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86)

안 되네, 칼. 난 이 결혼의 증인이 될 수 없네.

그러나 두 사람이 이미 서로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마당에 증인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는 일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들 이미 결혼에 동의한 이상 신부는 두 사람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애나는 예정대로 식이 거행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릎이 떨리고 입 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곁에 서 있는 남자에게 이

 은혜를 갚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제단을 향해 걸어가는 칼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결혼 서약을 앞둔 남자의 마음에

는 이처럼 차가운 분노가 아니라 따뜻한 평화가 깃들어야 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

랑을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데, 불길한 예감과 불신이 깔린 결혼의 언약이 칼에게는

 무척이나 버거웠다. 

신부는 미사복을 입고, 영대(미사복 위에 두르는 넓은 허리띠)를 둘렀다. 모든 예식의 준비

가 완료된 셈이었다. 

"제임스도 우리 결혼의 증인이 될 거예요."

애나는 조금이라도 칼을 기쁘게 하려는 심정으로 조그맣게 얘기했다. 그러나 칼은 단단히 화

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목소리

에도 여느 때의 노래하는 듯한 음조가 사라지고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채로 서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며, 피에럿신부는 식을 거행하기 전에 뭔

가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갑작스레 피어오른 적대감이 그에게도 느껴졌다. 

칼은 일자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애나는 성 프랜시스 상의 발 밑에 놓인 노란 백합과 야

생 장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가 입을 열었다.

"애나, 당신은 아직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여기 있는 칼과 결혼을 하면 당

신은 대단한 책임감을 떠맡게 되는 거요. 두 사람의 앞길에는 긴 인생이 놓여 있고, 당신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행복한 인생이 될 수도 불행한 인생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행복은 서

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것이오. 존중하는 마음은 믿음에서 생기는 것이고…… 

.그리고 믿음은 진실을 뿌리로 해서 자라나는 거예요. 당신은 칼에게로 오기 위해서, 양심에

 가책을 받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그에

게 진실해야 해요. 지내보면 알겠지만, 칼은 아주 이해심이 많고 훌륭한 젊은이요. 게다가 

그는 명예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다시 한 번 당부하지만, 언제나 진실하게 행동하

는 것이 좋을 거요. 칼을 남편으로 받아들여 사랑과 명예와 복종을 맹세하는 지금 이 사실을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 두는 것 잊지 말아요."

애나는 천진한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네, 신부님. 벌써 그렇게 한걸요."

피에럿 신부는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대답에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칼 역시 곁눈으로 

그녀를 훔쳐 보고 있었다. 

"좋아요. 계속해서 그래야지. 그리고 칼, 자네에게도 주의를 줄 게 있네. 이제 애나를 보호

하고 부양할 책임이 자네의 어깨 위에 놓여지는 걸세, 뿐만 아니라 이 거친 땅에서 어린 제

임스를 돌볼 책임까지 떠맡게 되는 거지."

칼은 소년을 돌아보았다. 제임스와 시선이 부딪치자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저들에게 아주 낯설고 힘들 거야. 배울 것도 많겠지. 무엇보다도 자네에

겐 인내심과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할 걸세. 다행히 자네는 천부적으로 아는 것이 많으니까 

무엇이든 그들에게 손쉽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자네는 저들의 보호자일 뿐만 아

니라 남편이고 아버지이고 선생님의 역할까지 떠맡아야 하네. 때로는 그 짐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오늘의 서약을 기억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신부님,"

"지금까지 자라 온 환경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니까 간혹 두 사람이 의견의 대립을 볼 때도 

있을 거야. 지금 한 얘기를 명심하고, 불화가 오래가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길 바라네. 두 사

람 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신부님"

두 사람이 동시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시작하세."

피에럿 신부가 라틴어로 기도를 시작했다. 

노랫가락처럼 나직하게 읊조리는 신부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애나는 지난날의 비참했던 생

활을 떠올렸다. 저녁이면 손님을 맞아야 하는 창녀들의 눈치를 보며 술집 한 구석에 틀어박

혀 있다가 술에 취한 남자 손님들의 발길질도 감수해야 했다. 운이 나쁘면, 아예 쫓겨나 자

정이 넘도록 시끄러운 골목길을 이리저리 배회하거나 건물 뒤의 담벼락에 기대어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그녀는 서글픈 과거의 기억에서 빠져 나오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다시는 집 없이 방황하는 일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일도 없으리라.

칼 린드스트롬의 굳은살 박힌 커다란 손에 자신의 손을 맡기고 서서, 애나는 그의 성실하고 

진지한 삶의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명예를 소중히 하는 이 건장한 남자는 절대로, 절대로 그녀가 했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

이다. 따스한 그의 손바닥은 참나무처럼 단단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아귀 힘

에서 애나는 그의 약속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그의 파란 눈동

자와 감각적인 입술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몇 달 동안이나 꿈꾸고 계획하고 소망해 오던 모든 일들이 이제 그의 맹세를 통해 현실로 이

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나, 칼은 그대, 애나를 합법적인 아내로 맞아 오늘 이 시간부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유

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 그 순간까지 함

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속삭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귀여운 빨간 머리 아가씨,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 지금까지는 슬픈 일도 많

았겠지만, 이제 우리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당신과 함께라면

 진정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거요. 이 가느다란 손가락이 튼튼하게 되도록 만들어 주

겠소. 신부님 말씀대로 한평생 인내하며 살겠다고 내 인생을 걸고 맹세하오.'

애나는, 열려진 문틈으로 빠끔이 들어오는 금빛 햇살이 칼의 얼굴을 비추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피에컨 신부가 못다한 축복을 자연이 선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친 땅에 세

워진 초라한 교회의 제단에는 야생화만 몇 송이 꽂혀 있고, 들려오는 소리라곤 아침 일찍 일

어난 비둘기의 낮은 울음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애나에게는, 고색 창연한 대형 성당에서 수백

 명의 성가대가 두 사람을 위한 축가를 부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짙게 그을은 커다란 손에 

얹혀진 자신의 하얗고 가냘픈 손을 통해서 그의 건강한 맥박이 전해져 왔다. 

애나가 결혼 서약을 할 차례였다 기나긴 겨울, 얼굴도 모르는 신랑과의 결혼을 생각하는 동

안에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감동과 조바심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 애나는 그대, 칼을 합법적인 남편으로 맞아 오늘 이 시간부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

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애나 역시 침묵으로 마음의 서약을 계속했다. 

'당신을 속여서 미안해요, 칼, 용서해 줘요. 하지만 제임스와 나한테는 다른 방도가 없었어

요. 이제 다시는 절대로 당신을 속이지 않겠어요. 우리에겐 부유한 생활 같은 건 필요 없어

요, 그저 아늑한 집이면 충분하죠.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열심히 배우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은혜는 어떻게든 꼭 갚을 거예요.'

그려는 칼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애나의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그가 피에럿 신부를 쳐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금반지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금을 구할 여유도 없었지만, 모리셋의 가게에도 달리 쓸 만

한 반지가 없더군요. 그래도 반지 없이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저 모양만 갖춘 반지를 마

련해 봤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네, 칼."

칼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말굽을 박을 때 쓰는 징을 둥글게 구부려 만든 반지를 꺼냈다. 

애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벌써 값비싼 보석 반지를 대하듯 활짝 

미소를 지으며 무쇠 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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