좋겠소."

커다란 버섯을 신기한 듯 관찰하고 있는 제임스를 살피며, 칼이 조용히 말했다. 그는 순간적

으로 소년이 그곳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 애나의 발그레한 뺨을 만져 볼 수 있었을 텐데.

애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이유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다시 나뭇

잎에 마음을 집중했다. 

칼은 목청을 가다듬고 제임스에게 소리쳤다. 

"너도 잎을 하나 따 봐라, 제임스. 오늘의 두 번째 수업이다."

그런 다음, 그는 방향을 돌려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애나의 귀여운 콧날과 금빛 주근깨

의 영상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클로버, 사각거리는 침대

해질녘이 가까워서야 그들은 칼의 오두막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촘촘히 들어선

 나무가 비좁은 길을 터널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이랴, 너희들도 지루하지? 집이 가까워진 걸 아는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우리를 내버려 두

고 도망가면 안 된다,벨 서두르지마. 길이 좁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잖니. 조금만 참고 

천천히 가자, 빌."

애나와 제임스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짐승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놀랍게

도 빌은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칼을 쳐다보았다. 

제임스와 애나는 금세 나타날 것만 같은 집에 대한 기대로 목을 길게 빼고 앞을 바라보았다.

 칼은 큰길을 빠져나오면서부터 나무 한 그루, 흙 한 줌, 풀 한 포기까지 모두 자신의 소유

라고 설명해 주었다. 애나는 하찮은 생물들조차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새순이 돋아나고 

땅에 떨어진 나뭇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끊임없는 윤회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자연의 그

윽한 향기가 고즈넉하게 주위를 감돌았다. 

이제는 그녀의 나무이고 땅이기도 했다. 기쁨과, 어쩌면 슬픔이 함께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보금자리였다. 애나는 난생 처음으로 소유하게 된 재산을 머릿속에 새겨 넣으

려는 듯 스쳐 지나가는 광경을 눈여겨 보았다. 갑자기 길이 확 트이더니, 눈앞에 집이 나타

났다. 

나무를 베어낸 넓은 땅 한 켠으로, 통나무를 잘라 울타리를 두른 채소밭이 보였다. 돼지로부

터 순무를 보호하기 위해 촘촘히 박아 놓은 통나무 울타리를 보며 애나는 미소를 지었다. 

큼직한 나무 판자를 이어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떼를 입힌 오두막이 채소밭 왼쪽으로 보였

다. 한 쪽 벽에서 이어져 올라간 굴뚝은 돌로 만들어졌고, 꼭대기에는 통나무가 가지런하게 

얹혀져 있었다. 정면 벽 쪽으로 작은 창문이 두 개 나 있고, 그 사이에 위치한 문에는 굵은 

통나무가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칼이 2년 동안이나 살았던 집이건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애나는 적지않이 실망했다. 오두

막은 형편없이 작고 엉성했다. 그러나 자신의 보금자리가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 있는지를 

살펴보는 칼의 눈빛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오두막 옆으로는, 어마어마한 장작 더미가 쌓여 있었다. 자로 잰 듯이 정확한 길이와 두께로

 나무를 쪼개서 한 줄도 흐트러짐 없이 쌓아 놓은 칼의 솜씨가 경이로웠다. 그 옆으로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중앙에 진흙으로 만든 굴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훈제실인 모양

이었다. 통나무를 세우고 두툼한 나무 껍질을 얹은 마구간도 보였다. 주변을 돌아보며, 그녀

는 남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곳에서 살아 남는 방법을 배울 일이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