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그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꿈결처럼 애나가 눈꺼풀을 움직였다.
"애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뜬 순간, 그녀의 표정엔 벌써 두려움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애나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빠르게 변해 가는 그녀의
표정에서, 이제야 이곳이 어디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기력하고 어리디 어린 소녀의 조심스러운 안색이 안쓰러웠다. 그는 일부러 농담을 했다.
"당신 눈에 달걀귀신이 붙은 것 같소."
애나는 아직도 놀라움으로 말을 잃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눈을 깜박였다. 어젯밤 울다 잠이 들었으므로 눈물이 말라붙어 눈곱이 생
긴 모양이었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오. 세수 먼저 하고 잠시 후에 나와 얘기를 좀 합시다."
칼의 목소리에 제임스도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년에게 말했다.
"너도 일어나야지. 누나가 준비하는 동안 우린 나가 있는 게 좋겠다."
그가 먼저 방을 나갔다.
"누나, 어떻게 하겠대?"
"아직 몰라. 그냥 얘기 좀 하자고 만 했어. 우리가 일어날 시간을 주고 나서 다시 들어오겠
지."
"그럼, 어서 서둘러."
제임스가 황급히 방을 빠져 나간 뒤에도 애나는 물소 가죽의 아늑한 온기가 아쉬워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칼이 무슨 결정을 내렸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를 깨우며 칼이 했던 말이 이상스레 머릿속에 맴돌았다.
달걀귀신이라구? 어린아이를 깨울 때나 쓰는 부드러운 말이었다.
어쩌면 그는 언제나 그렇게 상냥한 남자인지도 몰라. 어젠 나와 제임스의 거짓말이 탄로나는
바람에 극도로 화가 나 있었던 것뿐일 거야.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린드스트롬은 그다지
사납거나 까탈스러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조금 전처럼 원래는 아주 부드러운 남자일 거야
하지만 매일 아침 그와 한 침대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애나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드레스의 주름을 대충 펴고, 세수를 한 뒤 머리를 뒤로 묶었
다. 무거운 물소 가죽을 정리하려고 침대에 무릎을 꿇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엉거주춤 앉아서 들어서는 칼을 쳐다보았다.
그는 세수를 마치고 단정하게 머리까지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이상하게 생긴 작은 모자도 다시 쓰고 있었다. 자신이 다가설 때마다 화등잔만하게 커지는
애나의 갈색 눈을 바라보며, 칼은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잘 잤소, 애나?"
"네, 잘 잤어요."
제임스처럼 그녀의 목소리도 깊이 잠겨 이상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조
금 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잊은 듯 그녀는 모피 자락을 쥐고만 있었다.
칼은 그녀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아침 인사를 건넸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를 더
욱 움츠러들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는 개키다 만 물소 가죽 위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애나, 난 별로 잘 자지 못했소. 늦게까지 생각을 좀 하느라고…… . 그러다가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겠소?"
애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어젠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다는 것이었소. 내가 원하는 아내 상에만 이기적으로 집착하다
보니, 나에 대한 당신의 의견 따위는 돌아볼 겨를이 없었소. 그건 옳지 못한 일이오, 애나.
오늘 내려야 할 결정은, 나 혼자서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해내야 할 몫이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나는 줄곧 시선을 내리깐 채 무릎에
기대고 있는 그의 팔꿈치를 응시했다.
"시작부터 다시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 우리는 결혼하기로 동의했지만, 서로를 만나고 나서
부터 일이 틀어졌소. 당신을 만났을 때, 난 당신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만 화가 나
서 당신이 왜 거짓말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소.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신과
동생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피에럿 신부님께서 조언을 해주시더군."
칼은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쳐다보았다. 점점이 뿌려진 주근깨를 응시하는 동안,
그의 몸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심장이 북소리처럼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애나가 어서 눈길을 들어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시선을 피하고 있는 한,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애나는 예기치 못했던 그의 부드러운 이해심에 감동해서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이
런 식의 사려 깊은 배려는 그녀에게 아주 낯선 것이었다. 그녀는 깊고 푸른 그의 눈빛을 쳐
다보고 싶었지만, 눈길을 마주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못 박힌 듯 줄곧 그의 검게 그을은
손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애나, 지금도 늦지는 않았소. 우리 둘 다 마음을 바꿀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오. 나
를 만나고 나서, 어쩌면, 어쩌면 이젠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소.
어린 나이에 당신과 동생이 살아갈 방도를 찾다 보니 충분히 생각지도 않고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 나를 직접 만나 보았으니, 실수했다 싶으면 마음을 돌려도 괜찮아
요. 난 당신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주겠소. 먼저 당신이 돌아가고 싶다면,
피에럿 신부님과 내가 어떻게든 당신들을 보스턴으로 안전하게 보낼 방법을 찾아보겠소. 그
리고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면, 난 당신에게 나와 결혼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줄 생각이오."
애나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눈물 방울이 속눈썹에 맺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
"우린 돌아갈 집도 도움을 구할 친척도 없다고 말했잖아요."
그녀의 눈길은 이제 굳은살이 박힌 그의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신부님과 상의해서 여기 미네소타에 적당한 곳을 찾아봐 줄 수도 있소."
"전 당신의 집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애나는 간신히 용기를 내었다.
그래, 그녀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어.
칼은 떨리는 애나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진심이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른 여자들처럼 정정당당하게 청혼에 대답할 권리가 있는 거요. 얼굴도
보기 전이 아니라 신랑감을 만나 보고 난 후에 말이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주 가까이 에서 줄곧 그녀의 시선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
던 그의 눈길과 부딪쳤다. 물기가 촉촉한 푸른 눈에는 진지함이 깊게 어려있었다. 애나는 갑
자기 그의 눈을 바라보며 심장이 멎을 듯한 설레임을 느낀 여자가 얼마나 많았을지, 질투심
이 일었다. 활처럼 정확하게 휘어진 그의 눈썹을 따라 손가락을 대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
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 같은 충동을 억누르고 물소 가죽을 세게 움켜 잡았을 뿐이다.
"애나…… ."
그가 길게 여운을 남기고 뜸을 들이는 동안, 애나는 속으로 몇번이나 '그래요, 그래요, 나는
애나예요.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러 줘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가 말했다.
"애나, 당신이 기대했던 인물에 내가 못 미친다고 해도 이해하겠소. 하지만 우리가 어제 있
었던 바보 같은 시작을 서로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 잘해 낼 수 있을 거요. 난 당신
과 제임스를 함께 데려갈 생각이오."
그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머리 위로 움직이더니 모자를 벗어들었다 전통적인 청혼 예절에 애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가 다른 손으로 애나의 팔을 잡았다. 그의 따스한 손길과 진지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절실함 때문에 애나는 가슴이 벅차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애나 레어든, 나와 결혼해 주겠소?"
애나는 환상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잘생긴 금발의 거인이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간절한 희망과 약속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에게 구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여겨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