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칼의 말을 막았다.
"칼, 나를 바보로 생각하지 말게. 일단 결혼하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살
아야 할 걸세. 어느 멍청이가 못생긴 아내를 원하겠는가?"
칼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놀라운데요, 신부님. 인간의 세속적인 감정에 대해서 그토록 관대한 포용력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허허, 신부이기 이전에 나토 한 남자일세."
잠시 후, 칼은 웃음기가 가신 진지한 표정으로 피에럿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솔직히 인정하죠. 전 애나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말
예요. 그래서 그녀의 거짓말에 대해서도 제대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말해 보게."
신부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애나는 너무 어립니다. 전 스물다섯 살의 성숙한 여자를 기대했어요. 그런데 애나는 겨우
열일곱 살이라는군요."
"그렇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자네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남매는 무척이나 절박했었나 봐요. 제가 마지막 희망
이었겠죠. 결혼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떠나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결정한 일이라는 생
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직접 얘기하던가?"
"아뇨, 그냥 제 느낌이 그래요. 제발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그녀의 눈빛에서 전
갈 데 없는 어린아이의 두려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
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칼, 자낸 지금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하고 있는 거야.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성숙했는지 아
닌지는 본인이 판단할 문제야. 왜 자네가 그런 걱정을 하나?"
"하지만 열일곱 살은 너무…… .게다가 집안일은 물론이고 요리도 전혀 할 줄 모른다고 스스
로 인정했는걸요. 가르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혈기 왕성한 아가씨를 가르치려면 제법 재미도 있겠군."
"그만큼 속께나 썩겠죠."
"칼, 애나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는 생각해 봤나? 두 남매에게 자네가 마지막 희망이었다면,
왜 그녀가 거짓말을 해야 했는지 알 것도 같네. 거짓말 자체를 용서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면 난 저들을 용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원래는 정직한 사람인데 어려운 상황에서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고 한 번 상상해 보게.
자낸 너무 성급하게 자신의 입장에서만 그녀를 판단하고 있는지도 몰라."
"신부님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할 것이 많아졌군요. 전 평생동안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른 일에 대해서 그 원인이 되는 상
황까지 헤아려 본 적이 없었어요. 오늘 밤, 신부님 덕택에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
는 법도 배웠습니다. 조언해 주신대로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칼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교실로 향하는 문 쪽을 흘긋 바라보고 나
서 말을 이었다.
"지금쯤 애나와 제임스는 깊이 잠들어 있겠죠. 저도 그리로 가서 생각을 마저 정리해야겠네
요."
"잘 자게, 칼."
칼은 파이프에서 담뱃재를 털어 내며 조용히 덧붙였다.
"저한테 했던 거짓말은 그게 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도 약
속했어요. 약속은 소중한 거죠."
피에럿 신부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칼 린드스트롬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그는
이 선량한 젊은이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지, 그리고 얼마나 갈등을 겪고 있을지 이
해할 수 있었다. 대개 험난한 개척지에서 2년 동안이나 독수 공방을 한남자라면 눈앞의 여자
를 손에 넣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칼은 보기 드물게 올곧고
정직한 젊은이였다. 이런 젊은이와 결혼을 하게 되다니, 애나 레어든은 진정 행운의 여인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잠자리가 마련된 교실은 어둡고 건조했다. 칼은 빈 침상에 누워 양손을 머리 뒤로 깍지 꼈다
. 피에컨 신부가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며, 그는 처음으로 죄책감 없이 애나를 한
여인으로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도저히 불가능했다 여전히 애나는 어린애로만
여겨졌다. 그녀는 키가 컸지만 너무 말라서 풋내기 소년처럼 보였다.
공포로 커다래진 애나의 눈망울을 보며, 칼은 그녀가 결혼한 부부의 잠자리에 대해 아무 것
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은 한편으로 그를 기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걱정되기도 했다. 아내의 의무를 충분히 알고 있는 스물다섯 살의 신부를 침대로 데려
가는 것과, 겁에 질린 열일곱 살짜리 어린애를 침대로 끌고 가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애나는 단단한 그의 가슴에 끌어안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섬약해 보였다.
그녀를 포옹하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가슴에 난 체모가 일제히 곤두섰다. 그는 셔츠 위로 넓
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참으로 널찍한 가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을 통해 단련된 팔은
두껍게 근육질이 덮여 있었다. 길다란 허벅지 역시 단단했다. 아버지를 그대로 닳아, 칼은
키가 크고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몸매를 홀린 듯이 바
라보는 여자들의 시선을 당연하게 여기곤 했다.
그러나 지금 애나를 생각하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건장한 체격이 그녀에게는 두렵게 느껴
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애나
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
고 애원하기는 했지만, 그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단순히 두려움이 자아낸 결과일지도 몰랐다.
겁에 질린 소녀가 돈 한푼 없이 거친 황무지에 버려질 판에 달리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었
겠는가?
다시 한 번 그는 자신의 아담한 판자집과 그녀를 위해 준비했던 침대를 떠올렸다. 스위트 클
로버가 담긴 주머니를 발견한 후에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불안한 마음에 그의 심장이 빠
르게 뛰었다.
오로지 신부를 침대로 데려가겠다는 불순한 생각만으로 그런 준비를 한 것처럼 보이면 어쩌
나?
단순한 환영의 의미로 베개 사이에 놓아 둔 스위트 클로버를 보고 그녀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려 버린다면 낭패였다.
애나,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신을 돌려보내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지? 함께 지내게 된다면,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야 잘 어울릴 수 있는 걸까?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새벽에 칼은 잠에서 깨어났다. 밤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라 창문
으로 스며든 엷은 빛이 힘겯게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칼을 향해 옆으로 누워 있는 애나의
전신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 팔을 베개 삼아 베고 아기처럼 고개를 푹 수
그린 채 잠들어 있는 그녀의 표정은 너무도 순진 무구해 보였다. 칼은 자신이 옳은 결정을
한 것인지 다시 한번 반문했다
칼은 지난밤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두사람을 위해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무엇이 옳
은 길인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결혼을 결심했다. 칼 린드스트롬은 소년과 함에 세 사람이
마음을 모아서 단란한 가족을 이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비록 첫출발은 약간 어긋나 버
렸지만, 모든 잘잘못을 잊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에게 인내심이 필요하다면, 애나
에게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부족한 각자의 장점을 바탕으로 결혼이라는
탄탄한 성을 쌓아 나가게 되리라.
애나는 이미 많은 여자들이 갖지 못한 강인함을 보여 주었다.
책임져야 할 동생을 데리고 이토록 먼 길을 떠나 온 용기만으로도 그녀의 결단력은 증명된
셈이었다. 그처럼 확고한 용기는 거친 개척지에서 무척이나 귀중한 재산이었다.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웠던 칼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애나의 곁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
다. 그는 여동생과 어머니 말고는 잠든 여자를 깨워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색하게 그녀의
팔을 잡아 가만히 흔들었다. 물소 가죽으로 만든 이불 위로 느슨하게 드리워진 애나의 팔은
길고 가늘었다. 하얀 손등에도 흐릿한 주근깨가 몇 개 박혀 있었다. 이른 아침의 어슴푸레한
빛으로도 그녀의콧등과 볼에 사랑스럽게 흩뿌려진 주근깨가 눈에 띄었다. 이처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린아이처럼 깊이 잠들어 있는 애나를 보며, 칼은 못된 짓
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