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칼은 거짓말 자체보다도 그 사실을 합리화하려는 그녀의 사고방식에 더욱더 실망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소? 나도 굶주렸던 적이 있었소.
하지만 아무리 배가 고파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을 꾸며
대지는 않아!"
"그렇게 정직하고 잘난 사람이라면 약속대로 나와 결혼을 하라구요!"
"약속이라구! 난 지금 그 약속이 당신의 속임수 때문에 깨어졌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난
당신의 여행 경비로 귀한 돈을 날렸소. 그건 어쩔 셈이오? 내게 진 빛을 갚을 수 있소? 아
니면, 나를 돈도 날리고 신부감도 날려 버린 바보 멍청이로 만들겠다는 심산인가?"
"돈으로 같아 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우리를, 우리 둘을 모두 데려가 준다면 열심히 일하겠
어요. 당신에게 진 빛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애나는 충격으로 흔들리는 칼 린드스트롬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렸다. 선량한 그의 눈빛은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제임스가 끼여들었다.
"린드스트롬 씨,제 밥값은 톡톡히 하겠어요. 두고 보세요. 전 보기보다 힘이 세요. 당신이
계획하고 있는 통나무집을 짓는 것도 도와드릴게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두어들이는 일
도 도울 수 있어요."
칼의 시선은, 여전히 종긋 선 말의 귀에 고정되어 있었다. 꽉 다물어진 그의 턱이 부풀어오
른 것처럼 보였다.
"너, 마차 몰 줄 아니?"
그가 낮게 물었다.
"아…… 아뇨."
"쟁기는 다를 줄 알아?"
"해본 적 없어요."
"벌목용 사슬이나 도끼를 쓸 수는 있겠어?"
"배…… 배우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일들을 배우려면 시간이 걸리지. 여기에선 시간도 아주 소중한 재산이야. 곡식들이 자
라는 기간은 짧고 겨울은 길기 때문이지. 넌 아무 기술도 없이 나타나선 나한테 모든 걸 가
르쳐 달라는 말이냐? 겨우 한 해 여름 동안 마부에, 벌목 기술자에, 농부까지 될 수 있을 것
같아?"
애나는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포기
할 수는 없었다.
"동생은 뭐든 빨리 배워요, 린드스트롬 씨.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칼은 곁눈으로 그녀를 슬쩍 쳐다본 뒤, 고개를 떨구고 머리를 흔들었다.
"난 벌써 후회하고 있소. 신문 광고로 신부를 구해 보겠다는 생각을 해낸 사실 자체가 후회
스럽소. 하지만 난 2년 동안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사 오기를, 다른 여자들이 나타나주기를
기다렸소. 스웨덴에 있을 때, 미네소타로 이민 오는 것에 대해 다들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난 다른 사람들도 머지않아 나를 따라서 이곳으로 올 것이라고 믿었지.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소. 이 얘기는 이미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어쨌든,
내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니까 그 점을 이용할 생각도 했겠지만…… ."
그의 목소리에서 서글픔이 묻어 났다.
"그랬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일손이 하나 더 늘어나면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에요."
갑자기 미안해진 애나는 공연히 손톱 주변을 물어뜯었다.
분명히 말해 둘 사실이 하나 더 있었지만, 칼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건강한 청년의 자연스런 성적 욕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선 좀처럼 설명하기 힘
든 부분이었다. 그는 처남과 함께 쓰는 방안에서 신부를 침대로 데려가는 광경을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런 말을 입 밖에 낸다면 애나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그는 벨의 튼실한
목덜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빙빙 돌려서 간신히 자신의 뜻을 내비쳤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엔 방이 하나밖에 없소."
애나는 손놀림을 멈추었다. 칼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만의 은밀한 시간이 방해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부드럽게 돌려서
전달한 그의 마음 씀씀이에 애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는 애나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결점 없는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칼 린드
스트롬은 장점으로만 돌돌 뭉쳐진 남자인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칼에게 어울릴 수 있을 만
큼 자신이 좀더 그럴듯한 조건을 갖춘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순간, 칼이 고개를 돌렸다면 살짝 얼굴을 붉히는 애처로운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잇따라 떠오르는 불쾌한 생각에 잠겨 있었
다. 어쩌면 애나가 두 사람만의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빌미로 아내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었다. 그런 얘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기억이 떠올랐고, 그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어린 동생
이 지켜보는 앞에서.
칼이 바라는 것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주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작은 집으로
신부를 데려가는 일뿐이었다. 둘만의 공간에서, 그는 정상적인 연애 과정을 거친 다른 부부
들처럼 충분히 시간을 두고 아내의 사랑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아, 우린 참으로 이상한 방법으로 만났군, 애나.
칼 린드스트롬은 자꾸만 서글퍼지는 자신을 느꼈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작지만 아늑한 판자집에 귀여운 빨간 머리 아가씨를 데리고 들어갈 생각을 하면, 언제나 마
음이 半듯했었다. 밭에서 골라 낸 돌과 진흙을 빚어서 손수 만든 벽난로를 그녀에게 자랑스
럽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의 땅에서 베어 낸 호두나무로 만든 튼튼한 식탁과 의자도 자랑
할 참이었다. 줄기가 긴 목초만 골라다가 침대가장자리를 장식할 새끼를 꼬느라고 보낸 시간
이 얼마인지 몰랐다. 지난 가을에는 부드럽고 폭신한 쿠션의 침대를 만들기 위해 옥수수 잎
을 말리느라고 애를 썼다. 들판을 쏘다니며 두 사람의 베개에 넣을 버들강아지를 찾기 위해
서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다. 물소 모피로 만든 이불은 여러 번 햇볕에 말리고 먼지를
턴 다음 향긋한 냄새가 나는 약초로 문질러 얌전하게 손질해 두었다. 얼마 전에는 향기가
좋은 스위트 클로버 꽃을 잔뜩 따다가 두 사람의 베개가 맞닿는 침대 가운데에 조심스럽게
놓아두기도 했다.
칼은 소중한 신부를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의 소중한 신부
가 그의 신뢰를 저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칼의 고귀한 정성을 누릴 가치가 없는 여자인
지도 몰랐다. 첫날밤을 치르는 동안 마룻바닥에서 뒹굴고 있을 남동생을 한마디 말도 없이
데려온 것이다.
칼은 오랫동안 고요 속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애나와 제임스는 가만히 입을 봉하고 기다
렸다. 불편한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더 이상 적막감을 견디지 못한 애나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시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어요."
드디어 칼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후회와 죄책감의 빛이 역력했으므로 그는 절
망감이 조금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애나가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일삼
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은, 지난해
6월 그의 땅에 피어났던 야생 장미를 떠올리게 했다. 애나의 장미빛 얼굴을 바라보며, 칼은
충동적으로 그 꽃을 꺾어 집으로 가져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외로움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건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버들강아지가 사각거리는 베
개 위에 놓인 그녀의 장미및 뺨을 상상하니 그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칼은 금빛 가루를 송송
뿌려 놓은 것 같은 그녀의 주근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주근깨는 그녀를 순진무구한 소녀
처럼 보이게 했다. 순간, 그는 애나의 거짓말이 떼를 쓰는 아이의 귀여운 투정처럼 느껴졌다
.
"약속하는 거요? 다시는 나를 속이지 않겠다고?"
그는 애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네, 약속해요."
애나는 그의 진지한 시선에 눈을 맞추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