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86)

칼은 애나의 곁에서 앞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소년을 건너다보았다.

"스스로 편지를 쓸 수가 없으니까 아이에게 거짓말을 쓰도록 시켰다는 말이군?"

"시킨 건 아니에요."

"시킨 게 아니면 뭐란 말이오? 편지 쓰기 수업이라도 했다는 건가?"

"우린 그저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을 뿐이에요. 어떻게든 보스턴을 벗어나서 살길을 찾아

야 했으니까요. 신문에서 당신의 광고를 보고 나에게 읽어 준 것도 제임스였어요. 우린, 당

신이 나와 결혼할 마음이 들도록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죠."

"그래서 칼 린드스트롬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 독실한 천주교 신자에다, 읽을 줄도 쓸 줄도

 알고, 요리는 물론이고 비누를 만들거나 정원을 가꿀 줄도 아는 스물다섯 살짜리 여자를 함

께만 들어 낸 것이로군."

죄를 지은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그럼, 우리의 아이들에게 글은 누가 가르친단 말이오? 들판에서 일하다 말고 내가 집으로 

돌아와 직접 가르쳐야 하나?"

거리낌 없이 아이들을 운운하는 그의 언사에 애나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지체없이 응수했다.

"제임스가 하면 되잖아요."

"제임스는 숲속에서나 들판에서 나를 도와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했잖소. 그애가 무슨 재주로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지?"

그녀는 할말이 없었다. 

"제임스는 글을 아는데 어떻게 당신은 모를 수가 있소?"

"우리 어머니는 가끔씩 양심에 거리낄 때에만 동생을 학교에 보냈어요. 하지만 계집아이는 

글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나를 그냥 내버려 둔 거예요."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가끔씩, 그것도 양심에 거리낄 때에만 학교에 보낸단 말이오? 양심에

 거리낀단 말은 또 무슨 뜻이지?"

이번엔 제임스가 나서서, 애나로 하여금 또 다른 거짓말을 지어내야 하는 순간을 모면하게 

해주었다. 

"우린 바바라가 아파서 죽기 전에도 무척이나 가난했어요. 게다가 대부분 바바라의 친구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내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지요. 하지만 가끔은 일을 하기에 내가 너

무 어리다고 생각했는지, 하여간 그때는 학교에 보내 주었어요. 그것도 겨우 읽고 쓸 정도밖

에 다니지 못했지만……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칼이 물었다. 

"바바라라니? 바바라가 누군데?"

"우리 엄마 이름이에요."

"어머니를 바바라라고 불렀단 말이니?"

칼은 어머니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는 아이가 있다는 것조차 상상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어머니가 그런 자식을 내버려 둔단 말인가.

그러나 두 남매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보스턴엔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을 빠져 나와야 했다고 하지 않았니?"

"마, 맞아요. 제 말은 그러니까…… 저…… ."

"저, 뭐야? 사실대로 말해 봐. 일을 했어, 안 했어?"

제임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주로 소매치기를 했어요."

칼은 어안이 벙벙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는 이 어린아이가 범

죄를 저지르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힘없이 

앉아서 앞으로 펼쳐진 좁은 길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의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아셨소?"

칼은 애나의 표정에 거짓말의 기운이 나타나는지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미

도 보이지 않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파에 시달린 여인의 서글픈 표정이 떠올랐을 뿐이

었다. 

"아셨어요. 사실 어머니라고 할 수도 없었죠."

애나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허탈한 슬픔이 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자조적인 그녀의 말투

에, 그는 그런 어머니를 둔 두 남매가 퍽이나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따스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의 중심이었고, 언제나 정직한

 마음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가르쳐주었던 어머니였다. 칼은, 애나와 제임스의 선생이 되어야

 할 거라던 피에럿 신부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들의 불성실한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 못했던 

소중한 가치들을 이제 그가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곳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네가 소매치기 할 만한 사람들은 없을 거야. 그 대신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정직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 어떻게 배웠는지

는 몰라도, 소매치기 따위를 잊어버리기엔 아주 좋은 곳이 될 거야."

누나와 동생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칼을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

닫자 두 남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애나는 칼의 옆모습을 새삼스럽게 감상했다. 흠잡을 

데 없이 곧게 뻗은 콧날, 보기 좋게 그을은 뺨, 햇빛에 바래어 은빛을 머금은 금발 머리가 

살짝 뒤덮인 귀와 목덜미, 방금 전에 그녀의 입술을 스쳤던 그림 같은 입술…… ."

아, 그는 참으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인간이 이토록 훌륭할 수 있을까. 얼마나 높은 인격을 

지녔기에 매번 난관이 닥칠 때마다 그처럼 놀라운 인내심과 이해력을 보여 주는 것일까.

그가 홀깃 애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칼의 입술에 살짝 떠오른 미소를 보았다. 하

지만 그는 곧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숲속으로 이어진 길을 쳐다보았다.

애나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여름날의 향긋한 대기에 실려 날아

간 기분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무수한 바퀴 자국이 남겨진 오솔길을 향해 미

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했다. 

마차는 온통 싱그러운 초록으로 뒤덮인 숲속을 지나고 있었다. 

초록색 담벽처럼 이어진 나무 사이로 군데군데 무성한 목초가 땅을 덮고 있었다. 거대한 폭

포처럼 높이 솟아 서로 맞닿은 나뭇가지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조각나 보였다. 애나는 고개

를 젖히고, 에메랄드빛 지붕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는 나무 터널을 올려다보았다. 

칼은 활처럼 휘어진 그녀의 목덜미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미네소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오?"

"당신 말이 맞았어요. 평원보다 좋은데요."

"물론, 훨씬 더 좋지."

칼은 그녀의 대답에 아주 흡족해했다. 

"이곳의 숲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나무란 나무는 모두 다 있소. 우선, 단풍나무가 있지. 

우리 땅에는 단풍나무가 셀 수도 없이 많아요. 모두가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당밀로 가득 차 있소."

그가 애나의 코 앞쪽으로 긴 팔을 뻗었다. 

"저기 보이오? 저것이 백 단풍나무요. 매년 풍성한 재목과 열두통의 시럽을 내게 안겨 주지.

 단풍나무를 자를 때면 언제나 놀라움을 느끼곤 해요. 아주 단단하거든. 그래서 잘 다듬고 

광을 내면 거울처럼 반들거려요."

애나는 한 번도 나무를 나무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나무를 친구처럼 얘기하는 칼의 설명이 흥미로웠다. 깊은 숲속으로 조금 더 들어갔을

 때, 그가 다시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저 나무 보이오? 쥐엄나무요. 곧게 자라서 부드럽게 잘 쪼개지는 것이 특징이지. 그리

고 저쪽에 밤나무 보이오? 그것도 곧게 잘 쪼개지지. 그래서 쟁반처럼 평평한 판자를 만들 

때 쓰곤 해요."

갑자기 오솔길 양쪽으로 나무가 뜸해지더니 뜨거운 햇살이 내리비치기 시작했다. 애나는 손

바닥으로 얼굴 위에 그늘을 만들고 칼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콧잔등을 

찡그린채 귀엽게 미소 짓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조금도 나무 얘기를 지루해하거나 어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를 더 기쁘게 할 수 있을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애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 다른 종류의 나무를 찾아낸 그녀가 그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뭐예요?"

칼이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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