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제 당신의 진짜 나이를 말해 봐요."
애나는 시선을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스무 살이에요."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초윈의 엉겅퀴꽃 색깔처럼 붉게 물들었다. 칼은 가시가 많은 그 꽃을
싫어했다.
"내가 믿지 못하겠다면?"
그녀는 계면쩍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계속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동생에게 대신 대답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둘이서 나를 속이려고 단단히 짠 것 같으니 물
어 보나 마나겠지."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는 꼭 진실을 알고 말겠다는 고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애나는 갑자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난 열일곱 살이에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에요?"
칼은 갑작스럽게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조심스럽게 웃음을 참았다.
"그래서 어쩌라니?"
그는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 입에 집어삼키기 전에 생쥐를 가지
고 노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난 지금, 편지에 씌어 있던 대로 당신이 진짜 요리와 가사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중
이오."
애나는 예쁘장한 입술을 꼭 다물고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보았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했던 것, 절대 잊지 말아요."
"열일곱 살이라고 실토했잖아요. 더 뭘 원하는 거죠?"
"난 요리를 할 줄 아는 아내를 원해요. 요리할 수 있소?"
"약간은요."
"약간이라면?"
"저어, 잘은 못해요. 하지만 배우면 되잖아요?"
"글쎄…… 어떻게 배운단 말이오? 내가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건가?"
그녀는 대답이 궁했다.
"집안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는 거요?"
그녀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가 옆구리를 꾹 찔렀다.
"얼마나 아느냐고 물었소."
애나는 몸서리를 치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요리 솜씨랑 비슷해요."
"비누 만들 줄 알아요?"
대답이 없었다.
"양초는?"
역시 묵묵 부담이었다
"빵은 구을 줄 아오?"
침묵.
"그렇다면 당신은 농사일이나 정원 가꾸기, 집안 손질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겠군."
"그래도 바느질은 할 수 있어요!"
"바느질이라…… .
칼은 자조적으로 그녀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그러더니 마차바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바느질은 할 줄 안다는군."
그리고 나서 칼은 스웨덴어로 혼잣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빠른 독백을 듣고 있는 동안, 애나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드디어 그가 잠잠해졌다. 칼은 그녀를 외면한 채 마차 바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애나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당신은 스웨덴 아가씨가 미네소타에 나타날 때까지 좀더 기다리는 건데 그랬어요. 내 말이
맞죠?"
이번에는 그녀가 말의 잔등을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그런 것 같소."
칼이 다시 영어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허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열일곱 살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바느질뿐이라니…… .
그리고 나서도 한참을 더 침묵하던 그가 드디어 애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칼은 스물다섯
살짜리 남자가 열일곱 살 어린 소녀를 침대로 데려가면서도 파렴치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는 애나의 가슴을 내려다본 뒤, 제임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가 다시 애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모르는 것이 아직도 수두룩한 것 같소."
"열일곱 살이란 게 뭐 그리 대수죠? 난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다 잘할 수 있어요!"
큰소리를 쳤지만, 그녀의 얼굴은 또다시 붉어져 있었다.
"당신은 큰소리 치는 데는 선수로군. 하지만 난 변명을 늘어놓는 여자는 필요없소."
칼은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을 경우 이렇게 쉽게 발끈하는 아일랜드인 기질을 평생 동안
참고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두 남매를 돌려보낸다면, 또다시 혼자서 외롭게 한두 해를 더 버터야 하는 게 문제였
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소."
"저, 누나하고 제가…… ."
제임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중일 때에는 방해하지 마."
칼이 명령했다.
제임스와 애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칼이 곧 마차를 움직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는 왜 오랫동안 정적 속에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침묵 속의 사색은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는
문제가 생겼을 경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히 심사 숙고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발생하
든 대부분 현명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돌덩이처럼 앉아서 사색에 잠겨 있는 동
안, 저녁때가 가까워졌는지 새끼들을 부르는 어미새의 노랫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고요하게 시작되는 여름의 저녁 나절이 애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스턴에서는 좀처럼 새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이맘때면 새소리 대신에 일찍 문을 연 선술집에서 노랫소리가 흘
러나오고 있을 시간이었다. 애나는 벌써부터 새소리가 좋아졌다. 칼은 편지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예쁜 새들이 많다고 적어 보냈었다.
과연 그 새들을 만나 볼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질까?
"애나!"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른 거짓말을 한 게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털어놔 봐요.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
제임스가 어서 말하라는 듯이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그런 것 없어요! 달리 속일 게 또 뭐가 있겠어요?"
그녀의 말투는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어서, 스스로도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이오? 그 말 새겨 두겠소."
그가 고삐를 고쳐 잡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당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는 두 채의 통나무집 앞에서 칼은 말들을 세웠다. 조금 더 큰
건물의 꼭대기에는 엉성하게나마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작은 건물은 학교로 쓰이는 것 같
았다.
"아직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소. 처음 계획대로 오늘 밤은 이곳에서 묵으면서 피에럿 신부
님께 지혜를 빌릴 생각이오. 내일아침에 모든 것을 결정할 거요. 당신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다음 역마차 편에 보스턴으로 돌려보낼 것인지를 말이오."
애나의 귀에는 '신부님'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의미 심장하게 들렸다.
"피에럿 신부님이라뇨? 그렇다면, 이곳이 천주교 성당이라는 말인가요?"
벌써부터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번 위기는 어떻게 모면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